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범주화 지각의 특징이 가장 나쁘게 작동되는 예들 (최훈)
    인종주의 2024. 12. 1. 18:28

    원문: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4/11/28/2024112802341.html

     

    스팸은 햄인가, 소시지인가?

    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사진 = 클립아트코리아 “아빠, 아빠! 햄이 비를 맞으면? 습햄(스팸)! 재밌지, 재밌지? 푸하하하!” 최근 아재 개그에 빠져있는 초등학교 3학년 막내 아이가 내가 답을 할 시

    health.chosun.com

    “아빠, 아빠! 햄이 비를 맞으면? 습햄(스팸)! 재밌지, 재밌지? 푸하하하!”

    최근 아재 개그에 빠져있는 초등학교 3학년 막내 아이가 내가 답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문자답에 이은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나도 그냥 웃으며 끝내면 좋을 텐데, 눈치 없는 입술이 움직인다.

    “스팸은 햄이 아닌데?”
    “햄이야!”
    “아니야.”
    “아빤, 이상해!”
    (미안하다, 아들아. 아빠 T인가봐.)

    스팸. 한국인의 소울푸드 중 하나에 해당하는 식품이 아닐까? 흰 쌀밥에 올라간 짭조름한 분홍색 스팸.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런데 스팸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의 나는 스팸이 햄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사실 스팸 말고는 딱히 햄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스팸이 사실은 햄이라고 할 수 없단다. 차라리 소시지에 더 가깝다고 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말. 원래 비닐 같은 껍질이 있고 길쭉하게 생긴 것이 소시지, 반대로 넙데데하게 생긴 것이 햄 아닌가? 넙데데한 스팸은 당연히 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런데 외국에 나가서 접해본 소시지는 항상 껍질이 있지도 않았고, 길쭉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모 패스트푸드 식당의 소시지 머핀에 있는 소시지만 해도 그렇다. 얼핏 보면 햄버거 패티처럼 생겼다. 그런데도 소시지란다.

    사실 소시지와 햄의 구분에서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고기의 분쇄 여부라고 한다. 햄은 고기 덩어리 자체를 절이거나 훈제를 해서 만드는 것이고, 소시지는 고기를 갈아서 케이싱(비닐 껍질 같은 것)에 넣어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케이싱 없이 패티처럼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고기를 갈아 만든 스팸은 햄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존재가 된다.

    맛있으면 됐지, 햄인지 소시지인지가 뭐가 중요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햄인 듯 소시지인 듯한 스팸의 정체를 들으면 뭔가 마음이 불편해 할 것이다. 어떤 사물을 특정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 지각·인지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인지 시스템이 갖는 궁극적 목표는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어두운 숲을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면 공포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의 정체가 새끼 길고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안심이 된다. 혹시 소리의 정체가 호랑이라면 난감한 상태가 되겠지만, 그래도 정체를 모를 때보다는 낫다. 대상을 알면 확실한 대응 전략(도망을 간다던가, 죽은 척을 한다던가, 아니면 떡을 하나 던져준다던가)이라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각각 세세하게 처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범주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나의 사물을 더 큰 범주로 구분해 관리한다.

    예를 들어, 무지개를 생각해보자. 모든 독자들이 알고 있듯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 7개 색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실제 무지개는 7개 색이 아닌, 380nm에서 750nm에 걸친 스펙트럼이다. 그 안에서 색과 관련된 파장이 연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무지개에는 수만 가지의 색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스펙트럼을 7개의 색으로 범주화시켜 받아들인다. 이런 것을 범주화 지각이라고 한다.

    범주화 지각을 하면, 하나의 범주로 묶인 개체끼리는 더 유사하게 지각을 하고, 다른 범주에 묶인 개체들은 더 차이가 나도록 지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래의 그림을 통해서도 쉽게 경험해 볼 수 있다.

    *범주화 지각을 표현하는 막대 그림 / 최훈 교수 제공



    왼쪽 그림에서는 1번 선분에서 6번 선분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른쪽 그림에서처럼 1~3번 선분은 A집단(긴 선분 집단), 4~6번은 B집단(짧은 선분 집단)으로 구분하면, 각 집단 내에 속한 선분들끼리는 그 차이가 줄어 보인다.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3,4번 선분의 차이는 왼쪽에서보다 더 크게 보인다.

    이런 범주화 지각의 특징이 가장 나쁘게 작동되는 예들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같은 것들이다. 인종에 대한 선입견이나 지역 감정 등은 각 사회가 가진 상처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최근 유행인 MBTI도 결국은 범주화의 속성을 갖는다. 한 개인을 범주를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에 긍정적인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범주화의 폐해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는 있다.

    그래서 스팸은 햄인가 소시지인가. 사실 스팸은 이도 저도 아니다. 소시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스팸을 자신의 선호 범주로 인정하는 것을 싫어한다. 통조림용 가공육이라는 범주가 적당한 위치일지 모른다. 햄으로도 소시지로도 인정받는 못하는 스팸은 얼마나 슬플까? 전 세계적으로 제대로 된 ‘음식’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스팸의 처지가 그대로 반영된 느낌이다. 하지만 스팸은 우리나라에서 사랑받고 있는 음식이다. 명절 선물로, 외로운 나의 식탁을 채워주는 친구로, 이젠 전 세계적으로 한국 음식으로 인정받는 부대찌개의 주재료로 스팸은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집단에 소속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집단에 속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개인화가 심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소속감을 느끼기 더 어렵다. 그래서 내가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일종의 떠도는 부랑자의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속할 곳을 쉽게 찾지 못하더라도 너무 좌절하지는 말자. 조금만 참고 버티면, 스팸이 우리나라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소속을 얻고,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 것 같은 날이 올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