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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MC 메타, 불멸을 꿈꾸며힙합 아카이브/랩 창작가들 2012. 4. 20. 04:13
원문: http://www.foundmag.co.kr/965 + http://www.foundmag.co.kr/1069
F.OUND ISSUE > #15 NOVEMBER, 2011 by FOUND / 2011.12.23
에디터 > 조현준, 조하나 포토 > 김희언Still Underground
MC Meta대한민국 1세대 랩퍼, 가리온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국 힙합 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존재다. 좀 더 엄살을 부리고, 과장을 보태자면 지금의 젊은 랩퍼들이 활동하는, 화려하진 않지만 작은 무대의 기틀에는 분명 가리온의 언더그라운드 정신이 깃들어있다. 그렇게 가리온의 MC 메타가 힙합으로 길을 정하고, 그 길을 걸어온 지 15년이 흘렀다. 그 사이 그에겐 ‘한국말 랩과 프리스타일의 1인자’, ‘한국 힙합 1세대’라는 타이틀이 따르기 시작했고, 그 타이틀의 무게와 책임을 지키고 고집스럽게 한 길을 걸어가는 MC 메타가 변치 않고 우리와 함께 했다.
# Verse 1. Mr. 스트리트
형은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어요? 고향인 대구에서 태어나 만 스물넷에 상경하기 전까지 내내 대구에서 살았어요. 한 번도 대구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꼬맹이 때부터 맨날 골목대장 노릇하며, 싸움박질 하고 다니고, 애들이랑 어두워질 때까지 내내 밖에서 놀았어요. 말 그대로 ‘Mr. 스트리트’였지. 사실 그때는 그거 말고는 아이들이 놀 ‘거리’가 없었어요.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TV가 나왔으니까. (웃음) TV가 나왔어도 TV가 없는 집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고. 우리 아버지도 이제 막 소규모로 사업을 시작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구 안에서도 수십 번 이사를 다녔어요.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어디 마음도 잘 못 붙이고, 밖으로 나돌았던 거 같아요.어렸을 때 좋아했던 스포츠가 있었어요? 야구를 되게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처음 생기고, 야구 붐이 일기 시작했어요. 그때 대구에 산다고 나름 ‘삼성 라이온스’ 유니폼을 풀세트로 차려 입고, 장난감 야구 배트도 사고… 그때의 유일한 로망은 야구를 잘 하는 거. (웃음) 어린 맘에 무조건 포수나 4번 타자를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어렸을 때도 나름 그게 멋있는 거라 생각했던 거지.
밖에서 놀길 좋아하던 꼬마 아이가 음악에 관심을 보인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어렸을 때 아버지 사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공장에 재봉틀 일을 하는 여공들이 몇몇 있었어요. 둘러 앉아 일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놓는 거예요. 그 당시 ‘오빠’로 통하는 전영록부터 시작해서 유행하는 팝 음악을 무의식중에 항상 듣고 자란 거죠. 집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어디선가 팝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은연중에 음악을 많이 듣다보니, 영향을 받게 된 것 같아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래요.
음악과 가까이 지내면서 사춘기를 맞았겠네요.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밤 12시를 넘겨 잔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금기’라는 걸 깬 날이었던 거죠. (웃음) 그것도 라디오 듣다가요. 음반살 돈이 없는 학생이 다양한 음악을 듣기엔 라디오만한 게 없었어요. 오히려 중학교 땐, 클래식에 빠져서 테이프를 사 모으곤 했어요. 그러다 포크로 넘어갔죠. 포크가 가지고 있는 감성이 나와 잘 맞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당시 유행했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나 ‘USA for Africa’ 같은 프로젝트 앨범도 많이 듣고, 그 안에 있는 뮤지션들 음악을 하나하나 찾아서 듣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블랙 뮤직을 많이 듣고, 좋아하고,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아직 힙합/랩 뮤직을 만나기 전이었네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연주 음악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사실 고등학교 첫 봄 소풍에 기타를 가져와서 연주한 친구 놈이 하나 있었는데, 걔 주변에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거예요. 그 장면이 나름 나한텐 충격이었어요. (웃음) 기타 치는 애들이 여자한테 인기가 많구나 생각했죠. 그때부터 기타를 사서 혼자 독학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냥 혼자 내방 다락방에 틀어박혀서 어설픈 실력으로 노래 흥얼거리면서 연주하고 그랬어요. 고3이 되고도, 기타를 치며 주로 시간을 보냈죠. 그때의 스트레스는 다 기타로 풀었던 것 같아요. 그땐 그게 나한테 가장 재밌었던 일이었어요. 그때 연주한 걸 녹음해둔 카세트테이프를 아직도 가지고있어요. 그렇게 직접 연주를 하기 시작하면서 록 음악에 빠지게 됐어요. 록커로서 밴드를 만들고 연주를 하는 꿈을 꾸기도 했죠. 당시엔 록 음악이 아닌 건 나에겐 모두 페이크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긴 생각이지만. 그때 나는 음악에서 뭔가 강렬한 느낌을 원했었는데, 록 음악의 강한 사운드가 그걸 충족시켜줬던 것 같아요. 좀 더 ‘센’ 걸 찾아 듣고, 그게 아닌 건 나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어요.
