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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힙합, 그 역사적인 탄생 연대기 (출처 힙합버그)
    힙합 아카이브/힙합 2010. 11. 3. 19:58


    힙합, 그 역사적인 탄생 연대기

    (1) 프롤로그

    여러 해 동안 내 음악 감상 생활의 거의 전부이다시피 했던 힙합. 하지만 아직도 난 힙합이 뭐냐는 물음은 당황스럽다. 이런 물음들에 나는 여지껏 단 한번도 한마디로 잘라 자신있게 말한 적이 없다. 얼버무리는 내 대답은 대체로 둘 중에 하나다. '힙합, 음... 잘 몰라요' 내지는 '힙합이 힙합이죠, 뭐.' 언제나 그렇다. 힙합이 아니라 다른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어떤 것의 에센스는 언제나, 일설로 형언이 불가다. 이럴 때마다 내 머리 속엔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이 머무른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여 말할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나눠 쓰게 될 글에서 내게 부여된 과제는, 어느덧 20대 중반을 넘어서 장년이 된 힙합의 성장사를 글로 풀어내는 것이다. 간결히 알기 쉽게 얘기 할 능력이 안되니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장광설이 될 듯하다. 이 장광설을 시작하면서 뜬금없이 도덕경 첫 구절에 대한 이야기를 갖다 붙인건 도그마에 가까운 부정적인 전제로 내 빈약하고 허점 투성이의 글에 대한 일종의 변명을 띄워 두는 셈이다.

    두어 달 전 편집진에게서 원고 제의를 받았을 때도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고 지금도 잘 풀어낼 자신이 없다. 인터넷 혹은 다른 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진부한 부류의 글이 되지 않을까, 반면 어떤 것들은 다분히 주관적인, 따라서 당연히 객관성 역시 다분히 결여된 내용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딱딱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너무 재미없고 딱딱한 내용이 되지 않을까, 여러모로 우려가 되긴 하는데... Reading보다는 Scanning을 한다는 기분으로 독자들이 스윽하며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쓰고 싶은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 뿌리 더듬기의 의미...

    힙합이라기보다는 랩 쏭(rap song)-나는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하는 편이다-이라는 형태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던 것이, 나름대로 주류 장르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좀 된 일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후 힙합은 번져 가는 흑사병처럼 청소년들의 입과 귀, 쇼 비즈니스 바닥, 신문 방송 미디어, 심지어 이태원의 옷가게를 통해서도 대량유통 되어졌다. 이 사회문화현상의 진정한 정체성 검증의 여부는 일단 차제하고 우리나라에서의 힙합은 어느 날 돌연 상륙한 괴수 고질라처럼 갑작스럽고 거대한 것이 되었는데, 그 고질라가 어디에서 돌연변이 되어 나타난 것인지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즐기기만 하면 되는 대중에게 그런 관심과 학구열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다. 대중에겐 그것의 종자가 도마뱀의 뻥튀기이건 공룡의 적통이건 또 불리는 이름이 히팝이건 힙합이건 그건 그다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힙합 음악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훑고 지나가야 할 내용이고 더군다나 20여년이 넘는 힙합의 성장사를 다룬다고 한다면 그에 앞서 반드시 다뤄야 할 필수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되는지라, 이번 글에서는 우선 힙합이 뿌리 내렸던 음악적 토양과 그 토양에 포함된 자양분의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어떤 음악 장르도 완전 無의 상태에서 생성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것의 뿌리가 되는 전통들이 있기 마련이고 과거 유산의 리싸이클링, 리싸이클링된 전통 또는 현존하는 주변부와의 재통합, 그리고 그런 제반 과정을 통한 종합적인 아웃풋을 확대 재생산하며 하나의 장르/스타일로서 끊임없이 생성-진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번 글에서 내가 논의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전통의 근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흑인음악적 전통과 그에 수반된 특징들이고 앞으로 몇 회가 될지 모를 장광설의 대전제 역시 흑인음악의 변천-진화선 상에서의 힙합이다. 물론 90년대 중반이후 힙합이 흑인음악의 고유영역에서 일탈하는 경향이 점차 본격화되고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서는 논외로 하기로 하고 마지막 회 정도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다음에 나올 내용인 흑인음악의 전통과 그 특징에서는 서구 유럽의 음악적 전통과 대비시켜 명확히 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데, 이런 특징의 비교대비는 대체로 상대적인 것이고, 비교를 통해 양자의 우열을 가려 어느 한쪽이 열등함을 주장하려 함이 아니라 단지 내가 그동안 해온 음악감상과 몇몇 서적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며 내 안으로 체화시킨 것들을 서술하는 것일 따름이니 오해는 없으시기 바란다. (덧, 나는 음악이론을 체계적/전문적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2) 흑인음악, 그 전통의 키워드들...



    ■ 흑인음악, 그 전통의 키워드들.... Rhythm, Polyrythm, Layering & Repetition....

