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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더피프틴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글 서정민갑)
    대중음악아카이브/분석과 비평 2025. 3. 21. 03:24

    https://vop.co.kr/A00001668732.html

     

    [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언더피프틴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만 15세 이하 K팝 신동 발굴 세대교체 오디션’이 던지는 질문과 반성

    vop.co.kr

    MBN에서 ‘언더피프틴’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이다. “만 15세 이하 K팝 신동 발굴 세대교체 오디션”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제목 그대로 15살 이하의 여자 어린이/청소년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8세부터 15세까지 다양한 국적의 여자 어린이와 청소년 총 59명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예술시장에서 젊음을 상품으로 삼은 지는 오래 되었다. 대중예술인들은 자신의 젊음을 과시하고,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이려 애쓴다. 우리 사회에서도 언젠가부터 젊어 보인다는 말은 칭찬이지만,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은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은 말이 되었다. 특히 케이팝 시장에서는 10대 때 데뷔하는 게 기본이다. 최근에는 데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뉴진스 사례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평균연령 14.5세라는 최연소 걸그룹 버비(BURBEY)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15세 이하의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케이팝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방송하는 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그렇게 흘러간다고 해서 모든 게 정당해지는 건 아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케이팝 아이돌을 지금 같은 방식으로 10대 때부터 조련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하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청춘을 완전히 저당 잡히는 방식은 모두들 지대地代를 추구하는 한국사회의 판박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 그러다 갈려 나가는 사람들은 보지 않으려 눈 감는 사회, 성공하기만 하면 오래도록 안정된 권력을 누려도 된다고 믿는 사회가 바로 한국 아닌가. 그래서 선행학습에 몰두하는 사회의 풍경이 어린이/청소년 대상 케이팝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아직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확언할 수는 없지만 예고 영상을 보면 어린이/청소년 참가자들이 성인처럼 화장을 하고 의상을 차려 입은 채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굴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어린이/청소년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분장과 의상 앞에서 과연 어린이/청소년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까. 성공을 미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권력 앞에서 어린이/청소년은 과연 동등한 권력을 갖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까. 이들은 기존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보여준 엄청난 강행군, 가혹한 평가, 자의적인 편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꿈을 실현하기 위해 참여했지만 결국 꿈을 잃게 되는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방송국에서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얼마나 철저히 마련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실연하는 안무와 의상은 모두 적절한가. 기존의 성인 여성들이 수행하는 성역할이나 컨셉트들을 어린이/청소년이 그대로 반복해도 괜찮은 것일까. 어른은 괜찮고 어린이/청소년은 안된다고 위선에 찬 지적을 하는 게 아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어린이/청소년을 훈육하거나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제어장치가 드문 사회에서 ‘언더피프틴’ 같은 프로그램은 어린이/청소년들이 성급하게 성인화시키는 부작용을 확산시킬 수 있다. 특히 여성을 성적 대상화해 섹시한 컨셉트로 활용하는 남성의 권력이 만연한 사회, 딥페이크 같은 온라인 성폭력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에서 언더피프틴은 결과적으로 남성의 그릇된 욕망을 채워주는 또 하나의 재료가 될지 모른다.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이러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얼마나 철저하고 세심하게 대비했을까.

    이 모든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이들은 대답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것이 최선인가. 언더피프틴은 30여년에 이르는 케이팝의 역사 동안 꾸준히 이어진 질문과 반성을 얼마나 수용하고 숙고했는지 알 수 없는 프로그램이다.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그 질문과 반성을 외면한 쪽에 가까워보인다. 우리 사회는 어린이/청소년을 대하는 태도, 케이팝을 대하는 태도 모두 조금이라도 사려 깊고 신중해졌는데, 그러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과거의 타성과 문화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인기와 화제를 얻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래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자와 방송국의 철학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는 사회,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 방송이야말로 문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회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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