처음으로 힙합/랩 뮤직을 접하게 된 건 언제였어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라디오를 듣다가 흘러나오는 랩 뮤직을 우연히 듣게 됐어요. 내 기억엔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였던 것 같은데… 그땐 랩 뮤직이 뭔지도 모르고, DJ가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이라고 하면서 틀어준 걸 그냥 들은 거죠. 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랩 뮤직이 페이크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어요. 근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그 음악이, 비트가, 느낌이 귓가에서 맴돌았어요. 저한텐 록 음악의 사운드만큼이나 랩 뮤직의 직설적인 메시지나 철학들이 강하게 다가온 거예요. 1989년 당시 한국에서 블랙 뮤직은 거의 구하기 어려웠어요. 어렵게 구한 O.S.T. 앨범들을 통해 랩 뮤직을 파고들기 시작했죠. 테이프 표지에 흑인이 나오거나, 왠지 갱(Gang) 분위기가 나면 무조건 사는 거예요. (웃음) 보따리 장사로 해외 음반을 들여오는 레코드점 사장님한테 부탁해서 테이프를 구하기도 하고… 특히 너티 바이 네이처(Naughty by Nature) 앨범을 들으면서 랩핑의 박력이나 랩을 통해 표현되는 진중함의 매력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가사의 내용이나 그 팀에 대한 바이오를 보면서, 그들의 진정성 있는 메시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죠. 처음엔 힙합/랩 뮤직 앨범에 ‘삐~’ 소리로 처리된 부분도 음악적 처리라고 생각할 만큼 그 장르에 대해 무지했어요.
# Verse 2. 12월 16일
형이 빠져든 뭔가를 찾은 후, 음악을 직접 하기로 결심했나요? 아니요. 그땐 ‘내가 힙합/랩 뮤직을 하는 MC가 되어야지’ 하는 건 꿈도 못 꿨어요. 그저 대학 다니면서 혼자만 좋아하는 음악 세계가 생긴 거죠.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어요. 공학을 전공했으니, 자격증을 따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 결혼하고 애 낳고… 뻔한 인생이 눈앞에 보였죠. 갑자기 내 인생이 갑갑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작정 대구를 벗어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이 타이밍을 놓치면 영영 못 벗어날 거 같다는 생각도 했구요. 부모님을 설득해 서울에 있는 대학원으로 진학했어요. 정확히 기억해요. 1995년 12월 16일, 공교롭게도 내 생일날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았어요.서울 생활은 어땠어요? 타지에서 시작한 대학원 생활이 처음엔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외롭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서울의 복잡한 거리가 무서워서 처음엔 밖을 돌아다니지도 못했어요.
