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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연 무엇이 '백인'인가...인종은 사회적으로 구성됐다
    인종주의 2021. 7. 16. 01:32

    원문: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1423014971135#0DKU

     

    과연 무엇이 '백인'인가...인종은 사회적으로 구성됐다

    요즘 북미와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서의 자행되는 반(反)-아시안 폭력과 인종차별이 한국 사회와 교포 사회에 혼란과 충격이나 당혹감을 불러오고 있다면 그건 상당 부분에 있어 인종과...

    www.pressian.com

    [기고] 인종주의 체제에서 아시안의 위치와 선택

    박성춘 사회학 박사  |  기사입력 2021.05.15

    요즘 북미와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서의 자행되는 반()-아시안 폭력과 인종차별이 한국 사회와 교포 사회에 혼란과 충격이나 당혹감을 불러오고 있다면 그건 상당 부분에 있어 인종과 인종주의에 대해 그간 올바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반-아시안 폭력이 명백히 드러내듯 아시안은 인종 갈등의 바깥에서 구경꾼처럼 존재해온 것이 아니다. 사실 아시안의 존재는 '백인'이란 사회적 그룹의 역사적 구성에서부터 오늘날 트럼프를 통해 분출된 이른바 '백인 민족주의'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아시안은 흑백 간 갈등을 주요 축으로 하는 북미 대륙의 특수한 인종적 역관계 내부에서 전략적인 선택을 하면서 그 역관계를 변화시키고 스스로의 정체성도 형성해왔다. 이제는 당연한 듯이 사용되는 '아시안과 아시안계 미국인'이란 명칭조차도 사실 1960년대에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아시안들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이다. 

    그 전략적 선택의 결과로, 아시안은 북미의 특수한 백인 우월주의 체제 안에서 양극단을 오가는 존재였다. 백인 주류로부터는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시혜적 칭찬 대상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인 우월주의을 위협하는 "황화(Yellow Peril)"라는 위협적인 존재로 양극단을 오고 간다. 흑인을 포함한 다른 유색인종들로부터는 백인 우월주의에 맞서 싸우는데 필요한 동맹군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유색인종들과는 거리를 두고 백인하고만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또한 어느 정도는 백인주류에 받아들여진 얄미운 "명예 백인(honorary white)"사이를 오가는 존재다.

    오늘날 아시안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1. 19세기 초 "쿨리"에서 19세기말 "황화": 백인 시민권과 "몽골리언"의 배제

    아메리카 대륙에 아시안이 대규모로 이주하게 된 계기는 유럽 제국에 의한 흑인 노예제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의 흑인 노예 혁명이 성공하고 최초로 식민지 독립국가가 세우진 이후 유럽 제국들은 그 혁명에 고무된 흑인 노예들의 봉기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마침내 유럽 제국들이 흑인 노예제의 철폐를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 첨예하게 대두된 문제는 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노예의 노동력을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유럽 제국은 그 해답으로, 흔히 "쿨리(coolie)"라 불리는 일정 기간 노비와 같은 계약을 맺는 아시안 노동자에서 찾았다. 유럽 제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유순하고', 약간 '더 문명화된' 것으로 간주된 준-노예 상태의 아시안 "쿨리"는 흑인 노예의 노동을 대체할 뿐 아니라, 항상 봉기할 위험이 있는 흑인 노예와 백인 노예주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줄 일석이조의 쓰임새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아시안 "쿨리"들은1830년 대부터 주로 중국의 광동지역과 남아시안 지역에서 노예제 플랜테이션 있는 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에 대규모로 투입되게 된다. 태평양을 가로지는 아시안 "쿨리" 수송선의 상황은 악명 높은 대서양 흑인 노예선처럼 참혹해서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하였고, "쿨리"들의 참혹한 노동 조건은 심지어 흑인 노예들조차 딱하게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84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터졌다는 소문은 더 많은 아시안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아시안의 이주는 중국의 아편전쟁 이후 유럽 열강의 침탈에 갈수록 불안정해져 가는 동아시아 정치체제에서 빈곤과 가난에 쫓기고 고용과 성공의 기회에 현혹되어 북미와 남미로, 서인도 제도로, 오세아니아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쿨리"들은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대동맥 역할을 한 철도 건설 등 미국의 기간산업 건설에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한다. 이처럼 아시안의 노동은 오래 전부터 미국 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백인 우월주의 체제는 아시안의 이주와 이민을 처음에는 노동력이 필요해서 불러들였지만 결코 곱게 보지 않았다. 밑으로부터는, 건설 분야 등의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경쟁하게 된 아일랜드계나 이탈리안계와 같은 유럽 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노골적인 폭력 형태로 나타났다.