    서구 클래식에서의 음악적 프로세스의 주된 추동력은 하나의 멜로디와 병치된 한 세트의 음 집합(=코드)의 순차적 변화와 진행이다. 이 12음계의 음들은 분절되어 있고 각각 엄밀히 제한된 주파수 대역으로 규정되어지며 병치된 한 세트의 음들은 장조 Major와 단조 Minor 이 두 가지 방식에 의해 화성적으로 배열된다. 여기서의 주된 미학적 관점은 이 음들이 총체적인 집합 상태에서 서로 어울리며 얼마나 듣기 좋은 아름다운 소리를 자아내는가 하는 것이다. 즉, 서구 클래식의 본질은 음정과 멜로디의 음악(Tonal Music)이고 그 완성의 지향점은 '하모니(harmony)'이다. 여기에서 리듬은 단지 이 음들의 진행을 돕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즉, 흑인음악에서의 그것처럼 생물체의 뼈대나 근육 같은 역할의 유기적 운동의 틀이라기보다는 음의 강약을 강조하는 기능을 가진 보조적 효과 장치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흑인음악은 기본적으로 리듬에 기초를 둔 음악이다. 12음계의 멜로디와 화성체계에 기반한 서구(유럽) 클래식 음악과는 근본적으로 사운드의 조직과 진행의 프로세스가 다르다. 흑인음악에 멜로디나 하모니가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리듬이 그 중심적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흑인음악의 진행축은 폴리리듬(polyrhythm)의 구조와 짧은 단위 구간의 계속적인 그러나 약간씩의 변이를 수반하는 반복의 기제이다.

    (* 폴리리듬 : 대조되고 구별이 가능한 두 가지 이상의 리듬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기원은 노예선이 흑인들을 싣고 출발한 서아프리카 지역의 민속음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 Polyrhythm을 이루어 내는 것은 '모든 악기의 타악기적 사용(percussive instrumentation)'이라는 흑인음악의 중요한 요소이다.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리듬을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소리는 무언가를 두드려서 내는 격타음(percussive sound)인데, 흑인 음악에서는 심지어 사람의 목소리와 멜로디 악기조차 타악적인 주법을 통해 리듬악기로 변모하는 경우가 많다. 치고 두드리는 드럼은 말할 필요도 없고, 뮤트와 씽코페이션을 통한 기타 스트로크, 베이스의 현을 뜯고 튕기는 초퍼, 단타음이 집합된 리드미컬한 혼 섹션, 무의미한 음절의 연속적인 내뱉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스캣 싱잉 등등. 드럼 리듬 위에 베이스 리듬, 베이스 리듬 위에 기타 리듬, 또 그 위에 다른 멜로디 악기의 리듬, 혹은 인간의 목소리 등, 이 같은 식으로 다층의 레이어링(multi-layering)이 되가는 것이다-물론 레이어의 순서는 언제나 달라질 수 있다.

    이렇듯 흑인음악이 리듬에 중심을 두고 사운드적으로 조직화되는 과정은 서구 클래식 음악과는 명백한 차별성을 띈다. 서구 고전 전통의 음의 명백한 구별과 분리라는 덕목은 흑인음악에서는 쉽게 발휘될 수 없는 사항이다. 빽빽이 구성된 고밀도의 다중 다층적 구조에서 각각의 층(layer)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으나 서로 유리되어진 것은 아니며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마치 삼투압 과정에서 층과 층 사이를 유체 성분들이 스며들 듯 섞여간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개개의 요소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단일체, 즉 하나의 상위적 리듬 (스윙 혹은 그루브)으로 연동하며 결합하는 것이다 (반주와 가사, 멜로디와 리듬, 이 모든 것들의 경계가 하나로 허물어져 하나로 뭉쳐진 듯한 Erykah Badu의 노래들을 들어보라)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반복'이라는 기제다. 서구 클래식에서 반복은 대체로 단조로움과 단순함을 의미하며 화성의 변화와 진행을 위해 회피되거나 은폐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반면 모든 흑인음악적 전통안에서는, 연주에 반복이라는 기제가 적극적으로 개입되며, 은폐되기보다는 오히려 명백하고 적극적으로 표현되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개개의 리듬 패턴 속에 포함되어 있는 텐션과 그것의 릴리스, 정지와 진행 그리고 붕괴(폭발)은 마치 내연기관의 흡입-압축-폭발-배기의 행정처럼 반복되며 스윙이나 그루브를 진행시켜가는 추동력을 발생시킨다.이때 배출된 그루브는 완전히 소모되지 않으며 다음 행정으로 다시 피드백-유입되며 다음 행정을 촉진한다. 이런 연결과정은 마치 살아있는 동물(특히 지렁이나 거머리류의 환형동물) 움직임 같은 끈끈한 연동운동을 연상시킨다. 한편 이 반복이라는 것은 천편일률적이고 기계적인 의미의 반복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반복은 되지만 그 단위 구간내의 일부 요소들은 끊임없이 미묘한 변이와 변화를 일으키며 진행된다-ex. 노동요(일할 때 부르는 노래)나 잼 세션의 반복과정에서 보여지는 소소한 변이들.