서울의 낯선 문화가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환한 아침에도 술이 취한 채로 비틀거리는 사람들, 홍대 거리에 아무렇게나 내뱉어진 토사물들, 그걸 쪼아 먹는 비둘기들… 그런 광경들이 처음엔 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낯설고 무섭긴 했지만 그런 강한 자극들이 점점 나에게 새로운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됐죠. 1996년 그맘때쯤, 홍대에서 스트리트 문화가 막 싹트기 시작해요. 노브레인, 크라잉넛, 델리스파이스 등 홍대 인디 록 밴드들의 공연이 길거리로 나오기시작했죠. PC 통신 ‘블랙스(블랙 뮤직 동호회)’ 활동을 하던 나에게 홍대 길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들이 계속해서 자극을 줬어요. 그렇게 점점 가상의 거리이자 사이버 스트리트인 PC 통신 동호회 활동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내기 시작하게 된 거죠. 동호회 모임이 공연이 되고, 점점 결집력이 생기게 됐어요. 당시 한국에서도 힙합/랩 뮤직 문화가 형성되려 하고 있었고, 듀스나 현진영, 업타운 음악의 영향을 받고 MC가 되려고 하는 어린 친구들도 많아졌어요. 난 그 친구들이 만든 음악들이 참 좋았어요. 대중음악 시장에 최적화 되어있는 대중성 있는 음악이 아닌, 방송에선 접할 수 없는 미국 본토 랩 음악이요. 그땐 미국의 랩 뮤직을 100% 흉내내는 것뿐이었지만, 그게 저한텐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어요.
드디어 마이크를 잡게 됐네요.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1년 동안 받은 많은 문화적 충격들이 내 인생을 통 털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거죠. 그렇게 1997년, 대학원 연구실에서 녹음한 ‘블랙스’ 1집이 MP3 앨범으로 나왔어요. 반응도 좋았고, 공연도 많이 했고, 2집 이야기도 나온 상황이었죠. 그러다 앨범은 틀어지고, 랩 하느라 시험을 하나 놓쳐 대학원 졸업도 한 학기 미뤄졌어요.
대학원까지 갔는데, 갑자기 음악으로 진로를 바꾸기엔 갈등이 심했을 것 같아요. 제때 졸업 못한 게 어쩌면 나에게 좋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요. 1998년에 IMF가 터졌거든요. 모두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취업길이 막혀버린 거죠. 근데 그 상황이 오히려 나에겐 저지를 기회가 됐어요. 사실 그땐 뮤지션이 평생 가져가는 고통이나 음악가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음악이 주는 즐거움만 생각했어요. 지금이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투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당시 ‘한국 힙합의 메카’라고 불렸던 ‘마스터플랜’을 만나고, 1998년 2월에 가리온이 나왔어요.
사회적으로 절망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던 때였는데, 쉽지 않은 결정을 했네요.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뺏겼죠. 나 또한 안정적인 직장 같은 걸로 따지자면 보편적인 희망을 잃은 거죠. 하지만 난 거기서 내 인생에서의 새로운 희망을 찾았어요.
그럼,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나이가…? 그때가 스물일곱, 음악을 하기에 이르진 않은 나이였죠. 주로 어린 친구들이 랩 뮤직을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나만 애들보다 대여섯 살 많았죠. 하지만 나이 많다고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 마음이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음악 안에선 모두 친구라고 생각했고, 우린 모두 평등했어요. 모르는 건 서로 배우려고 했고. 고등학생이었던 주석이랑도 함께 가사 작업하고 음악 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모두가 그때 같은 출발점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한국에서 힙합이라는 장르 자체가 막 시작됐으니까.
# Verse 3. 臥薪嘗膽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나 부담감 같은 건 없었어요? 사람들은 날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로 보지만, 사실 난 지독한 현실주의자에요. 음악을 시작했던 때부터 난 이 생각뿐이었어요. 내가 하는 음악이 내 인생을 망가뜨린다는 걸 부모님께 보여줘선 절대 안 된다는 생각. 음악을 위해 생계를 내팽개치고 라면 먹으면서 음악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요.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놈팡이처럼 놀면서 음악한 적 없어요. 1집 낸 뒤에 회사 프로모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1년 6개월 동안 병원 주차장에서 일을 했는데, 사실 무대 위에서 큰소리치는 MC가 사람들한테 자존심을 낮춰야 하는 일이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돌이켜보면 별의별 일을 다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나한텐 오직 한 가지, 음악을 다시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뮤지션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 음악을 위한 수단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돌아가서 다시 음악 하는 거, 그거 하나였어요. 이미 2집에 대한 구상을 끝낸 상태였고, 향후 5집까지의 그림도 그려놓은 상태였어요. 이미 모든 그림은 다 그려놓았고, 그걸 바탕으로 앨범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현실에 어느 정도 만족하면서 ‘내가 굳이 그 힘든 음악 씬으로 돌아가야 해?’라는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난 맛을 봤거든요. 현실에선 결코 찾을 수 없는,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어떤 과정을 거쳐서든, 전 음악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1집과 2집 사이의 공백기가 너무 길었어요. 부담감은 없었나요? 가리온 2집이 나왔을 때 사람들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충분했어요. 이걸로 우린 끝날 게 아니니까. 2집이 마지막이 아니니까. 주변의 시선과 걱정들을 충분히 밟고 일어설 의지가 있었어요. 나이 환갑이 되어서도 여전히 랩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이유가 있으니까. 가리온은 태생적으로 언더그라운드에요. 대중들의 룰과 틈에 들어가면 그게 기본이 되겠지만, 우린 거기서 멀찌감치 떨어져있죠. 우리가 계속 음악을 해 나아가는 게 중요해요.