    아메리카 대륙에 먼저 와 지배 엘리트 자리를 차지한 영국계 백인 주류에게 차별받던 동유럽과 남유럽계의 이민자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사회 내 유색인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백인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유럽 이민자들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통해 자신의 백인됨을 강조하고 백인의 지위를 청구함으로써 이후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백인 주류로 통합된다.

    린치는 흑인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다. 아시안이나 갈색 피부를 가진 히스패닉 - 혹은 요즘 진보진영에서 "라틴엑스(Latinx)"라 부르는 - 들도 백인 자경단이나 폭도들이 자행하는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학자 에리카 리(Erika Lee)에 따르면, 주로 백인 저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된 폭도들이 1871년 캘리포니아주 LA에서 경찰의 방관 아래 백주대낮에 17명의 중국계 이민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다. 1885년 와이오밍주 락스프링에서는 28명의 중국인 광부들을 린치해 살해하고, 나머지 중국계 주민들을 폭행한 뒤 재산을 파손해 마을에서 내쫓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런 식으로 아시안은 공적인 남성 노동시장에서 축출되어 전통적으로 여성노동 영역으로 간주되던 요리와 세탁, 청소 노동으로 쫓겨난다. 사회학자인 엔 르 에스피리투(Yen Le Espiritu)에 따르면, 이것은 아시안 남성이 북미에서 남성성을 잃고 여성화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이다.

    이렇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한 임금이 지급되는 남성 노동자의 공적인 노동시장은 백인 노동자의 독점 영역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아시안 폭력은 백인 노동계급 남성이 북미에서 온전한 시민권 및 배타적 노동권을 통해 백인 중심의 남성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백인 정치 지도자들 역시 아시안을 곱게 보지 않았다. 후에 좀 더 설명하겠지만, 오늘날 트럼프로 분출된 이른바 '백인 민족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백인들의 공포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유럽 식민주의 최대의 악몽은 유색인종들, 그중에서도 특히 흑인과 아시안이 힘을 합쳐 유럽의 식민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체제에 대항해 들고일어나는 것이었다. 특히 많은 인구와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아시안이 몰려오는 위협은 황인종이 가져오는 재앙이라는 의미의 "황화"라고 이름 붙여졌다.

    "황화"가 유럽 제국의 지도자들에게 밤잠을 설칠만한 걱정거리였다는 것은 1895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꾼 악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화가를 시켜서 자신의 악몽을 그리게 하는데, "황화"로 이름 붙여진 이 유명한 그림에서 아시아는 먹구름을 몰고 오는 부처로 표현되고 유럽은 그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희랍의 여신으로 그려진다. 그는 이 그림을 다른 유럽과 북미의 지도자들에게 "황화"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보냈다.

    이런 식의 공포를 부추기는 책들도 19세 말 20세기 초에 출판되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유럽, 북미, 호주 등을 연결하는 백인 식자층들의 초국적 공론장에서 많이 읽혔다. 역사학자이자 우생학자였던 로스롭 스토다드(Lothrop Stoddard)1920년에 출간한 <백인의 세계 우월주의를 위협하는 유색의 물결(The Rising Tide of Color Against White World Supremacy)>이란 책이 널리 읽히면서 반-이민 정책 입법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제목과 표지에서 흑인과 아시안 연대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 공포를 쉽게 읽을 수 있다.

