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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랩퍼도 생태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글/기고문 2010. 10. 25. 04:44

    월간 '함께사는길' 2006년 8월호



    나는 거리의 랩퍼가 되기로 결심했을 즈음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단백질 신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자본의 톱니바퀴로 가동되는 공장식 축산의 현실, 그 감춰진 고통을 암울한 비트 위에 분노로 터뜨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나의 랩에는 서서히 환경운동의 냄새가 배어갔다. 어렵사리 비폭력 저항의 랩그룹을 결성해 서울 한복판에서 새만금 방조제 앞까지 숱한 공연을 다니는 동안, 내 가슴 속에는 숨겨진 돌뿌리 같은 고민이 무디게 돋아나고 있었다. 그 돌뿌리는 내게 물었다. ‘랩퍼도 생태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알다시피 힙합은 미국의 할렘가에서 태어난 문화다. 도시의 구석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분노와 열망이 그 중심에 박혀 있는 힙합은, 역시 도시에서 태어나 이산화탄소를 마구 뿜어내고 있는 나의 감수성과 닮아 있었다. 마이크로폰과 전기앰프, 턴테이블, 코 끝을 찌르는 화학 스프레이의 독한 입자는 회색빛 도시에 너무나 어울리는 빛깔을 빚어낸다. 전기시설과 도시적인 배경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음악이 또한 힙합인 것이다. 더욱이 소비사회의 주류가 되어버린 힙합이 이젠 저항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점, 힙합계 내부의 폭력적 갈등 또한 환경과 랩음악의 궁합 자체를 의심스럽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I said one two three.
    나는 말했어. 하나 둘 셋
    It’s kind of dangerous to be a emcee.
    MC(랩퍼)가 된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They shot tupac and biggie.
    그들은 *투팍과 비기를 총으로 쏘았지
    Too much violence in hip-hop, wyahhhh
    힙합에는 너무 많은 폭력들이 있어
    -<블랙 스타>(Black star)의 「Definition」중에서

    * tupac and biggie: 서부힙합과 동부힙합을 대표하는 두 랩퍼. 힙합계 갈등으로 괴한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힙합의 매력
    그러나 다행히도 랩이라는 표현 수단은 힙합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서서 다양한 사상과 퍼포먼스를 펼쳐낼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랩의 근간은 아프리카의 토속음악으로 회귀한다. 1992년 첫 정규앨범을 발표한 미국 힙합그룹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Arrested Development)는 아프리카의 뿌리로 돌아가자는 사상을 내걸고 폭력적이거나 직설적인 가사보다는 은유적이고 시적인 가사를 내세웠다. 갱스터 랩퍼들이 흑인 빈민들의 삶을 폭력적 분노를 담아 부르짖을 때, 이들은 흑인들의 우애와 사회적 평등의 메시지를 음악에 담아냈다.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 외에도 <드 라 소울>(De La Soul),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등 뉴욕 컬리지 힙합으로 분류되는 랩퍼들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히피들의 고전적 가치로 힙합 씬의 대안적인 영역을 개척하면서도 대중적인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Everyday could be our last.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마지막일 수도 있어
    Baby I don’t want to move too fast.
    난 너무 빨리 움직이고 싶지 않아
    Let’s make every single thing we feel filled with joy and filled with real.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들을 기쁨과 진짜로 채워나가자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 랩퍼 Speech의 「Filled with Real」중에서


    음유시와 흑인음악
    또한 랩은 음유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두운과 각운, 문장의 운율을 맞추어 가사를 쓰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시와 유사하고, 직설적이고 즉흥적인 순간의 랩핑(rapping)은 창의적인 시어로 발휘되어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영국의 시인 벤자민 제퍼니아는 원고 없이 시를 쓰고 온몸에 배어 있는 리듬으로 시를 낭송하는 랩퍼 시인이다. 그는 영국의 포클랜드 침공과 대처리즘에 대해 조롱하며 라디오에 출연해 즉흥시로 정치적 공격을 감행했다. ‘저런 것이 어떻게 시인가?’라고 묻는 이에게 벤자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란 본래 저런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시는 노래의 형식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형태이며 출판물의 전통은 불과 수백 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랩은 현대적으로 부활한 음유시인의 예술로서 자리잡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현대적 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음악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흑인음악의 의미를 곱씹어야 할 것이다. 음악평론가 강헌 씨는 얘기한다.

