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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글/기고문 2020. 9. 30. 23:08

    <동화읽는어른> 2018년 1·2월호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글. 박하재홍

     

     “이 노래 꼭 들어보세요. 정말 좋아요.” 수업 마감 종이 울리고 서둘러 교실을 벗어나려는데 6학년 남학생 1명이 내 코앞에 나타나 말을 건넨다. 노래 제목은 록밴드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다. 버즈의 ‘가시’나 ‘겁쟁이’는 10대들에게 종종 추천을 받았지만 이 노래는 또 처음이다. “물론이지, 꼭 들어볼게요.” 진지한 소년의 표정에 압도되어 살짝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갑작스런 부탁으로 우선 1시간만 특강을 한 것이라 이 학생과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노래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 소금 같은 별이 떠있고 사막엔 낙타만이 가는 길 무수한 사랑 길이 되어 열어 줄 거야.” (버즈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中)

     

     자정이 다 되어 뻐근해진 손목을 꺾어 흔들며 인터넷 창에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검색했다. 버즈의 2005년도 발표 곡이었다. 지금의 6학년에게는 까마득한 옛날 음악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 학생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한 물간 음악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동에 전율을 느꼈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6학년 때 제일 좋아한 음악은 뭐였더라? 아, <이승철 Part.2> 카세트테이프! 먼지 쌓인 기억을 끄집어내 툭툭 털어본다.‘마지막 콘서트’가 대표 노래였는데 그 안에 있는 곡들은 죄다 인상적이었지. 특히 ‘소녀시대’의 펑키한 사운드는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어느 날, 교실 앞에서 홀로 ‘소녀시대’를 열창했을 때 반 아이들 60명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구겨 넣느라 킥킥거렸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혁신적인 이 노래를 내 능력으로 구현할 수 없다는 게 좀 서글펐을 뿐. 노래 듣는 걸 누구보다 좋아했지만 나는 그냥 구제불능 음치였다.

     

     다행히 수업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지난 시간에 손바닥 크기의 포스트잇을 한 장씩 나눠 주었고, 반 학생들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 줄 음악을 고심해서 적어 주었다. 이걸 다 같이 못 봤더니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포스트잇 4장을 한 묶음으로 사진을 찍어 화면가득 크기로 띄어놓으면 서로의 추천음악을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다. 같은 나이, 같은 지역, 같은 교실의 우리들이건만 각자의 음악 취향은 놀랍게도 장르와 국적과 시대를 초월한다. 10여 년 동안 각기 다른 사연을 가슴 속에 켜켜이 쌓아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점이 있다. 평균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조금 유별난 곡들은 빈정거리는 반응이 튀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취향에 가타부타 잔소리하지 말고 호의적으로 존중하자는 당부를 정확히 전달한 다음 교실 화면에 사진을 띄운다.

     

     

    (사진: 백록초등학교 6학년 7반 학생들의 추천음악)

     

     내가 잘하는 건 적혀있는 모든 음악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음악의 예술적 또는 인문적 장점을 설명해주는 일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자신의 예술적 욕구와 지성적 능력을 자각하게 된다. 나는 그들의 내면을 인정하고 선택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준다. 항상 기대치만큼 호응이 좋은 건 아니지만 성공확률은 꽤 높은 편이다. 이제는 추천음악 목록만 쭉 읽어봐도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 색깔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대개 중2 무렵부터 슬픈 노래에 급속도로 민감해진다는 사실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중1 때는 만화영화 ‘드래곤볼’의 발랄하고 경쾌한 음악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중2 때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 밤이 깊어가지만’을 들으며 까만 밤 아주 까만 밤,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는 심리학자에게 물어봐야겠지만, 확실한 건 슬픔은 예술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슬픔이 많아지는 10대 시절에 ‘예술적 인간’이 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걸 제대로 찾지 못하면 슬픔은 그냥 스트레스가 되고 폭력성이 될 위험이 있다. 남자 중학교의 거친 욕쟁이들만 모아놓은 상담교실을 방문하면 선생님은 이 친구들이 랩을 좋아할 것 같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의외로 랩 보다 슬픈 노래에 푹 빠져 있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얘기 좀 나눠보면 눈에 선하다. 수시로 어두컴컴한 노래방 소파에 파묻혀 슬픔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노래하는 서글픈 모습이.

     

     슬픔을 증폭시키기 위해 슬픈 노래가 있는 게 아니다. 슬픔 자체는 그냥 스트레스다. 고여 있는 슬픔에 리듬과 멜로디라는 날개를 달아주면 자유롭게 날려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슬픈 노래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어떤 음악을 듣느냐’ 보다 ‘같은 음악이라도 어떻게 듣느냐’이다. 나는 바란다. 어른들이 10대들이 즐겨듣는 대중음악에 귀 기울이고 예술적 대화를 나누기를. 10대에게 밝은 메시지를 강요하기보다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하기를. 

     

     졸업을 앞둔 6학년 교실은 중학교 교실에 비해 마치 유토피아처럼 보였다. 어쩌면 순수하게 행복한 때는 다 지나버렸을지 모르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인생이라는 여행에 꼭 필요한 음악들을 본격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니까.총상을 입고 귀순한 북한병사의 목숨을 살린 외상전문의 이국종 씨는 말한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건 록(Rock) 음악이라고. 두려운 수술을 할 때 음악을 듣는다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든, 10대 시절에 발견한 좋은 음악들은 각자의 삶에 도움이 되고 때로는 서로를 연결시켜 줄 것이다. 더 좋은 음악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불어날수록 동네 밤거리에는 ‘술 마시는 노래방’ 대신 소금 같은 별처럼 반짝이는 장소가 하나 둘 늘어나지 않을까? 나는 그 과정을 ‘문화’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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