    백인 노동 조합과 백인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인들, -이민 시민 단체들과 인종주의 과학이 결합된 반-아시안 캠페인은 1875년 페이지법(Page Act)1882년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으로 귀결된다. 이는 한 집단을 특정해서 배제한 미국의 최초의 이민 규제로 악명이 높다.

    사실 미국에 앞서 반-아시안 이민 정책의 선봉에 섰던 것은 호주였다. 역사학자인 마릴린 레이크와 헨리 레이놀즈(Marilyn Lake & Heny Reynolds)에 따르면, 호주의 백인 정착민들은 자신들을 최선봉에서 "황화"를 저지하고 백인 문명을 수호할 전진 기지로 여겼다. 호주는 미국에 앞서 1850년대에 아시안의 이민을 막는 이민 정책을 만드는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백인들의 호주 이민을 장려했다.

    흔히 "백호주의(White Australia)"로 알려진 이 정책은 백인 권력의 유지와 재생산과 직접 연결된 것이고 미국과 캐나다와 같은 다른 '백인들 땅'의 백인 민족주의를 선도하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례들은, 당대에 흑인운동을 이끌던 지성이었던 W.E.B. 뒤보이스(Du Bois)가 지적했듯이, 자신들은 유색인종과 다르다는 확고한 백인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과 유럽 민족 간 차이와 국경을 초월하는 지구적이고 초국적인 백인 간의 강력한 인종적 연대 의식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시안은 법률적 문구로 "동화가 불가능한 외국인(unassimilable alien)"이라 규정되어 배제되었다. 아무리 교육과 세대가 거듭되어도 백인과 동화가 불가능해서 결코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으니 애초에 이주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아시안이 백인과 동화가 불가능하게 열등하다는 근거는 아시안을 "몽골리언 (Mongolian)"이란 인종으로 분류한 인종주의적 과학에서 찾았다.

    18세기 중반에 태동하여 20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골상학이나 우생학 등의 인종주의적 과학의 과학자들은 피부색이나 두개골 등을 측정해서 인간을 분류하고 우열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오늘날 학계에서 "생물학적 인종주의"라 부르는 담론 체계를 만들어냈다. 학자들마다, 이론과 측정 방법에 따라, 때로는 흑인이 가장 열등했고, 때로는 "몽골리언"으로 분류된 황인종이 흑인종보다 더 열등했다. 어떤 경우든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기준이 되는 온전한 인간은 "코카시언(Caucasian)"으로 분류된 백인이었다.

    인종에 일관된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종주의적 과학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인"의 범주, 즉 정확히 '누가 백인이고 누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확정된 적이 없고 확정될 수도 없다. 무엇이 백인인가? 피부색이 하얀 사람들인가? 사실 동아시안들의 피부색이 종종 더 하얗다. 정확히 그것은, 1922년 일본계 이민자인 타카오 오자와(Takao Ozawa)가 차별에 도전하고 시민권을 요구하면서 미국 대법원에서 한 주장이다. 미국 대법원은 그가 피부는 더 하얄지 몰라도 과학적 분류상 그는 "코카시언"이 아니라는 근거로 거부한다.

    그럼 "코카시언"이 백인인가? 오자와의 소송 몇 달 후 남아시아계 이민자인 바갓 싱 씬드(Bhagat Singh Thind)는 자신이 "코카시언"이라는 근거로 시민권을 요구한다. 이번에 미국 대법원은 그가 과학적 분류상 "코카시언"일지라도 갈색 피부를 가진 그는 미국 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백인의 이미지와는 상이하다는 근거로 거부한다.