    그럼 이제 이런 전통들과 힙합을 연결시켜보자. 이런 전통의 요소와 특징들은 재즈, 쏘울, 훵크 등 흑인음악 진화선상의 여러 시기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것이지만, 힙합은 여러 장르 중 이런 특징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미니멀한 장르이다. 우선 랩에는 멜로디가 없다. 물론 음정상의 변화는 있겠지만 서구음악의 12음계와 화성악적인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그것을 어떤 흐름의 멜로디와 연결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랩은 고도로 발달되고 세련된 타악적 보컬 형식이다. 내뱉는 한 음절 한 음절은 마치 북을 한번 쳐내는 일타 일타의 행위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렇게 내뱉어진 말들의 진행 과정(즉, Flow)에는 악기연주에서 보여지는 것과 동일한 뮤트(묵음)와 씽코페이션(당김음)이 있다. 이렇게 랩은 하나의 독립된 리듬을 형성하는데, 이 리듬은 깔려지는 비트의 리듬과 함께 곡의 공동 목표인 하나의 그루브로 진행된다.
    비트-메이킹 또한 가공된 샘플의 조작을 통한 폴리리듬의 멀티-레이어링 작업 그 자체이다. 드럼 세트 만들고, 베이스 찍고, 멜로디 악기 하나에, 스크래치 올리고..... 샘플의 조각들을 컬라쥬하는 작업 공정은 일반적인 밴드 뮤직보다 더욱 레이어 지향적인(layer-oriented)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힙합의 loop은 반복의 미학이 가장 미니멀화된 단위이다. 4분의 4박자 한 마디 내지 두 마디 단위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loop은 농장 벌판의 노동요 이후 그 어떤 흑인음악 장르보다 반복의 기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룹이라는 형식 자체가 위에서 이미 훌륭히 만들어진 그루브 생성의 내연기관으로, 적절한 리듬의 텐션과 릴리스가 걸리기만 하면 마치 시계추와 같은 공간의 역학이 음의 공간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며 추동의 에너지를 역동적으로 생산해 낸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결국 흑인음악적 진화선상에서 힙합 비트로의 진행은 결국 break의 loop이라는 최소 형식 내에서 그루브를 극대화 해온 과정이다. 따라서 힙합 비트의 핵심 코드는 첫째도 그루브이고 둘째도 그루브이다. 그루브가 없다는건 어디선가 리듬의 하자가 발생했고, 잘못된 레이어링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레이어들이 하나의 통합된 효과를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힙합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단조롭게 단순반복되는 힙합리듬이 지겨워서 싫다라는 이유를 대곤 하는데, 대체로 이건 두 가지의 경우다. 하나는 양질의 그루브를 판별할 수 있는 감상자의 미학적 관점 내지 심미안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상태. 아니면 반복은 되는데 실제로 그루브는 생성되지 않아서 지겨운, 그야말로 단순반복일 뿐인 상태인 것이다.


    (3) 언어적 전통 및 그밖의 요소들



    ■ 언어적 전통 및 그밖의 요소들

    가장 중요한 언어적 전통이라면 무엇보다 그들의 언어생활에서 보편화된 라임 사용이라는 요소이다. 랩이라는 보컬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미는 반복되는 라임에 있다. 일정 마디 단위의 반복인 룹과 마찬가지로 라임의 반복도 매우 중요한 음악적 기제이다. 라임을 이루는 단어들을 문장의 특정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궂이 랩을 하지 않고 단지 낭독하는 것만으로도 그 반복되는 어미들에 의해 음악적인 리듬과 운율이 형성되어야 한다. 영어권 혹은 인접 굴절어족권 사람들에게 라임이라는 것은 특별히 시 같은 예술적인 형태가 아닐지라도 일상적 언어 생활 속에서 흔히 사용되어진다. 대화를 하면서 재치있게 라임을 사용해 대화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나 광고나 선전문구, 언론매체의 헤드라인 등에서 라임을 사용해 의미전달을 강화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힙합 이외의 노래에서도 라임에 맞춰 가사를 쓴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상 생활 속의 언어적 유희들 또한 랩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직접적인 전통으로 거론되는 몇몇 언어적 놀이을 예로 들어보면, 'Pattin Juba'라는 흑인들의 놀이는 19세기 초부터 유래된 것으로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두번째 사람은 그 음조에 맞춰 자신이 즉석으로 지어낸 가사를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 현대에 들어와서는 도심 흑인 젊은이들 사이에 'Signify' 혹은 'Playing Dozen'라는 것이 많이 행해졌는데 이것은 간접적인 은유, 혹은 말의 숨겨진 의미를 사용해 즉석에서 지어낸 말로 (특히 상대방의 어머니를 욕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놀리는 일종의 언어 게임이었다. 상대방보다 더 영리하고 재치있는 (물론 라임을 사용한) 말로 공격해 상대방이 반격을 못하면 승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현재 행해지는 프리스타일을 통한 배틀 랩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군대에서 행진이나 구보를 할 때 군가에 덧붙여지는 구호나 가사, 교도소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특정의 언어 사용 행태 등도 구술적 전통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라디오 방송 디스크 자키들은 청취율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누가 더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느냐, 누가 더 재치있고 재미있는 말 솜씨를 가졌느냐, 누가 더 나은 진행 스타일을 선보이느냐하는 것은 곧 그들의 밥줄이었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틀어주는 노래의 뮤지션보다 디제이 자신들이 더 스타가 될 때도 있었다. (* 디제이들의 이런 멘트를 Toast라고 한다.) 힙합 발생 초기인 1970년대 말 동네의 블락 파티에서 활약하며 힙합 음악의 터를 일궈냈던 디제이들은 이런 라디오 디제이들의 방송을 들으면서 자랐고 이들의 프로그램 진행과 멘트에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실질적으로도 라디오 디제이들이 내뱉던 클리셰나 멘트를 많이 차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1960년대 흑인인권운동의 지도자였던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그리고 복싱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언행이나 코미디언 리차드 프라이어의 쇼도 랩에 많은 영향을 준 요소들이다. 그들이 말한 내용뿐만 아니라-이들은 모두 이후 흑인사회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들이다-이들이 연설을 하는 동안 구사한 컨트롤-톤의 고저 조절, 호흡의 통제, 말의 정지 또는 내뱉는 속도의 조절-은 상당한 음악적인 테크닉이었고, 그들의 스피치 자체 또한 매우 리드미컬한 것이었다.

