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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예 여성 희생 대가로 발전한 美 부인과 의학
    인종주의 2021. 3. 26. 16:06

    2021.03.25

    [책과 길]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지음 / 이영래 옮김 / 갈라파고스, 1만6500원

    미국 노예제도에서 흑인 노예 여성은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면서 백인 농장주, 노예 남성의 성폭력으로부터도 취약했다.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은 약자 중의 약자였던 노예 여성이 미국 여성 의학 발전 과정에서 실험 자원이면서 간호 보조 인력으로 일했던 숨겨진 역사를 드러낸다. 사진은 영화 '노예 12년'에 등장하는 노예 여성 팻시가 자신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농장주에게 항변하는 모습. 팻시는 농장주로부터 도망쳤다는 오해를 받자 씻기 위해 이웃에 비누를 빌리러 갔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판씨네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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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예 12년’에 등장하는 팻시는 미국 노예제도에서 흑인 노예 여성이 처한 비참함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남들보다 많은 목화를 수확하면서도 농장주의 광적인 집착과 농장주 부인의 질투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견디다 못한 팻시는 노예 남성 솔로몬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중 팻시가 도망쳤다는 오해를 받는 장면은 개인의 분노, 슬픔을 넘어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또렷이 각인시키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농장주 부인이 씻을 비누조차 주지 않아 팻시가 이웃에 비누를 빌리러 간 것을 두고 농장주는 도망치려 했다고 의심한다. 팻시는 “몸에서 냄새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울부짖으며 항변했지만 농장주는 믿지 않고 살이 찢어지도록 채찍을 휘두른다.

    산부인과 탄생의 숨겨진 자원

    책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은 미국 노예제도에서 팻시 같은 노예 여성이 겪었던 또 다른 착취와 희생을 조명한다. 유럽에 비해 의학 발전이 더뎠던 미국에서 부인과 의학이 유달리 발전한 뒤에는 노예 여성들이 실습 자원이자 간호 보조 인력으로 적잖은 희생을 치른 역사가 있음을 들춰낸다. 저자는 의학, 노예제, 여성 역사를 연구하는 의학사학자로 미국 네브라스카링컨대학 역사학과에서 의학사를 가르치는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책은 2018년 미국사연구자협회가 뽑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과 젠더 역사를 다룬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예제와 의학사에 존재하는 “역사적 기록의 간극을 봉합”하려는 저자의 의도대로 책은 노예 여성이 미국 의학의 진화에 중요한 연결 고리였음을 보여준다. 1808년 미국 의회가 아프리카 태생 노예 수입을 금지한 후 노예주들의 관심은 ‘노예 생산’에 집중됐다. 노예 여성의 출산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백인 의사들은 산파 일을 시작으로 차츰 부인과 질환도 담당한다. 더 많은 출산을 위해 부인과 질환에 대한 관리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노예 여성들의 가격 역시 의사의 진단에 따라 크게 좌우됐다. 1859년부터 1년간 미국 남부 6개 주에서 거래된 노예 자료에서 노예 여성의 가격이 노동력이 높았던 노예 남성과 비슷했던 것은 출산의 가치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이는 남부 의사들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의사들에게 노예 여성은 연구를 위한 “가장 요긴한 자원”이었다.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노예 여성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이전에는 치료하기 힘들었던 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질환을 경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예 여성이 처한 열악한 환경이 놓여 있었다. 노예 여성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성폭행, 해산 공간의 비위생적인 상태, 영양이 부족한 식사로 생식과 관련한 질병에 취약했다. “그들의 몸은 연구를 가능하게 했고 연구에서 나온 자료를 통해 백인 의사들은 부인과 질환, 약리학, 처치, 치료법에 대한 의학 논문을 쓸 수 있었다.”

    ‘부인과 의학의 아버지’라는 제임스 매리언 심스의 명성은 이같은 환경에서 쌓은 것이다. 1844년 앨라배마 주 작은 노예 농장에 문을 연 ‘환자의 집(Sick House)’은 그의 성공 발판이었다. 그는 첫 2년 동안 누구도 치료하지 못해 백인 공동체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보조했던 의과 도제들마저 떠났다. 그러자 그는 입원한 노예 여성을 교육시켜 간호사로 일하게 했다. 이 여성들은 환자이면서 간호사인 데다 농장에서 노동도 해야 했다.

    심스는 이후 노예 여성 중 한 명에게 서른 번째 수술을 시행한 끝에 마침내 방광질루(방광과 질 사이의 조직에 결손이 일어난 상태) 치료에 성공했다.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는 1852년 ‘미국의학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3년 뒤 뉴욕주여성병원을 개원한다. 이후 미국부인과학회 회장에도 당선된다. 자궁경관을 진찰할 때 쓰이는 ‘심스질경’이 그의 이름을 땄을 정도로 19세기 대표적인 부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린다.

    치유와 억압의 모순된 기원

    백인 의사들은 노예 여성을 치료하면서 이들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는 차별을 강화했다. 노예 여성은 고통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출산을 쉽게 하고, 성욕이 강하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 때문에 노예 여성들은 임신 중이나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농장에서의 노동을 쉴 수 없었다. 출산 직전까지 일을 하는 바람에 태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줬고, 산모의 영양이 충분치 못해 아기에게 줄 젖을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노예 여성이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큰 고통 없이 수술을 참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의사들에겐 널리 퍼져 있었다.

    편견은 눈앞의 사실도 가렸다. 의사들은 노예 여성에 대한 치료 경험을 토대로 백인 여성을 치료해 둘의 차이가 없음을 몸소 체험했음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19세기 미국의 외과의 존 아처는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에 의해 임신을 해도 흑인 아이만 낳을 수 있다는 내용이 실린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의학 실험의 결과는 인종차별주의자의 주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야 마땅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발표된 모든 논문, 소개된 모든 과학과 의학 이론, 채택된 모든 법률이 흑인과 백인의 생물학적 차이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 여성에 대한 편견은 아일랜드 이민 여성 같은 이방인에게 고스란히 옮겨갔다. 감자 기근으로 미국으로 대거 건너온 가난한 아일랜드 여성들은 노예 여성처럼 질병에 취약했고, 성매매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찮게도 앞서 언급한 의사 심스가 뉴욕주여성병원에서 맞은 첫 환자 역시 아일랜드 출신 여성이었다. “심스 같이 남부에서 이주해온 의사들에게는 가난한 아일랜드 여성을 치료하는 것이 노예 여성을 치료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인종적 편견에 치우진 견해들 대부분이 아일랜드 여성들도 흑인 여성들처럼 신체적 고통을 잘 참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책은 부인과 발전 과정에서 묻혀 있던 노예 여성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한편 산부인과의 기원과 관련한 시사점도 던져준다. 이는 ‘왜 여성들은 산부인과가 불편한가?’라는 부제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추천의 글’에 담긴 다음 문장처럼 일반적인 의사-환자 간의 관계 문제와도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은 백인 노예주 남성 의사-흑인 노예 여성이라는 능동-수동적 관계가 전통적인 의사-환자 관계의 원형이 된 기원을 보여줌으로써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생각할 지점을 준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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