    미국의 시민권이 1790년 귀화법 이후 "자유로운 백인"에게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사실상 '누가 시민이 될 수 있고 누가 시민이 될 수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누가 백인이고 누가 백인이 아니냐?'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 된다. 이런 판결들은 미국학 학자인 매튜 제이콥슨(Matthew Frye Jacobson)이 지적한 것처럼, 국가에 속함의 경계와 보증 받은 "백인"의 범주의 경계를 동시에 규정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이렇듯 "백인"의 범주란 과학적 일관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정세와 국면 속에서 권력이 '누가 백인인지 아닌지'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시안은 백인과 "동화가 불가능한" 타자로써 "백인"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렇듯 인종주의란, 자신과 다르게 보이는 사람에 대한 편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종이 먼저 존재하고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인 타-인종에 대한 편견을 통해 인종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회학에서 규정하듯이 인종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social construct)이다. "인종"이란 근대의 특수한 사회적 역관계 속에서 피부색이란 자의적 기준을 이용해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의 혁명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선언한 한편 모순적으로 식민지와 노예제를 유지하고 운영한 유럽 제국주의가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을 갖춘 유일하게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인간인 "백인"과 지배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유색인종"이란 범주를 발명해 냄으로써 모순을 해소하고 자신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흔히 오해해 왔듯 인종 문제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국적인 백인 간의 연대 의식이나 그에 대당하는 지구적인 "흑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보이듯 인종은 동일한 인종의 울타리 안에서는 민족주의적이고 종족-중심주의적인 배타성과 차별을 넘어서는 보편적 정체성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인종은 다문화주의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종은 계급은 물론, 민족·종족이나 문화적 차이로 환원할 수 없는 다른 범주이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으로 시작된 인종차별적인 이민 배제는 1924년 이민법으로 거의 모든 유색인종으로 확대 되었고, 1965년까지 그 인종차별적인 이민 체제는 유지되었다. 이렇게 유색인종은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이에 유럽에서는 계속 이민자들이 유입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무려 3000만 명의 이상의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온다.

    2. 20세기 중반 "모범적 소수자"·"명예백인"으로

    1965년에 인종차별적인 이민정책이 끝난 이유는 안팎의 압력 때문이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 내부에서 1960년대의 보통 흑인 인권 운동이라 불리는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의 성공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로자 파크스(Rosa Parks)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시작되었고, 전 사회 분야로 확대되면서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로써 사회운동은 법적으로 인종 분리와 차별을 용인했던 당시 미국의 인종주의 체제를 끝장냈다. 20세기 초까지 백인 식자층에게 "상식"으로 통하던 생물학적 인종주의도 더 이상은 시민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는 명백히 인종차별적인 기존의 이민법 역시 설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는, 세계대전 이후 과거 식민지들이 제3세계 비동맹운동이라는 무시 못 할 세력으로 국제 정치의 무대에 등장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전후 세계 질서를 복구하는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소비에트와 냉전을 벌이면서 제3세계로부터 도덕적 권위가 필요했던 미국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국제 여론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아시안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친선 외교단을 1950년 대에 아시아 여러 나라에 보내 미국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설득했다. 흑인 인권운동과 백인 우월주의 체제 간 대결로 긴장이 높아질 때 미국 사회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제3세계 민중들의 뜨거운 눈총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제3세계 반-식민주의 운동과 미국의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은 서로 연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백인 우월주의 폭력에 직접 맞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주도적으로 싸웠던 흑인들의 사회운동이 없었다면, 1965년 인종차별적 이민법의 철폐는 아마도 오래 기간 지연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민을 포함해 아시안계 미국인들 대다수는 이렇게 인종차별적 이민법이 철폐됨으로써 1965년 이후 미국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다.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 그룹 중 아무도 차별받는 흑인과 같은 처지에 놓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의 바닥에 짓눌려 있는 흑인 사회와 거리를 두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백인 주류와 가까워지거나 동화되려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회학자인 메리 와터스(Mary Waters)1990년대에 행한 연구에 따르면, 서인도 제도나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이민자들조차도 미국의 흑인 사회와 거리를 둬 차별을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민자의 피부색에 따라 다른 선택항이 주어진다. 유럽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기쁘게도 "백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백인이란 인종적 정체성을 껴안은 채 백인 주류로 통합되어 자신들의 종족적 정체성은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쉽게 잊는다. 이에 미국에서 나고 자란 백인 이민 2세들이 간혹 자신의 뿌리를, 이탈리아나 아일랜드에서 찾아 전통문화를 행하고 유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에 불과하다. 반면, 흑인 이민 1세대는 종종 자신의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미국 흑인 사회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면 어느 정도는 인종적 정체성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메이카인이나 일본인이라는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할수록 그 사람의 흑인이나 황인종이라는 불리한 인종적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묻히게 마련이다.