그 사이 힙합 씬도 오랜 침체기를 겪었어요. 마스터플랜에서 매주 공연을 하는 게 음악 하는 사람에겐 정말 고마운 일이었어요. 새로운 곡을 음반이 아닌, 무대에서 매주 관객에게 선보인다는 게 우리에겐 마치 수련을 하는 과정 같은 거였거든요.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뮤지션이 직접 만나는 게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전엔 비보이, DJ, 그래피티 등 모든 힙합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던 때였어요. MC들이 공연을 하고 있으면, 비보이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 잼 공연을 펼치기도 했죠. 그냥 그 자체가 힙합이에요. 그걸 유지하고 더 확대시키는 게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마스터플랜이 기획사로 형태가 바뀌면서 영원할 것만 같던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졌어요. 우리도 그냥 어딘가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죠. 힙합 공연을 할 수 있는 라이브 클럽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홍대는 점점 춤추는 분위기로 변했어요. 그러면서 힙합 아티스트들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도 사라지고, 한데 모여 있던 힘들이 분산되기 시작했죠. 사실 씬이 이렇게 바뀐 것에 대해 아쉬움이나 실망감도 크고, 박탈감 같은 것도 있어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해요. 씬은 약해졌지만, 결집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 가리온이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의 역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전까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는데, 이젠 그런 책임감이나 절실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어요. 씬의 한 사람으로서, 씬 자체의 무심함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씬의 1세대로서 뭔가를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작년 발표한 2집 <Garion 2>로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 부문을 포함해 3관왕을 차지했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사실 힙합이라는 장르는 발표한 앨범에 대한 피드백을 볼 수 있는 곳이 상당히 제한적이에요. 힙합플레이야 같은 곳이 전부죠. 너무 극단적인 양쪽은 사실 귀담아 듣지 않는 편인데, 수상 소식을 듣고 그저 돌아왔다는 의미 자체에 큰 무게를 싣고 준 상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엔 나 자체가 가리온이었다면, 이제 가리온은 나와 분리되는 거구나.’ 가리온의 삶이나 앞으로 남겨질 발자국들이 모두 한국 힙합 씬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남길 거라고 생각해요. 가리온은 나 자신에게도 음악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아이돌이 된 거예요.
# Verse 4. Hiphop Will Never Die
지난 9월, 렉스(DJ Wreckx)형과 함께 작업한 <DJ and MC> 앨범을 통해 “이 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고 했잖아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귀로’라는 곡에 모든 게 담겨 있어요. 내 처음으로, 시작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죠. 항상 내가 좋아하고, 그걸 시작했던 이유가 뚜렷한 거라면 그게 맞고 옳은 거잖아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자꾸 옳은 거에서 벗어나려는 시간들을 보낸 것 같아요. 처음부터 좋아했던 그 자체로,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거죠. 음악의 소스나 스타일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태도적인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기본’을 다시 찾자는 거죠. 마스터플랜이 문을 닫고, 우리가 상실감을 느꼈던, 모두를 응집할 수 있는 고리를 잃어버렸던 그 시작의 시기로 돌아가 잃어버린 고리를 다시 찾고 싶은 거예요. 그냥 대놓고 씬에서 형 된 입장에서 일갈을 가했던 거죠. ‘진짜들이 사라져버린 텅 빈 거리’에서요.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난 랩을 하면서도 ‘언더’가 그저 사람들에게 많이 안 알려지고,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 말하는 건지 알았어요. 근데 어느 날 한 형님이 이런 얘길 해주셨어요. “‘언더’는 형용사 같은 거다. 명사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닌 상황이자 태도를 말하는 거다.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즐기고 찾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닌, 실험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그 상태가 그냥 ‘언더’인 거다.” 이게 가장 내 생각과 가까운 답이에요. 난 그렇게 보면 ‘언더’가 맞아요. 난 한국 힙합 MC로서 다른 랩퍼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항상 새로운 걸 추구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의지나 태도가 바로 가리온의 시작이에요. 항상 ‘언더’를 근본으로 하고 있죠.