    랩에 영향을 끼친 외래적인 언어적 혹은 음악적 요소를 꼽자면 대표적으로 자메이카 음악을 들 수 있겠다. Dub이라고 불리어지는 자메이카 음악 형식은 노래하는 듯 말하는 듯 하는 보컬이 말 그대로 리듬 트랙 위에 더빙되는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것은 힙합이 취하는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한편 올드 스쿨 초기 자메이카 출신의 디제이들과 그들이 틀었던 레게 음악의 영향은 아직도 남아 있고-힙합의 대부 또는 창시자로 불리는 DJ Kool Herc 역시 자메이카 출신이다-또 레개 창법과 결합된 랩은 그것만의 독특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종교의식시 행해지던 주문의 낭송도 구술적 전통의 일부로 들기도 하던데 이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된 바가 없어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힙합이 생겨나기 이전에 랩과 유사한 형태의 보컬을 음악에 도입한 뮤지션들을 한번 살펴보자.

    - Cab Calloway : 1940년대에 활동한 그는 랩이라는 보컬 형식의 전신이랄수 있는 Jive Scat 이라는 새로운 보컬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공연도중 그가 가사를 잊어버림으로써 우연히 탄생한 것인데, 잊어버린 가사의 공백을 채워 넣기 위해 '다디다다 다라다다다~'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음절을 끼워 넣은 것이 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후 그의 주 레퍼토리가 되었다. Calloway의 이런 보컬 임프로비제이션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프리스타일 랩의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형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 Isaac Hayes, Barry White : 1960년대에 등장해 활약한 Stax 레이블의 간판 스타, Issac Hayes는 데뷔 앨범에 수록된 [By the Time I Get To Phoenix]라는 곡에서 18분간의 랩을 들려준다. 배리 화이트 같은 뮤지션도 랩을 음악에 삽입했는데, 그의 느끼한 목소리에 지루하게 길기까지 한 속삭임은 악명 높다. 이런 시도들은 흑인 음악 시장에 랩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음악의 리듬에 맞춘 나레이션에 가까운 것으로 현재의 랩과 같은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 Last Poet, Gil-Scott Heron :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랩 퍼포먼스 스타일을 개발했다. Last Poet는 콩가 드럼의 비트 위에 그리고 Gil-Scott-Heron은 작은 밴드 연주의 리듬을 타고 그들의 시가를 읊조렸다. 그들의 가사는 당시 흑인사회를 주도하던 Black Power Movement 에 동조된 사회비판적이고 저항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이후 올드 스쿨 랩퍼들과 특히 80-90년대에 정치적 메시지를 말했던 랩퍼(ex. KRS-One이나 Public Enemy의 Chuck D 같은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4) Block Party & DJs



    ■ Block Party & DJs : in the beginning...., what was there?

    힙합의 시초는 정확히 언제인가? 무엇으로 시작되었는가?..... 힙합의 시작을 정확히 몇 년부터다라고 못박아 얘기하는 것은 힘들다. '힙합의 4대 요소(그래피티, 브레이킹, DJing, MC잉)...' 하는 식의 개념에서 보자면, '힙합'이라는 사회문화현상은 60년대 말 그래피티의 원시적 형태인 벽서 운동에서 시작되었고, 브라질의 카포에라와 70년대 초 제임스 브라운의 춤에서 영향 받아브레이킹이 생겨나고 등등... 뭐 이런 식의 설명이 되겠는데... 단지 음악적인 면에서만 따지자면 70년대 중반(74년~76년)을 대강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실 '힙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면서 4대 요소를 따지기 시작한 것은 좀 지난 후의 일이다.

    시작의 시기는 말하는 이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지만 그것이 Kool Herc 에 의해 뉴욕의 Bronx 지역에서 생겨났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최초의 힙합의 모습은 단지 젊은이들이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 또는 지역센터에 모여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흥겹게 마시고 노는 소박한 block party였다. 우리말로 하자면 동네 잔치이겠고, 거대 단어를 동원해 의미를 부여하자면 70년대 빈민가의 흑인 혹은 히스패닉 계열 젊은이들이 공유한 유희의 문화가 거리 위에서 통합되어 일어나는 현장이랄까..... 이것은 DJing, Breaking, MCing, Tagging(=그래피티)이 모두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펼쳐지는 젊은이들의 놀이마당이었다.

    가당찮은 발상일 수도 있겠는데, 가끔 나는 이 block party를 음악과 춤, 문학 등 각각 다른 예술형식으로 분화하기 이전의 원시종합예술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기도 한다. 타자에 의해 제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자생적인 문화라는 점, 자발적인 참여와 참여 구성원의 집단적인 유희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 예술적 행위의 주체와 향유의 주체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점, 그리고 예술 행위의 형식들이 별개의 것으로 유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 등은 비록 시대를 달리하지만 두 현장 사이에 같은 맥락을 느끼게 한다. 얼마 못 가 이 소수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문화는 각 영역의 명확한 분리와 함께 자본주의 하의 여타 문화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산업화/대중화되긴 하지만 말이다.