    이렇듯 유색인종에게는 종족적 정체성은 단순히 취향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인종적으로 분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선택이 된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사회의 인종적 규정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흑인 이민 2세들은 아무리 자신의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해도 사회로부터 흑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미국 흑인과 동일시하며 인종적 정체성을 껴안는 경향을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아시안이나 다른 비-흑인 유색인종 이민자들은 또 다른 선택항을 갖는다. 이들은 흑인보다는 인종적 규정이 약하기 때문에 휠씬 용이하게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인종적 정체성을 대체할 수 있다. 게다가 흑인과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차별을 피할 수 있는, 좀 더 효과적인 선택항을 가지고 있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아시안의 "모범적 소수자 (model minority)"라는 구분 짓기이다.

    "모범적 소수자"라는 규정은 단순히 백인 주류 사회가 아시안 공동체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실 아시안들이 차별을 피하기 위해 취한 전략적 선택과 성공의 결과이다. 역사학자 엘렌 우(Ellen Wu)의 연구에 따르면, 아시안의 "모범적 소수자" 되기는 세계대전 전후로 보수적인 중국계와 일본계 미국 이민 사회 지도층이 주도하여 아시안을 흑인과 히스패닉 공동체와 구분 짓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백인 주류의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에 편승해 '유교 문화 때문에 아시안은 예절이 바르고 법을 잘 지킨다', '순응적이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 등의 고정관념을 만들어 냈다. 이에 대한 핵심적 함의는 아시안 이민자는 백인 주류가 범죄와 타락의 소굴로 여기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공동체와는 달리 모범적이고 따라서 시민권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이민자라는 것이다.

    이후 "포스트-1965 이민"으로 등장한 매우 이질적인 아시안 이민자들 중 특정한 그룹만 선별적으로 부각되어 "모범적 소수자" 되기에 추가 동력을 제공했다. 아시안 저임금 노동계급과 사회경제적으로 다른 유색인종 공동체보다도 더 어려움을 겪는 난민 출신 아시안 그룹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전문직이나 유학생으로 미국 사회에 들어와 성공한 아시안 이민자들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아시안 중위 가족의 재산이 백인의 재산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계·인도계·중국계 아시안에만 한정된 것이고 한국계를 포함해 나머지 아시안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에 아시안 아메리카는 자신을 "모범적 소수자"로 성공적으로 구분 지음으로써 백인 우월주의 체제의 차별을 완화하고 백인 주류 사회에 제한적으로나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안이 "모범족 소수자"라는 규정은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 그룹은 모범적이지 않다는 것, 심지어 '문제적 소수자'라는 것을 함의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아시안의 "모범적 소수자"라는 구분 짓기는 백인 주류 사회에 의해서 다른 유색인종의 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여지가 큰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이 "모범적 소수자"라는 구분 짓기가 시혜적인 태도를 취하는 백인 주류에게 쉽게 받아들여진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비판적인 아시안계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모범적 소수자"를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비판하고 강력히 거부해 왔다.

    아시안이 자신들과 구분 짓기를 하고 거리 두기를 하는 것에 대해 흑인과 다른 유색인종들은 아시안들의 "명예 백인(honorary white)" 되기라고 비판한다. 사회학자인 에두아르도 보닐라-실바(Eduardo Bonilla-Silva)는 아시안과 밝은 피부색을 가진 히스패닉들이 미래에는 백인 주류로 통합되어 백인 우월주의 체제를 쇄신해서 유지할 수도 있는 "명예 백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미국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한 학자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책에서 한 비판이니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아시안계 학자들은 아시안은 오히려 아직도 "영원한 외국인(forever foreigner)"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반박한다. 요즘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기승을 부리는 반-아시안 폭력을 보면 아시안이 아직도 후자에 더 가깝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은 여전히 "동화가 불가능한" 타자로 보이는 것이다. 아시안은 시혜적인 태도를 취하는 백인 주류가 봤을 때 "모범적 소수자"이고, 비판적인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이 봤을 때는 "명예 백인"이며, 아시안 자신이 봤을 때는 여전히 외부인으로 타자화된 "영원한 외국인"인 것이다.

