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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크로우가 미국 독수리에 올라타다"인종주의 2024. 5. 25. 15:41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40516/124964881/1
정미경의 이런영어 저런미국 ㅣ 동아일보 2024-05-22
"Jim Crow rides the American eagle."
(짐 크로우가 미국 독수리에 올라타다)학생 시위의 시초는 1943년 흑인 대학 하워드대 학생들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입니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백인과 흑인 군인이 해외 전장에서 힘을 합쳐 싸우는 마당에 국내에서 차별받는 것을 부당하다는 것이 흑인 학생들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워드대 법대생 3명이 워싱턴 시내의 백인 전용 음식점 ‘톰슨스’에 들어갔습니다. 착석을 거부당하자 카운터 좌석에 앉았습니다. 가방에서 잡지, 연필, 시집 등을 꺼냈습니다. 장기전에 들어간다는 신호였습니다. 이어 흑인 학생들이 계속 입장했습니다. 나중에는 카페에 흑인 학생 200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문을 받지 않고 4시간 동안 버티던 주인은 본사로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주문을 받으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이런 시위 방식을 장소 내부에 앉아 벌인다고 해서 싯인(sit-in) 시위라고 합니다. 정부 보조금이 중단될 것을 우려한 하워드대 측이 학생들에게 시위를 그만둘 것을 종용하면서 톰슨스는 다시 흑백 분리로 돌아갔지만, 흑인이 백인 음식점을 이용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입니다. ‘crow rides eagle’은 유명한 속담입니다. ‘까마귀가 독수리 위에 탄다’라는 뜻입니다. 약자는 강자를 이용해 생존한다는 의미입니다. 속담을 살짝 비틀어 ‘crow’ 앞에 ‘Jim’, ‘eagle’ 앞에 ‘American’을 붙였습니다. 짐 크로우는 19세기 연극에 등장하는 흑인 주인공 이름에서 유래한 흑인 차별 관습을 말합니다. 아메리칸 이글은 미국, 즉 백인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시위가 모델이 돼서 1955년 로자 파크스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1960년 그린즈버러 4인조 등 흑인 민권운동이 막이 올랐습니다."They didn’t have blank!"
(공포탄이 아니야)
가장 광범위한 학생 시위는 1960년대 말 베트남전 반대 운동입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평화적인 시위에 주력했습니다. 세미나, 강연, 교육을 통한 베트남전의 부당성을 알리는 방식이었습니다. ‘티치인’(teach-in) 시위라고 합니다. 교실, 세미나실 등에서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1970년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긴박해졌습니다. 베트남전 철수를 공약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공약을 깨고 오히려 인접한 중립국 캄보디아를 공격한 것입니다. 확전의 의미였습니다.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오하이오 켄트주립대에서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켄트 시장은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주방위군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3000여 명의 시위대와 이틀 동안 대치하던 군대는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대항하자 실탄을 발포했습니다. 학생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Kent State Massacre’(켄트주립대 학살), ‘May 8 Massacre’(5·8 학살) 등으로 불립니다.
29명의 군인이 가담한 13초간의 짧은 총격전에서 61∼67발의 총탄이 발사됐습니다.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발포를 유발한 상황이 어땠는지 등은 지금까지 논란거리입니다. 총격 발생 직후 현장에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정적을 뚫고 메리 앤 베키오라는 여학생이 시신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학생 시위가 반전을 넘어 반정부, 반체제 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blank’(비어있는)는 공포탄을 말합니다. ‘fire blanks’ ‘shoot blanks’는 ‘공포탄을 발사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두 달 뒤 미국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했습니다."Boycott, Divestment, Sanctions."
(보이콧, 투자회수, 제재)
베트남전 운동을 계기로 학생 시위는 달라졌습니다. 과격 시위 전략을 버리고 대학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자체적인 로비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주도하는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국제적인 문제로 주목받자 뉴욕 컬럼비아대 학생들이 시위에 돌입했습니다.
학생들의 요구는 구체적이었습니다. 등록금, 기부금 등으로 운용되는 학교기금이 남아공에 투자하는 기업들로부터 손을 떼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대학 당국은 학생들을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밝혔다가 데스몬드 투투 남아공 대주교, 흑인 목사 제시 잭슨 등이 학생 지지 의사를 밝히자 결정을 바꾸었습니다. 2년 안에 총 9억 달러의 주식 포트폴리오에서 남아공 투자분 3900만 달러를 회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컬럼비아대는 남아공 투자를 회수한 첫 아이비리그 대학이 됐습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는 30억 달러를 회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경제에 치중하는 남아공 시위 방식을 ‘BDS’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Boycott’(보이콧)은 해당국이 주최하는 문화, 스포츠, 학술 행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Divestment’는 투자 회수입니다. ‘Sanction’은 남아공과 거래를 끊도록 정부에 압력을 넣는 한편 유엔, 국제축구연맹(FIFA) 등 국제기구에 회원국 자격 박탈 청원을 넣는 것입니다.켄트주립대 총격 사건 뒤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는 사상 최대 인파 10만 명이 모였습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링컨기념관 앞 시위에서 여자친구 제니와 재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뉴욕에서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시위대는 월가에 있는 연방홀에 집결했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선서를 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노동자들이 맞불 시위를 벌였습니다. ‘anti-anti-war protests’(반반전 시위)로 불립니다.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전쟁의 실상도 모르면서 길거리로 나온 것을 배부른 투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애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슬로건입니다.
"America, love it or leave it."
(미국을 사랑하던지 그냥 놔둬라)
‘leave’는 뒤에 나오는 대상을 ‘남겨두다,’ 즉 ‘떠나다’라는 뜻입니다. ‘live’(살다)와 발음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leave’는 ‘리’를 길게 끌고, ‘live’는 짧게 끊습니다. 물건을 흥정할 때 용어 ‘take it or leave it’에서 유래했습니다. 상인이 최후의 가격을 제시한 뒤 그 가격에 가져가든지(take it) 그냥 놓고 가든지(leave it) 택하라는 뜻입니다. 학생들에게 미국을 사랑하든지 조용히 놓아두든지 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맞불 시위자는 대부분 힘든 일을 하는 건설 노동자였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쓰는 안전모를 쓰고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안전모를 ‘hard hat’(하드햇)이라고 합니다. ‘딱딱한 모자’라는 뜻입니다. 이 시위를 ‘hard hat riot’(안전모 폭동)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노동자 시위대를 환영했습니다. 백악관에 초대했습니다. 시위대는 닉슨 대통령에게 안전모를 선물했습니다. 안전모는 지금도 닉슨 도서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은 나중에 닉슨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에까지 올랐습니다. 애국주의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노동자 지지층의 유래를 따져보면 안전모 시위대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