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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뿔이 자라난 어른'
    글/기고문 2020. 9. 30. 23:10

    대정골아동센터 소식지 (2018년 신년호)

     

     

     

    '뿔이 자라난 어른'

     

     

     

    글 박하재홍

     

     성탄절을 알리는 가장 유명한 팝송, 머라이어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카페를 가득 채우자 같이 얘기를 나누던 중학생 한 명이 갑자기 투덜거린다. “저 이 노래 싫어요. 작년 영어시간에 이 노래 못 외워서 벌 받았어요.” 5년 전, 어느 중년 남성은 내 앞에서 무심코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미술전시 같은 건 보기가 힘들어. 학창시절에 미술 시간이 싫었거든.” 문화예술교육이 중요하다며 도처에서 호들갑을 떨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소위 문화예술교육자로 분류되는 내 자신에게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나는 대정골 센터 학생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영감을 얻은 적이 있다. 2013년 8월이었다. 나는 센터에 모여 있는 4명의 학생들에게 가사를 써보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학생들은 난감해했지만, 평소 느끼는 불만을 쓰면 된다는 나의 설명에 반짝이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리고,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가사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못 한다고 차별하지 말아요. 

    미술 음악 체육까지도. 

    누가 누가 잘 하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해요. 

    나는 나를 좋아하는데."

     

     

     다른 과목은 몰라도, 미술·음악·체육까지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끊임없이 비교 당하다니! 너무하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체육 활동이 끔직했다. 그 시작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만 빼고 모두가 하얀 띠에서 노란 띠로 승급을 했다. 태권도복을 입은 채 너덜너덜해진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아홉 살의 모습은 지금도 어제처럼 선명하다. 태권도를 나름 재밌게 여기고 열심히 즐겼던 터라 충격이 컸다. 덕분에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꼴 보기 싫어졌고, 야구나 축구는 물론 스포츠세계에도 별 흥미가 없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음악시간이 싫었다. 음정을 맞출 줄 몰라서 가창시험마다 항상 최악의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서태지와 아이들’과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만났으니까! 그 둘은 ‘나쁜 경험의 감옥’ 속에 갇혀 사는 내 의식을 자유롭게 탈출시켜 주었다.

     

     최선을 다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거의 매일 같이 농구연습을 했다. 교실의 음악시간과 체육시간은 여전히 싫었지만, 나는 음악적으로 육체적으로 스스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이 대정골 센터 학생들의 가사와 만났을 때 확신이 생겼다. 문화예술교육이란 체험하는 실습보다 ‘감상하는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는 걸. 2013년에 감 잡은 나는 본격적으로 10대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대중음악 감상수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성과로 문화예술교육서 《10대처럼 들어라》를 2016년에 완성할 수 있었다.

     

     책은 완성했지만 매일같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변화가 빠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올해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은 세계스타로 등극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초등학교 6학년 아래로 인기가 한 풀 꺾인 상태다. 다행히 감상수업의 중요한 원칙만큼은 변함없다. 학생들 각자가 호감을 느끼는 콘텐츠에서 ‘예술’과 ‘지성’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워너원이 잘 생겨서 좋아요.”라고 말할 때보다 “워너원은 음악이 훌륭하고, 열정적인 모습이 매력적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심 뿌듯하다는 걸 자주 경험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깊이 이해하는 능력은 내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이면서, 동시에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모든 창작물에는 나와는 조금 다른 누군가의 사고방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뇌 과학자가 말하길 우리 중에 똑같은 뇌를 가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골치가 아프다. 개미처럼 산다면 그럴 일이 없을 텐데! 개미가 되고 싶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고민해야 한다. “나의 두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이 질문은 학교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성공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성장하는 삶을 위한 질문일 뿐이다. 싱어송라이터 ‘문문’의 가사처럼 어린 모두는 결국 ‘뿔이 자라난 어른’이 될 것이다.그 뿔이 무한경쟁의 도구로만 쓰이지 말고 때로는 악기가 되고 서로의 영감을 교신하는 유연한 안테나로 자라나길,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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