    인종주의는 사람을 여러 인종들로 분열시킬 뿐 아니라 각각의 인종 그룹 안에서도 분열시킨다. 유색인종들도 인종주의를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인종 그룹 안의 다른 이를 타자화하고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차별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내면화된 인종주의(internalized racism)"라 부른다.

    유색인종 그룹에 따라 그 그룹이 백인 우월주의 체제에 의해 인종화된 특정한 방식에 따라 각각의 거리 두기의 내용이 달라진다. 흑인의 경우는 검은 피부색과 곱슬한 머리카락이 추하고 불결한 것으로 인종화되었기 때문에 흑인 공동체 안에서 밝은 피부색과 직모를 가진 흑인이 대접받고 어두운 피부색과 곱슬한 머리카락은 기피된다. 다른 한편, 아시안의 경우는 "영원한 외국인"으로 인종화되었기 때문에 백인 주류 문화와 상대적으로 동화가 덜 된 아시안과 거리를 두려고 하게 된다. 특히 가장 두드려진 징표가 되는 영어가 서툴고 발음에 억양이 있는 아시안과는 거리를 두려 한다. 북미 대학 캠퍼스에서 아시안계 미국인과 캐나다인 학생들이 아시안 유학생들을 "FOB(Fresh off the Boat)"라는, 촌스러울 뿐 아니라 동화되지도 못했다는 의미의 용어로 지칭하면서 타자화하고 거리를 두어왔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아시안의 특정한 인종화 때문에 아시안계 미국인들은,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들과는 달리 자신과 동일한 인종의 유학생과 강하게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백인 주류 사회의 차별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백인 우월주의 체제의 반-아시안 인종차별은 아시안들 사이의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에도 큰 영향을 준다.

    3. 포스트-1965 이민: 레이건의 반격에서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는 1980년에 등장한 공화당 레이건 행정부가 주도한 반격을 통해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의 요구가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reverse racism)"이라고 거꾸로 뒤집어 놓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레이건 행정부는 보통 학계에서 신자유주의라고 알려진 정책을 통해 사회복지 체제를 해체하고 흑인 인권 운동의 성취를 후퇴시키면서 하나의 새로운 인종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현 바이든 행정부가 그 체제를 "체계적 인종주의(systemic racism)"라고 명하며 이를 철폐하고 미국을 진정한 다인종 민주주의로 재건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오랫동안 사회운동 활동가들과 비판적 학자들은 "체계적", "구조적", 혹은 "제도적" 인종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체제를 규정하고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침묵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마침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역사적 인종주의 체제에 하나의 이름이 주어지고 가시화되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세운 체제가 쉽게 소멸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반격을 통해 재확립된 백인 우월주의는 여유롭게 시혜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미소 짓는 얼굴로 자신이 하나의 인종주의 체제라는 것을 부인하고 감출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인종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 많이 쓰는 표현으로 '방 안의 코끼리'와 같은 존재였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인종차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이에 대해 침묵만 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백인 우월주의가 비판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침묵시킬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는 트럼프를 통해 19세기 말처럼 추악한 민낯과 벌거벗은 폭력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인종차별에 대한 미국 사회의 침묵을 직접적으로 깨뜨린 것은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고 외치며 새롭게 분출된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의 출현이지만, 그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의 대응이 트럼프의 백인 민족주의의 형태를 취한 데에는 좀 더 근본적인 저변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1965년 인종차별적 이민법의 폐지가 반세기 만에 미국 사회에 불러온 엄청난 인종적 구성의 변화이다.