    한편, 이 시기 미국 주류 문화의 코드는 disco였다. 하지만 시내 중심가의 disco 클럽은 빈민가의 흑인 혹은 히스패닉 젊은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꽤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disco라는 음악 자체도 (전 세계의 대중들은 열광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것이었던 듯 하다. 당시 클럽에서 활동하는 많은 DJ들이 있었고 DJ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그들이 트는 것은 주로 차트를 오르내리는 똑같은 최신 disco 음악들이었다. 일반 대중들에 비해 브롱크스 지역은 오히려 anti-disco에 가까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었고 'disco sucks! (disco는 구려!)'라는 것이 disco에 대한 흑인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음악 성향상 disco에 적대적인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들에게 힙합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힙합을 disco의 반동 문화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disco가 득세하던 그 시절, 그 옛날의 블루스처럼, 재즈처럼 어두운 빈민가의 거리 위에서 힙합은 다음 세대의 문화를 이끌고 갈 주류적 흐름의 하나로 서서히 싹을 피우기 시작했다.

    * 잠시 옆길로 새서, 흑인음악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soul/funk - disco - hip hop'이라는 식의 전개를 하는 것이나, disco를 흑인음악에서 음악적 진화 혹은 변천의 연결고리로 삼는 것은 그다지 타당한 것이 못된다. disco는 기존의 흑인 댄스음악(훵크)이 단순화되고 상업화된 그리고 다분히 백인화된 변종 버전의 댄스음악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고 후발 장르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다. 생식력이 없는 노새가 종의 계보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곁가지가 득세하고 결과적으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세상사이다. 단, 같은 disco라도, pure funk에 가까운 음악이 판매 전략에 의해 불가피하게 disco라는 이름으로 홍보되고, 결과적으로, 같이 뭉뚱그려져 분류되는 경우는 구별되어야겠다. (일례: Chic의 'Good Times'와 Blondie의 'Call Me'는 분명히 다른 음악이다.)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듯, 처음으로 힙합의 씨앗을 뿌린 것은 자메이카 이주민인 Kool Herc이었다. 예명인 Kool Herc은 그의 뛰어난 체력과 운동에 대한 재능에서 비롯된-'Kool Hercules(=멋진 헤라클레스)'를 줄인-것이라고. 그는 이전의 흑인 음악(soul, funk 음악)과 자메이카의 레개 음악으로 채운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자신만의 대형 하이파이 스피커로 당시의 disco DJ들과는 차별을 두며 거리의 젊은이들에게 이름을 알려간다. 그가 직접 제작한 이 스피커는 Herculords 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는데, 낮은 bass와 높은 treble의 사운드를 충실히 재현해 냈다고 한다. 저주파 음역대에 대한 극단적 강조와 고음역대의 명료화라는 힙합의 사운드적 특성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그는 두 대의 턴테이블을 사용해 그 위에 같은 판을 놓고 양 턴테이블을 오가면서 판을 앞뒤로 돌려 노래가 없는 간주 부분, 혹은 연주가 전환되는 부분, 또는 감정이 고조되는 극적인 부분만을 커팅해 이어나감으로써 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몇 마디 간주 혹은 클라이맥스 파트의 계속적인 이어짐, 이것은 힙합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음악 단위인 '브레익 비트(Break Beat)'의 탄생이자, 잘라진 구간들의 꼴라쥬를 통한 단위의 반복과 연장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방법론의 발명이었다. (지난 회에 이야기했던, 힙합의 반복되는 리듬의 미학을 상기하시라) 아울러 이것은-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것이겠지만-힙합적인 의미에서의 DJing과 기초적인 개념에서의 힙합 프로듀싱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후 이런 음악적 진행의 메카니즘과 창조에 가까운 음악적 재생산의 방법론은 기술 발전에 따른 다양한 음악 기기의 출현과 그것을 조작하는 DJ들의 테크닉 상의 진보와 함께 더욱 정교화/세련화되어 간다.

    Kool Herc 이후 힙합의 음악적 방법론을 혁신시켜 나간 중요한 인물들로 Afrika Bambaataa와 Grandmaster Flash 가 있다. Kool Herc과 함께 이들은 뉴욕 브롱크스 지역을 삼분하며 원시적 힙합 씬을 주도했던 삼두마차이다. Afrika Bambaataa는 흑인음악 이외에도 락이나 유럽의 댄스음악 혹은 원시적 전자 음악 (이를테면 독일의 Kraftwerk 같은) 음악도 그의 플레이리스트에 끼웠었는데, 이런 점은 힙합으로의 타 장르의 융합과 용해라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씬서싸이저 테크놀로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것을 힙합에 결합시킨 새로운 시도는 'Planet Rock'이라는 클래식과 함께 일렉트로(electro) 혹은 일렉트릭-훵크(electric funk)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일구어냈다. 'Planet Rock' 의 충격은 거의 모든 올드 스쿨 힙합 뮤지션들을 강타했고, 올드 스쿨 힙합의 경향은 그를 쫓아 electro로 흐르게 된다. 그의 음악은 80년대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났던 미국 초기 Techno 씬과 Miami Bass, House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한편 80년대 중반, 그는 흑인중심주의적인(afro-centuric) 음악과 흑인적 정체성의 확립,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정신적 태도를 중시하는 음악 집단인 네이티브 텅 패밀리 Native Tongue Family (A Tribe Called Quest, De La Soul, Jungle Brothers, Black Sheep 등이 소속됨)를 결성하기도 한다. 자신의 음악은 거의 테크노적인 경향으로 전도돼 가는 와중에 그런 성격의 아티스트 집단을 형성한 것은 좀 아이러니한 사실이기도 하다. 90년대 초반의 A Tribe Called Quest와 동시기 Bambaataa의 음악을 비교해 들으면서 아연실색했었던 기억도...