MC로서 형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에요? 내가 현실주의자가 아닌, 이상주의자로 꿈꿨던 건 오래전부터 오직 하나에요. 수요와 공급이 그 안에서 다 이뤄질 수 있는 ‘우리만의 시장’을 만드는 것. 일본이 그런 분위기거든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클럽에서 공연만 해도 먹고 살아요. 문화적인 수익 구조가 내수로만 충분히 형성될 수 있어요. 뮤지션이 TV에 안 나가고, 스스로 색깔을 바꾸지 않더라도 먹고 살만한 상황이 되길 바래요.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뤄지길 바래요. ‘메타와 렉스’ 앨범을 통해 후배들도 뮤지션으로서 한번쯤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라구요. 지금의 ‘언더’는 낭만이 없어요. MC들이 설 무대가 없으니 홈레코딩으로 인터넷에 음원을 풀고, 그걸 통해 유명해져서 돈을 벌려고만 해요.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호흡하고, 진검승부를 위해 수련하는 과정이 없어요. 음악을 하는 기쁨 자체가 없어요. 이미 아이돌 시장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거든요. 랩하는 친구가 어느 순간 대형기획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보며 꿈을 키우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뭐 하러 힘들게 라이브를 해?’ 하는 거죠.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인 뮤지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능동적으로 씬에 대처하는 뮤지션의 자세가 더 절실해져요. 기존의 시스템에서 성공한 케이스만 안전하게 따라갈 게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해요. 그래야만 원하는 걸 스스로 얻을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뭐에요? 가리온 3집은 내년 여름쯤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물밑작업 중이죠. 음악적인 방향성은 ‘더 깊고, 더 넓게’. 더 진화되고 진보된 색깔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담을 거예요. MC 메타 개인적으론 불혹의 나이인데, 여전히 유혹들은 많아요. 하지만 난 점점 더 단순해지죠. 내가 이십대였을 때 혼자서 사십대를 가늠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아마 난 재즈나 클래식을 듣고 있겠지’ 했었죠. 최근 어느 날 문득 든 생각인데, 지금 난 여전히 힙합을 듣고 있고, 삶의 즐거움을 여기서 찾고 있는 거예요. 개인적인 인생사나 문제들, 복잡한 생각들은 모두 음악으로 흡수돼서 삶이 점점 더 단순해져요. 난 이게 참 좋아요. 앞으로 10년 뒤에도 이런 생각이 지속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내년엔…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결혼도 하면 좋겠어요. 지금 듣고 있어? (웃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꿈꾸는 독자들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구린 건 하지 마세요. 멋있는 것만 하세요. 그러려면 먼저 진짜 멋있는 게 뭔지 알 필요가 있겠죠. 요즘 말로 ‘간지’라고 하죠? 힙합은 멋있어야 하는 게 항상 첫 번째고 기본이에요. 요즘 친구들은 그 멋을 따라하려고만 하지, 자기 스스로 멋을 부리려고 안 해요. 멋없는 거 하지 말고 멋있는 걸 하되, 남이 이미 멋있게 만든 건 하지 말고, 본인이 멋있게 하세요. 그게 시작과 끝이에요. 바로 거기서 에너지가 나와요.
파운드 매거진으로는 두 번째로 MC 메타와 마주한 에디터는 지난 2010년 10월 가리온 인터뷰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앞으로는 씬과 후배들을 챙기고 싶다”던 지난해 인터뷰에서의 다짐에 대한 결과물을 보여준 ‘메타와 렉스’ 앨범을 통해 다시 한 번 ‘MC 메타’라는 이름 자체의 진중함을 확인했다. 오랜 시간 지켜온 소신과 신념은 곧, 존재와 이름 자체만으로 리스펙트의 대상이 된다. 이 간단하고도 변함없는 진실을 우리가 앞으로도 끊임없이 되새길 수 있도록 MC 메타가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에디터에게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