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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따뚜이, 혐오와 연민 사이
    글/기고문 2010. 10. 25. 04:52


     라따뚜이, 혐오와 연민 사이

      이 영화를 보기 며칠 전 이었다. 밤 9시, 어둑한 홍대 놀이터 작은 나무 사이로 뛰노는 쥐들과 마주친 것이. 열 마리쯤이었을까. 혹시나 사람에게 들킬까봐 조바심내는 쥐들의 움직임, 그 고단함, 삶의 무게. 필시 무리지어 사는 동물들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고 갈등과 화해, 우정과 싸움이 있겠지... 쥐들의 사회가 궁금해진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라따뚜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을 때, 스크린을 통해 펼쳐진 쥐들의 무리 속에서, 관객들의 혐오감 섞인 탄성 속에서 나는 홍대 놀이터의 그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라따뚜이의 쥐들 또한 영화 속 캐릭터로서 허구적으로 의인화 되었지만, 쥐를 팬시적으로 그려낸 다른 영화나 만화의 주인공들과는 180도 다르다. 쭈뼛쭈뼛한 털하나에서 미끄러지듯 재빠른 동작, 그리고 도시에 버려진 음식들을 찾아 헤메는 그들의 비장함은 진짜와 꼭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쥐 한 마리를 잡기위해 총기 난사를 서슴치 않는 여린 체구의 할머니 심정을 십분이해한다. 쥐박멸 쇼윈도에 진열되어 잔혹함을 뿜어내는 쥐의 주검들을 바라보는 감정의 혼란은 어떤가. 라따뚜이는 시종일관 쥐에 대한 혐오와 연민 사이에서 관객들을 갈등하게 만들고, 마침내 식당과 쥐의 공생으로 이어지는 결말에서 아리송한 만족과 안도를 선사한다. 실제적인 쥐 캐릭터 덕분에 라따뚜이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쥐라는 동물을 ‘인간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

     

      일상적인 대화에서야 쥐라는 표현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 쥐새끼 같은 놈, 쥐꼬리만한 월급, 쥐뿔도 없는 놈, 심지어 도둑을 인쥐라고 까지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신화나 전설, 민담에서는 쥐가 사람에게 은혜를 갚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물과 불의 원리를 알려주는 창세신화의 영웅으로까지 등장한다. 쥐들을 내쫓지 않고 부뚜막의 밥이나 곡식을 나누어준 이들이 쥐들의 인도로 산사태나 화재, 붕괴 등의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하다. 물론, 지진 산사태 등의 지각변동을 미리 알아차리는 쥐의 민감한 예지력과 행동을 빗댄 허구에 불과하다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무작정 박멸, 퇴치의 딱지를 붙여놓기 좋아하는 ‘세스코’ 인간의 독성을 생각하자면 살생에 조심스러웠던 옛사람들의 인정이 그리워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세상에 나쁜 생명붙이는 없다. 당장의 이용가치로만 좋고 나쁨을 가르는 인간의 욕심으로 일구어 놓은 환경들이 때때로 괴물같은 현상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 괴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도시에 숨어사는 쥐떼들인가 아니면, 그들의 종자로 매년 수 십억 마리의 실험용 쥐를 ‘생산’해 끔찍한 생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는 우리들인가. 라따뚜이는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의 혐오감 리스트에 꼽혀있는 생물들과 화해할 수 있는 '진심 한 접시'를. 

    글 박하재홍 (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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