    턴테이블을 통한 브레익 비트의 커팅과 더불어 힙합 역사상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은 스크래치라는 새로운 사운드의 발견인데, 그것은 Grand Wizard Theodore 라는 DJ의 우연한 실수에 의한 것이었다. 어느 날 씨어도어는 비닐 판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가 그의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려다 본의 아니게 실수로 앞뒤로 비닐판을 움직이게 되었는데 이때 바늘과 비닐판 사이의 마찰음이 스피커로 증폭되어 나오게 되었다. 이 소리를 근사하게 여긴 그는 몇몇 파티에서 이를 선보이고 스크래치라는 새로운 테크닉은 DJ 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누가 뭐래도 올드 스쿨 씬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DJ는 Grandmaster Flash였다. Kool Herc이 힙합의 컬럼버스라면 그는 힙합의 에디슨이었다. 그에 의해 DJing(mixing+scratching)의 기본적 뼈대가 완성된다. 고등학교에서 전자공학을 배운 그는 DJing에 쓰이는 믹서를 직접 고안했다. 스위치를 좌측에 놓으면 좌측 턴테이블의 소리만, 우측에 놓으면 우측 턴테이블의 소리만, 중앙에 놓으면 양쪽의 소리를 모두 On 시키는 스위치(즉, 크로스훼이더)를 부착하고, 이것의 조작을 통해 헤드폰으로 Off된 쪽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는 브레익 비트의 구간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서 플레이 할 수 있었다.

    스크래치 사운드를 발견한 것은 Grandwizard Theodore였지만, 이를 본격적인 DJing의 테크닉으로 도입하고 완성시킨 것은 역시 Grandmaster Flash였다. Flash가 발표한 7분이 넘는 대곡, 'Adventures Of Flash On The Wheels Of Steel'은 funk, soul, disco, rock 등의 유명 곡들을 솔기없이 믹스한 것에 맛깔난 스크래칭까지 삽입한 올드 스쿨 DJing의 대표곡이다. 그는 이런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스킬과 테크닉으로 다른 DJ를 추월, 선두에 서며 많은 관중들을 불러 모았고, 당시의 명성과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힙합 사를 통틀어서도 추앙받는 거물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Flash에 이르러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이루어진다, 힙합 생성 당시의 MCing, 즉 랩은 관중의 반응을 유도하고 흥을 돋구기 위해 브레익 비트 중간 중간에 얹혀지는 추임새 혹은 여흥구 같은 것으로 매우 단순하고 초보적인 형태였다. (나이트클럽의 DJ들이 음악 사이사이에 멘트를 끼워 넣는 것과 마찬가지) 초기의 DJ는 이렇게 랩까지 겸했었는데, Flash는 그룹 Furious Five 를 결성, 랩을 대신할 전임 MC를 고용, DJing과 MCing을 분업시킨다-이 때가 78년. 이로써 MC잉과 DJing은 각각의 전문적인 고유 영역으로 분리되는 한편, 파티의 주역이었던 DJ들은 무대 뒤로 물러서고 MC들이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며 힙합의 MC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Grandmaster Flash & Furious Five 이후 속속 전업 MC를 갖춘 그룹들이 나타난다. Grand Wizard Theodore & the Fantastic Five, DJ Breakout & the Funky Four (->이후 여성 MC Sharock 을 추가해 Funky Four Plus One 으로 개칭), Treacherous Three (->Kool Moe Dee가 리더로 한동안 재적했음), Cold Crush Brothers(->Jurassic 5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올드 스쿨 그룹) 등이 당시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그룹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MCing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면서 랩핑의 스킬은 DJ에 의해 겸업되던 이전에 비해 빠른 속도로 발전되었고, 단순한 여흥구에서 벗어나 전업 MC들이 보여주는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적인 스킬과 보다 비쥬얼한 퍼포먼스는 더 많은 관중을 유인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였다. DJing과 MC잉의 병행 발전에 맞물린 씬은 이후 탄탄하게 확장되어간다. 다같이 즐기고 노는 거리의 파티 문화에서 힙합은 어느덧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퍼포먼스 아트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다.

