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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힙합과 급진주의 (글 박형주)
    인종주의 2018. 2. 19. 22:24

    출처: http://workers-zine.net




    >2017년 11월 20일


    [워커스 36호] http://workers-zine.net/27796

    폴 로브슨(1898-1976) 

    혁명가였던 예술가


    박형주(역사연구자)


    [필자 주]힙합은 시민권 운동과 블랙 파워 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탄생했다. 이 연재는 미국의 힙합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에서 표현한 정치적 급진주의의 유산을 살펴본다. 


    미국의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2012년 앨범 속지에는 이례적으로 ‘영감’ 제공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해리 벨라폰테와 폴 로브슨이 그 주인공들이다. 벨라폰테는 ‘칼립소의 제왕’으로 불리는 가수이자 배우이며, 시민권 운동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는 활동가로 유명하다. 로브슨은 조금 더 옛 인물이다. 1976년 사망한 미국의 흑인 가수이자 배우인 로브슨이 힙합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그룹에 어떻게 영감을 준 것일까?


    퍼블릭 에너미의 리더 척 디는 한 인터뷰에서 로브슨과 자신들의 연결고리를 설명했다. “폴 로브슨이 벨라폰테에게, 벨라폰테가 밥 딜런과 커티스 메이필드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지.” 퍼블릭 에너미는 1989년 이미 자신들의 대표곡인 ‘파이트 더 파워’의 뮤직비디오에서 로브슨의 사진을 든 시민들이 행진하는 장면을 여러 곳에 삽입한 바 있다. 2013년 척 디는 공동체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학자와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폴 로브슨 상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은 지금, ‘검은 스탈린’으로 미국에서 비난받으면서도 웨일즈 광산 노동자들과 남아프리카 민중에게 사랑받은 한 국제주의자의 삶을 떠올려 본다.


    폴 로브슨은 마틴 루터 킹과 맬컴 엑스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8년생인 그는 전미 대학 미식축구 올스타 팀에 2회 선정된 촉망받는 체육인이었고, NFL에서 15경기를 출장하면서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흑인 변호사를 꺼리는 분위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또다른 재능인 노래와 연기로 진로를 바꾸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흑인 영가를 탁월하게 소화하는 저음의 콘서트 가수이자 영화와 연극, 뮤지컬 분야에서 ‘쇼보트’와 ‘오셀로’ 등의 작품을 성공시킨 배우로 미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구가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거리낌 없는 정치적 활동이 로브슨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급변하는 유럽의 정치상황을 몸소 겪으며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자로 거듭났다. 흑인 예술가로서 나치 독일에서는 냉대를 겪은 반면, 소련에서는 열렬히 환영받은 경험이 그의 정치적 각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에서 그는 “여기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흑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느끼며 걷고 있습니다”라는 느낌을 표현했다. 이후 그는 스페인 내전 현장에서 공화파를 위해 투쟁의 노래를 불렀고, 훗날 중국 국가가 되는 ‘의용군행진곡’을 중국어로 부르며 중국의 항일 전쟁을 지원했다. 2차 대전 시기 그는 미국에서 반파시즘 전쟁을 지원하는 곡들을 발표하는 한편, 인종 분리 객석에서 공연하지 않는 원칙을 고집하면서도 공연을 성공시키며 절정의 인기와 존경을 누렸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시에 문제되지 않았던 친소련 입장은 이제 FBI의 사찰 근거가 되었다. 대통령 트루먼은 자신의 면전에서 린치 금지 입법을 요구하는 로브슨에게 분노를 표출했으며, 대규모 군중이 그를 살해하기 위해 공연장을 습격했다. 미국 정부는 세계적인 유명인사인 로브슨이 유럽에서 통렬하게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미국 정부는 미국의 전쟁 개입을 비판하는 로브슨의 여권을 말소했고, 대학 시절의 미식축구 기록마저 삭제되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주된 공격 대상이 된 와중에도 로브슨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출국이 금지된 상황에서 그의 노래는 전화선을 타고 유럽의 공연장을 채운 청중들에게 전달됐고, 캐나다 관객들이 들을 수 있도록 미국 국경에서 공연이 열렸다. 칠레의 네루다와 인도의 네루가 그를 지지했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만델라를 포함한 대중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1958년 여권이 재발급되고 그는 국내외에서 다시 지지와 존경을 회복했지만,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직업과 재산, 건강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결과 시민권 운동이 본격화된 1960년대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었고, 해리 벨라폰테와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가 로브슨의 역할을 대신했다.