    1965년에는 미국 전체 인구의 84%가 백인이었다. 이처럼 백인의 압도적인 구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 인종차별적이고 백인 민족주의적인 이민정책이 인위적으로 빗어낸 결과였다. 2015년 백인은 미국 전체 인구의 62%로 급감했다. 다름 아닌 1965년 이후 새로운 이민법으로 급격히 증가한 아시안과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등장 때문이다. 흑인 인구는 큰 변동을 보이지 않았다. 1965년 인구의 11%였던 흑인은 2015년에도 12%로 비슷한 구성비다. 그러나 19654%였던 히스패닉은 201518%로 늘었다. 아시안은 더운 큰 증가세를 보여, 19651% 정도에 불과하던 아시안은 2015년 무려 6%로 증가하면서 흑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심지어 2010년 이후 아시안 유학생 출신 이민자의 폭증으로 아시안 공동체는 히스패닉 공동체를 앞질러 가장 많은 이민자를 양산하고 있다. 이 같은 증가 추세가 유지된다면, 2040년대에는 백인은 미국 인구의 50% 아래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학계에서 이른바 "포스트-1965 이민"이라 칭하는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다.

    과거의 인종차별적 이민정책이 없었다면 미국은 오래전부터 오늘날 보다 더욱 다양한 인종적 구성을 갖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포스트-1965 이민"은 사실 그전의 불의하고 부당한 상황을 일정 정도 시정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트럼프를 촉매로 결집된 백인 우월주의 세력의 불만과 공포는 극대화 됐다. 지난 몇십 년간 북미 주요 대학 캠퍼스와 실리콘 밸리 등에서 나타난 아시안계와 아시안 유학생의 폭발적 증가는 그동안 엘리트 공간을 독점해오던 백인들에게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경쟁과 위협을 가져다주면서 새로운 "황화"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모범적 소수자"는 백인 우월주의가 시혜적으로 너그럽게 허용하는 선을 넘는 순간 위협적인 "황화"로 돌변한다. 비판적 아시안계 학자들이 지적해 왔듯 이 두 가지는 결국 인종적 타자화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게다가 혜성같이 등장한 흑인 대통령은 그들의 공포가 현실화된 증거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지난 1월 트럼프가 백인 폭도를 불러 모아 국회의사당에 난입시키며 자극했듯, 그들은 "행동하지 않으면 나라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트럼프를 뽑아준 백인들이 트럼프에게서 부여한 임무는 바로 미국에서 백인이 소수자가 되어가는 경향을 역전하거나 최대한 지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바로 이러한 백인 민족주의라는 것을 "포스트-1965 이민"이 불러온 거대한 변화의 맥락에서 본다면 분명해진다.

    -이민 정책을 핵심으로 내세운 트럼프 대선 캠페인의 슬로건이었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백인 간 코드화된 언어이고 연막에 불과했다. 표면적으로는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들에게, 특히 흑인들에게는 '좋았던 시절'이 존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유색인종에게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미국을 다시 하얗게 만들자(Make America White Again)"는 백인 민족주의적 슬로건으로 들린다.

    이런 백인들의 공포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도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들이 주장해 왔듯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유색인종이 다수가 된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테니까.

    4. 바이든 행정부와 다인종 민주주의 건설 프로젝트: 유색인종과 "블랙 앤 브라운 피플(Black and Brown people)"사이에서

    이제 미국은 진정한 다인종적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초유의 실험에 들어갔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의 재건을 선도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두 가지 용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거듭 호명하고 있다. 하나는 오래된 용어인 "유색인종(people of color)"이고 다른 하나는 "블랙 앤 브라운 피플(Black and Brown people)"이라는 새로운 용어이다. 이 두 용어는 요즘 주류 대중 매체에서도 거의 매일 언급되고 있다.