    잠시 논외의 (그러나 매우 핵심적인!) 얘기로 이번 이야기를 마치겠다. MC들이 각광받고 부각되는 시간들이 80년대, 90년대를 거쳐오며 오랜 동안 지속된 만큼, 그에 대조적으로, 일견 DJ의 역할은 상당히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MC들이 각광받는 시대이고 MC 지망생들이 넘쳐 나는 시대다. 요즘 메인스트림 힙합 씬의 무대 위에 (심지어 락이나 팝 댄스 음악에도) DJ가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무대 위의 악세서리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 가수나 랩퍼들의 립 싱크에도 가는 시선이 곱지 않은데, 턴테이블 위로 바늘이 미친 년 널 뛰 듯 하는 DJ들의 우스꽝스런 '핸드 싱크'를 봐야하는 작금의 상황은 가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하지만 동네 잔치에서 시작한 처음부터 힙합 앨범들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는 오늘날까지, 힙합의 음악적 뼈대 형성과 성장의 추진력이 되어 온 것은 DJ들이다. 그저 단순한 파티 DJ에서 시작해 그들이 뮤지션으로 환골탈태하는 과정은 힙합이 자신만의 고유한 장르적 정체성을 획득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음덕(蔭德)'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적절할 것이다. DJ들의 음덕..... 그럼 이제 앞서 부제로 써 놓은 질문에 대답해보자. '태초에..... 무엇이 있었나?' 대답은 : 'DJ들이 있었다'이다
    (Respect to all the underground Hip Hop DJs out there doing their things!)



    (5) Sugarhill Era('79-'84)



    ■ Sugarhill Era('79-'84)

    70년대 말에 이르러 힙합을 하는 뮤지션과 함께 힙합을 즐기는 관중들의 수도 점차 늘어났고, 지역적으로도 Bronx를 벗어나 뉴욕 중심 Manhattan에 위치한 클럽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힙합이라는 거리의 음악이 수백~수천만 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뮤직 비지니스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힙합이 가진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기민하게 대응한 것은 Sylvia Robinson이었다. 그녀는 1970년대 초 Motown 레이블에서 'Pilow Talk'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키기도 한 여성 soul 싱어로 70년대 말에는 여러 개의 인디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계기로 힙합 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녀는 당시 피자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Mighty Force MCs와 Cold Crush Brothers의 매니져를 맡아보던 Henry Jackson과 접촉한다. 힙합 그룹을 만들어 음반을 발매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냐는 Sylvia의 제안에 Jackson은 동의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매니지하고 있던 뮤지션들에게 넘기지 않고, 대신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그룹을 급조하여 직접 Sylvia의 새 레이블과 계약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힙합 레이블 Sugar Hill Records와 최초의 랩 음반이라는 'Rapper's Delight'의 주인공, Sugar Hill Gang이 탄생하게 된다. (* Sugar Hill 이라는 이름은 뉴욕 할렘 지구에서 흑인 중산층이 모여 살던 지역의 이름이다)

    만일 Jackson이 매니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최초의 랩 레코드는 Sugar Hill Gang이 아니라 Mighty Foce MCs나 Cold Crush Brothers의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Rapper's Delight'의 가사는 이 두 그룹 엠씨들의 라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라고 한다. Cold Crush Brothers의 MC였던 Grandmaster Caz는 그의 라임 노트를 Jackson에게 넘겨주면서 '니가 성공하면 우리도 밀어 주겠지'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Chic의 funk 트랙 'Good Times'를 차용한 비트에 남의 라임을 그대로 베껴다 쓴 가사, 어느 것도 자신의 것으로 시작한 것이 없는 다소 우스운, 그리고 배신이라면 배신이랄 수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 위에서 힙합은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다.

    이것이 최초의 랩 레코드냐 하는데는 약간 논란이 있다. funk 밴드인 Fatback Band 가 'Rapper's Delight'의 발매 몇 주전에 내놓은 'King Tim III'라는 노래에 랩이 이미 실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힙합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funk를 해오고 있던 밴드가 rap이라는 보컬 형식을 잠시 차용한 형태에 더 가깝기 때문에 실제적인 최초의 랩 레코드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래서 최초의 힙합 레코드하면 보통 'Rapper's Delight'을 꼽지만, 그중 어느 것이 최초의 랩 레코드가 되었든 그것이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진행되던 힙합 씬 자체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는 사실 힘들다. 상기한 바와 같이 Sugar Hill Gang은 현장에서 활동하던 기존 뮤지션이 아니라 계약을 위해 의도적으로 급조된 그룹이었고 노래의 가사나 비트 또한 자신들의 것을 담은게 아니다. 당시 현장에서 힙합 씬을 이끌어 가던 인물들은 Sugar Hill Gang이 아니라 Grandmaster Flash, Afrika Bambaataa, Funky 4 + 1, Cold Crush Brothers 같은 이들이었다. 일례로 당시 라디오를 통해 노래를 들은 Grandmaster Flash는 '도대체 이 놈들은 누군데 우리가 해 온 것을 하고 있고 우리보다 별로 나을게 없는 음악을 라디오를 통해서 내보내고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Rapper's Delight'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일 최고 판매량 7만5천장, 그리고 R&B 챠트 4위, 팝 챠트 36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이 새로운 종류의 음악이 종일 흘러나왔다. 이것을 계기로 랩 음악은 본격적인 음반 시장에의 진입을 선언한 셈이다. 'Rapper's Delight'은 도화선 역할을 하며 두가지의 의미로 기존 현장의 힙합 씬을 자극했다. 첫째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풋내기 아마추어들이 자신들을 제치고 음반을 냈다는 점 (ex. 위의 Grandmaster Flash의 사례), 둘째는, 랩이 음악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해 주었다는 것이다. 누가 랩 뮤직이 팝 챠트에 오르리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마치 관광 버스용 뽕짝 테이프가 가요톱10에 오르는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Rapper's Delight'의 1979년 10월 발매 이후, 1980년 초까지의 몇 달 동안 기존 올드 스쿨 힙합 뮤지션들의 데뷔 싱글 발매가 줄을 잇는다. 대충 나열해보면 : Kurtis Blow의 'Christmas Rappin'', Afrika Bambaataa의 'Zulu Nation Throwdown', Luvbug Starski의 'Gigolette',Funky 4 + 1의 'Rappin' and Rockin' The House', Grandmaster Flash의 'Superrapin''.