    로브슨의 유산이 힙합계에서 가장 지적이고 의식있는 뮤지션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카고 출신의 랩스타들인 커먼과 루페 피아스코가 대표적이다. 커먼은 척 디에 앞서 힙합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브슨 상을 수상했다. 커먼이 존경받는 작가이자 시민권 운동의 투사였던 마야 앤절루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주제도 로브슨이었다. 루페 피아스코는 2012년 힙합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비치’단어의 사용 자제를 촉구하는 곡인 ‘비치 배드’를 발표해 많은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미국에서 굴욕적인 시대를 견뎌 온 흑인 배우들을 대표해 로브슨에게 헌정되었다. 스포큰워드 아티스트이자 랩퍼로 영화 ‘슬램’의 주인공이기도 한 사울 윌리엄스 역시 로브슨의 이름을 딴 곡을 발표하거나 가사에서 로브슨을 인용하면서 존경심을 나타냈다.


    정부가 정보기관을 동원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를 사찰하고 방해 공작을 펼친 시대에 로브슨은 자신이 누려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결함을 지켰다. 또다른 블랙리스트의 시대를 겪은 지금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은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예술가는 자유냐 노예냐를 다투는 싸움에서 편을 정해야만 한다. 나는 선택했고, 다른 길은 없었다.”



    > 2017년 12월 20일


    [워커스 37호] http://workers-zine.net/27965

    W.E.B. 두보이스 — 흑인의 영혼



    힙합 역사상 최고의 작사가 중 한 명인 나스는 2015년 래퍼로서는 처음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W.E.B. 두보이스 메달’을 받았다. 이 메달은 하버드 대학에서 흑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윌리엄 두보이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문화, 인권, 아프리카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에 대한 예술적 기여’를 근거로 복서 무하마드 알리 등과 더불어 나스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힙합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앨범인 ‘일매틱’으로 데뷔한 뒤 2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해 온 나스는 힙합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메달을 처음으로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랩 스타와 미국 최고의 지성 사이에는 좀 더 깊은 관계가 있었다. 나스는 이미 오래 전 자신의 곡에서 영양가 없는 ‘지방 낀 랩’을 듣지 말고 두보이스와 제임스 볼드윈 같은 흑인 저자들의 책을 읽으라고 권한 바 있었다. 나아가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 흑인 지도자 부커 워싱턴과 두보이스처럼 오늘날에는 자신이 흑인을 대표해 정치인들에게 소리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항상 교육의 중요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나스는 분명 두보이스를 닮았다. 2013년 그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두보이스 연구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제도를 개설하고 감격한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1868년 태어난 두보이스는 당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는 피스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했고, 오랫동안 아틀란타 대학 교수로 역사학과 사회학, 경제학을 가르치면서 미국의 인종 문제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를 여럿 남겼다. 또한 유럽을 넘나들며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깊이 관여했고, 오늘날까지 미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 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설립했다. 차별적 현실을 당분간 인정하고 실용적 기술 교육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20세기 초 흑인 운동의 주도적인 관념과 달리 두보이스는 완전한 시민권과 더 많은 기회를 요구해야 하며 인문학과 고등교육을 통해 흑인 사회를 이끌 ‘재능있는 10퍼센트’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다수의 흑인 인구가 차별과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남부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아가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나간 주장이었다. 


    동시대의 많은 흑인 엘리트들이 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인으로 길들여진 반면 두보이스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더욱 날카로워졌다. 1차 세계대전 때 그는 식민주의의 종식과 권리 증진을 위해 흑인이 백인과 ‘좁은 대열’로 서서 미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흑인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는 크게 좌절했고, 이후 미국의 한반도 개입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 활동가로 거듭났다. 사회당원이면서도 민주당의 윌슨을 지지하던 온건한 입장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일찍부터 일본을 비서구 국가의 모범적 발전 사례로 주목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성을 확인하고는 기대를 접었고, 대신 새롭게 태어난 중화인민공화국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희망을 걸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피부색이나 아프리카라는 땅이 아니라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모욕’에서 태어나 ‘황인종 아시아와 남태평양 사람들까지 하나로 묶어주는’ 유대감이었다.