    새로운 주류 정치의 주체가 "유색인종"으로 호명될 때는 아시안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흑인과 다른 유색인종 공동체의 진보적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아시안이 백인 우월주의 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같이 해야 하는 중요한 우군이란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흑인 인권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명망 있는 시민운동가이자 변호사인 스티브 필립스(Steve Phillips)는 몇 년 전 출판된 그의 책에서 "포스트-1965 이민"이 가져온 변화를 가리키며 민주당이 부동층인 백인들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빠르게 증가 중인 유색인종 공동체에 주목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민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흑인에 아시안과 히스패닉을 비롯한 유색인종 다수를 조직해서 더하고, 거기에 진보적인 백인들을 더하면 민주당이 선거에서 계속 이길 뿐 아니라 미국의 새로운 주류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유색인종 공동체를 향해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것을 보면, 민주당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한편, 두 번째 용어로 호명될 때에는 아시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아닌지가 모호하다. 가끔 "블랙 앤 브라운""옐로우(Yellow)"를 더해서 아시안을 포함시켜 줄 때도 있으나, 이는 아시안이 보통은 "블랙 앤 브라운 피플"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컨대, 새로운 민주주의 건설의 프로젝트 안에서 아시안은 지금 "유색인종""블랙 앤 브라운 피플" 사이 어딘가에서 포함되기도, 배제되기도 하는 모호한 위치에 있다. 이런 모호함은 아시안이 그간 "모범적 소수자"로 다른 유색인종과 구분 짓기를 해온 결과, 이제 역으로 구분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시안의 모호한 위치는 요즘 반-아시안 폭력의 가해자의 피부색이 다양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우리를 "유색인종"이라 부르는 것이 불편하고 뭔가 모욕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이전에 "노동자"라는 명칭을 모욕적으로 여긴 것과 비슷한 착각이다. 그것은 인종주의 현실을 직시하고 바꾸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저항적 정체성이다. 인종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그것 또한 사회적으로 해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을 통해 인종주의 체제를 철폐함으로써 피부색에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차별적 인식과 의미와 느낌들이 소멸한다면,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인종'이라는 것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유색인종"이라는 규정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고는, 자신을 "유색인종"으로 인식하고 분류하는 백인 우월주의 체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세계시민"으로서 혹은 "한국인"으로서 인종적 분류를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주관적 착각에 불과하다.

    아시안의 모호한 위치가 확실해지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이는 현재 반-아시안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시안 폭력에 대한 아시안의 올바른 대응은 응당 현재의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그것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미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현재의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고 외칠 때 그것은 인종차별 때문에 유색인종, 특히 흑인의 생명이 백인의 생명만큼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시안을 포함한 모두의 생명이 진정으로 소중해지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아시안은 그 사회운동 안에서 반-아시안 폭력에 맞서 싸우고 다른 유색인종 공동체의 연대를 호소하고 조직해야 한다. 동시에 아시안들이 그동안 그들에게 충분한 연대를 보여주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시안들은 자신을 백인 주류의 시혜적 대상인 "모범적 소수자"로 다른 유색인종 그룹과 구분 짓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시혜적 대상에 불과한 자는 아무에게도 진정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

    아시안이 오랜 관성을 떨치고 일어나 다른 유색인종 공동체와 같이 어깨를 걸고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해 백인 우월주의에 당당히 맞설 때 흑인과 백인을 포함한 모두의 진정한 존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반-아시안 폭력에 맞선 적절한 대응이고, 다인종 민주주의 건설의 프로젝트 안에서 아시안의 위치를 찾고 위상을 확립하는 것이며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에 동참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 역사적 반-인종주의 사회운동에 적극 지지를 보냄과 동시에 이번 기회를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해 각성하고 인종과 인종주의에 대한 그간의 오해와 혼란을 걷어내고, 그것이 한국 사회에 갖는 의의를 깊게 고민해 헤아려 나가야 할 것이다.

    * 위 글은 <프레시안> 제보란을 통해 들어온 자유 기고입니다. 글을 쓴 박성춘 박사는 미국 뉴욕 시립대에서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리키고 있으며, 'Korean International Students and the Making of Racialized Transnational Elites'의 저자이자 'Newcomers and Global Migration in Contemporary South Korea: Across National Boundaries'의 공동-편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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