    “가장 억압받았던 밑바닥 흑인들의 음악이 전 세계 음악─힙합, 로큰롤, 디스코, R&B, 블루스, 재즈, 팝(발라드) 등─에 가장 풍부한 자양분을 공급했다는 사실인데, 이들의 음악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인류 공통의 문화가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그들이 꿈꾸었던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죽지 않고는 질곡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들의 절박함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새로운 음악적 대안으로 제출된 것입니다.”

    태초에 순수한 평화의 상태를 지향하고자 했으나 19세기 후반 이후 급격히 평화의지를 상실하고 교양의 장식물로 전락해버린 음악이 목화밭 흑인노예들의 발성을 통해 다시금 저항과 평화의지의 대중음악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대중의 머릿속에 랩퍼의 모습이 어떻게 남아 있던 간에 그래도 랩은 고뇌하고 흔들리는 지껄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분쟁의 땅 팔레스타인에도 이라는 3인조 랩그룹이 「누가 테러리스트인가?」라는 랩핑을 쏟아낼 줄 누가 감히 상상했겠는가. 저항자로 낙인찍혀야 할 락커들도 한국에서는 월드컵 애국자일 뿐이지만, 이스라엘 무장경찰에 쫓기며 분리장벽 앞에서 비트를 타는 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자면 사랑과 평화의 기치를 내건 60년대의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 사랑과 평화를 의미하는 꽃을 머리에 꽂고, 꽃무늬가 수놓아진 옷을 입고 다니며, 급진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사고를 담은 가사와 환각적인 공연을 추구했던 히피들의 평화운동)가 21세기에는 랩으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지 않을지 섣부른 기대를 품게 된다.

    자연을 닮아가는 랩
    다시 나에게 돋아난 돌뿌리의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랩퍼도 생태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가능성을 열어둔 미지수다. 랩의 내용뿐만 아니라 전기에 의존하지 않는 공연형식과 도시의 시스템을 벗어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도시의 랩퍼’로서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랩이란 일반적인 생각 이상으로 사상과 형식 면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랩 퍼포먼스 형식에서도 자연을 닮아가려는 시도를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계 어딘가에는 이미 생태주의 랩퍼가 멋진 라임(rhyme)을 펼쳐내며 유기농 텃밭을 일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펑퍼짐한 힙합바지가 무대 위에서 뿐만 아니라 농사일에도 꽤나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세계화 제로섬 게임 난민들은 위험해
    농토를 빼앗겨 버린 농민 할인점은 No Mean 해
    둥지가 뜯겨나간 동물들이 너무 애민해
    너의 생각 이상으로 지구별은 예민해
    우주에서 갈 곳 없는 홈리스가 되려 해
    포크레인 폭약이 망쳐놓은 우리집을 봐
    그 안에서 썩어가는 양심들의 합창들
    집 없는 이들의 새벽이 되려면 몸을 낮춰야만 해
    -<더 실버라이닝>의 「homeless」중에서



    글 박하재홍 buzzhong@naver.com

    ‘core, 웅술, buzz’ 세 멤버로 구성된 비폭력주의 랩그룹 <더 실버라이닝>(the SILVER LINING)의 랩퍼.

    〈더 실버라이닝〉은 랩음악을 통해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모든 폭력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며, 동시에 비폭력 직접행동을 추구한다는 기치를 걸고 2003년 11월에 결성되어 지금까지 약 120여 회의 공연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고래보호 캠페인 시기에 맞춰 고래의 목소리를 샘플링한 「고래의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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