    시대를 풍미한 흑인 지도자


    매카시즘의 열풍 속에서 두보이스는 소련 스파이로 지목돼 기소되었고, 흑인 지식인들과 자신이 관여한 단체들마저 그를 외면했다. 아인슈타인 등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기소가 취하되었으나 그와 함께 고군분투하던 폴 로브슨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여권 발급을 받지 못했다. 1961년 그는 매카시즘의 상징이었던 공산주의자 등록 제도를 합헌 으로 판결한 대법원에 항의해 미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얼마 후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아프리카 대백과 편찬을 맡아 달라는 은크루마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신생 공화국 가나로 이주했다. 미국 정부는 여권을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았고, 그는 가나 국적을 취득했다. 힙합계에서 두보이스는 시대를 풍미한 흑인 지도자로 자주 언급된다. 대표적으로 늘 깨어있는 래퍼인 루페 피아스코는 차별과 억압이 없는 미국의 역사를 상상한 ‘올 블랙 에브리씽’에서 헌법 작성자로 두보이스를 꼽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그를 추앙했다. 크리스천 힙합 뮤지션인 쇼 버라카는 두보이스의 영향력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재능있는 10퍼센트’라는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많은 래퍼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두보이스의 유산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소울’이나 ‘컬러 라인’처럼 그가 의미를 입힌 단어들은 힙합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그가 평생 헌신한 범아프리카주의의 가치는 줄루 네이션과 네이티브 텅스처럼 힙합계에서 가장 재능있는 음악인들의 긍정적인 가사로 표현되었다.


    두보이스는 1963년 95세의 나이로 가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다음날 일자리와 자유를 요구하며 미국 워싱턴에 모인 2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그를 위해 묵념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통합과 평등을 외쳤다. 두보이스가 못다 한 아프리카 대백과 사업은 1999년에야 완성되었다. 대백과의 책임 편집자인 하버드 대학 두보이스 연구소의 교수 헨리 게이츠는 2009년 자신의 집 현관에서 고장난 문을 열다 체포되어 전국적인 논란을 일으켰는데, 체포 당시 그는 백인 경관에게 “왜, 내가 미국에 사는 흑인 남자라서?”라고 쏘아붙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항상 미국인이자 흑인이라는 ‘이중 의식’을 느낀다는 한 세기 전 두보이스의 통찰이 여전히 유효한 순간이다.





    > 2018년 1월 17일


    [워커스 38호] http://workers-zine.net/28083


    마커스 가비(1887-1940) – 흑인 모세


    “래퍼가 되고 싶으면 맬컴, 가비, 휴이를 공부해.” 미국 힙합계에서 가장 좌파적인 듀오인 데드 프레즈의 가사다. 언급된 이름들은 각각 이슬람민족(NOI) 출신 설교자 맬컴 엑스, 세계흑인지위향상협회(UNIA)의 설립자 마커스 가비, 흑표범당(BPP)의 공동 설립자 휴이 뉴턴을 가리킨다. 데드 프레즈의 조언은 인종과 정치성향에 관계없이 래퍼라면 누구나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 흑인 지도자들은 랩 가사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난 휴이와 맬컴이 절반씩, 킹 목사를 조금 더해 가비와 섞은 사람이지.” 최근 도끼 등 한국 래퍼들과 함께 곡을 발표한 인스펙타 덱의 예전 가사다. 그는 힙합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그룹인 우탱클랜의 멤버로 그룹 최고의 명곡들을 빛낸 전설적인 래퍼다. 세 사람의 삶과 사상을 몰라도 힙합 음악을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래퍼가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는 가사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가 뱉은 다른 가사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커스 가비는 저 셋 중 가장 옛사람이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쇄공으로 일했고, 중남미 국가들과 영국을 둘러보며 억압받는 흑인들의 모습을 관찰한 후 자메이카로 돌아와 UNIA를 결성했다. 1916년 뉴욕으로 건너온 그는 강의를 열고 할렘에 UNIA 지부를 출범시키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제복을 입고 군대처럼 행진 하는 가비와 UNIA 회원들의 당당한 모습은 북미와 카리브해 연안의 흑인들을 매료시켰고, 가비 자신이 평생 밟지 못한 아프리카에서도 지지자들이 생겨났다. 특히 1919년 출범한 해운회사인 블랙 스타 라인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가비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흑인을 이끄는 모세였고, 훗날에는 세례자 요한 같은 선지자로 추앙됐다.


    가비의 주장은 명쾌하고 원대했다. 백인 에게 평등을 구걸하지 말고 흑인 스스로 힘을 길러 백인에 맞서자는 것이었다. 멸시받는 소수임에도 부를 축적해 금융의 힘으로 전쟁을 좌우하며 옛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을 꿈꾸던 유대인이 흑인의 본보기였다. 세계 각지의 흑인들도 경제적 힘을 기른 후 아프리카로 돌아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강력한 흑인 정부와 군대를 건설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동시대의 흑인 급진주의자들을 끌어들인 공산주의에도 끌리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가장 무식하고 편견에 가득 찬 백인 계급에게 정부를 맡기자는 위험한 이론이며 백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일 뿐 흑인에게는 해롭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가비의 노선이 항상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시민권 운동을 이끌던 또 다른 범아프리카주의 사상가 두보이스가 통합 대신 분리를 내세우는 가비를 ‘미치광이거나 배신자’라고 혹평하자, 가비는 두보이스가 ‘백인 소유의 검둥이’이자 백인 피가 섞인 ‘흑인 잡종’이라고 응수했다. 1922년 가비는 인종적 순수성 보존과 흑백 분리라는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는 KKK와 협상을 시도했다.


    KKK 지도부는 가비가 현명하고 책임감이 있다고 칭찬했지만 다른 흑인 지도자들은 경악했다. 이외에도 논란은 넘쳐났다. 무능하거나 부패한 사람들이 가비의 사업에 엮여 있었고, 에드가 후버가 이끄는 수사국은 호시 탐탐 그의 약점을 노렸다. 결국 그는 보유하지 않은 배를 선전해 돈을 모금한 혐의로 기소돼 5년형을 선고받았고, 블랙 스타 라인은 막대한 손실을 떠안고 폐업했다. 그는 2년 동안 복역한 후 사면 받았으나 자메이카로 추방됐고, 이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1940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우리를 일깨우려 해서 추방되었지”


    가비와 마찬가지로 자메이카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디제이 쿨허크가 창조한 힙합에서는 늘 가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탱클랜의 리더 르자가 “가비는 우리 자신과 조상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를 일깨우려 해서 추방되었지”라는 가사를 썼을 때 그는 자신도 가비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티의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나 노예 반란 지도자 냇 터너도 종종 언급되지만, 가비야말로 흑인을 일깨우고 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은 최초의 지도자로 많은 랩 가사에 등장한다.


    존경받는 힙합 듀오 블랙 스타는 그 중에 서도 조금 더 특별하다. 가비의 해운회사에서 팀명을 따온 이들의 유일한 앨범에는 가비의 사진과 가비의 증손녀가 전하는 추천사가 실려 있고, 피부색에 대한 긍정적 해석, 흑인 사회와 힙합계에 만연한 폭력성에 대한 성찰, 개인의 자각과 흑인의 자결권처럼 가비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가사들이 가득하다. 이들이 2000년 경찰에 의한 흑인의 총격 사망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수십 명의 래퍼들을 규합하면서 ‘하나의 신, 하나의 목적, 하나의 운명’이라는 가비의 구호를 인용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배우로도 알려진 멤버 야신 베이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 침해를 알리기 위해 고통스런 강제급식을 직접 체험했고, 다른 멤버인 탈립 콸리는 월가 점령 시위와 퍼거슨 시의 흑인 시위에 앞장서 참여했다. 여성혐오적 가사를 쓰지 않는 극소수의 래퍼에 속하는 콸리는 트위터를 통해 매일같이 인종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할렘의 가비 강의 수강생 중에는 그곳에서 한국인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던 베트남 출신의 노동자 호치민도 있었다. 자칭 ‘아프리카 임시 대통령’ 가비가 흑인도 아시아의 일본인들처럼 힘을 기르자고 주장하던 때 상하이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인 2017년 대통령이 탄핵된 다음 날 광화문에서는 일본인 프로듀서가 만든 야신 베이의 곡이 한국 힙합 그룹 가리온의 랩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축가로 울려 퍼졌다. 꼭 래퍼가 되려는 게 아니더라도 가비를 공부해 보는 게 어떨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형주 parkhyungjoo@work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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