    'Rapper's Delight'이 힙합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이 노래가 (이 노래가 만약 없었다면) 이후 일어나지 못할 것들을 일구어 낸거 같은, 필요 이상의 과다한 의미 부여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즉, 올드 스쿨 씬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년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고, 이 기간 동안 음반 산업으로 진입할 역량은 충분히 쌓여 왔다는 것이다. 수 개월의 짧은 시차를 두고 이렇게 싱글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이미 씬은 물이 오를대로 오른 성숙한 상태였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조건과 상황적 맥락은 이미 조성된 상태에서 과연 누가 먼저 제대로 불을 붙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상황은 마치 십이지의 전설과 비슷하다. 소의 등을 타고 온 쥐가 골인지점을 앞두고 소의 등에서 뛰어 내려 열두가지 띠의 제일 앞에 서게 된 것과 같은....

    씬의 잠재력을 눈치채고 Sugar Hill 레코드의 사장 Sylvia Sylvia은 기민하게 대응했고, 비지니스는 성공했다. Sugar Hill Gang의 성공에 힘입은 Robinson은 당시 Enjoy 레이블에 소속됐었던 거물급 올드스쿨 뮤지션들을 영입하기 시작한다. 기존 뮤지션들은 처음, Sugar Hill Gang의 데뷔에 코웃음을 쳤지만 그들이 성공하자 상황은 역전된다. 얼마 안가 몇몇 뮤지션을 제외한 대부분의 올드 스쿨 스타들을 보유하며 Sugar Hill은 84년까지 올드 스쿨 힙합 씬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한다.


    80년 초 Grandmaster Flash & Furious 5는 Enjoy 레이블을 떠나 Sugar Hill 레이블로 이적해 'Freedom'이라는 싱글을 발표한다. 이후 'The Advantrues Of Grandmaster Flash On The Wheels Of Steel'('81), 'Message'('82), 'New Your, New Your'('83), 'White Lines'('83) 등 올드 스쿨의 클래식들을 히트시키며 Sugar Hill Gang을 제치고 레이블의 간판 뮤지션으로 부상했고, 올드 스쿨 씬을 통틀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꼽히게 된다. 'The Advantrues Of Grandmaster Flash On The Wheels Of Steel'은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올드 스쿨 디제잉의 바이블 격인 곡이고, 'Message'는 흑인 사회의 현실을 랩을 통해 고발한 곡으로 랩에도 심각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83년 해체후 Grandmaster Flash 는 Sugar Hill과의 소송 끝에 랩퍼 Kid Creole을 데리고 일렉트라 레이블로 이적했고, Melle Mel 등 잔류 멤버들은 Furious 5라는 이름으로 계속 활동했지만 이전과 같은 성공은 여의치 않았다. 갈려진 두 패거리 모두 실패를 맛보았고, 이것은 Sugar Hill 레이블의 쇠락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Funky 4 + 1 역시 Enjoy 레이블에서 Sugar Hill로 영입되어 활동한 뮤지션이다. 특이하게도 홍일점 여성 멤버가 포함된 이들은 'Do You Wanna Rock', 'That's The Joint' 같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Enjoy 레이블에서 이적한 또 한 그룹으로 Treacherous 3 가 있다. 원래 이들은 4인조로 Enjoy 레이블 사장의 조카였던 Spoonie Gee 와 함께 활동했었는데 그가 솔로로 독립하면서(축출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3인조 진용으로 Sugar Hill로 이적했다. 'New Rap Language', 'Yes We Can Can', 'Feel The Hearbeat' 같은 곡이 그들의 대표곡이다. Spoonie Gee도 곧 Sugar Hill로 이적해 왔고, 여성만으로 구성된 3인조 그룹 Sequence와 함께한 [Monster Jam]과 솔로곡인 [Spoonie's Back]을 히트시켰다.

     

    이렇게 활발한 아티스트들의 활동으로 유지되던 Sugar Hill의 전성시대는 83년까지 계속되다가 84년을 전환점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메이져 레이블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규모 인디 레이블도 아닌 어중간한 규모를 유지하던 Sugar Hill은 메이져와 군소 인디 레이블 양쪽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한다. 랩 음반 시장에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한 메이져 레이블들은 후한 몸값을 제시하며 거물급 아티스트들을 유혹했고 Sugar Hill은 이로부터 아티스트를 지켜내야 했다. 그러나 Sugar Hill의 재정은 아티스트의 몸값 경쟁에 참여할 만큼 넉넉치는 못했다. (결국 Flash를 Elektra에 뺏기지 않았는가....) 한편 Sugar Hill 은 새로운 트렌드와 신진 아티스트들의 발굴에 민감한 인디 레이블의 젊은 기업가(ex. Def Jam의 Russel Simmons)들에 대항할만한 경쟁력 또한 약했다. 게다가 Sugar Hill은 지금 있는 아티스트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지 Sugar Hill의 문을 두드리는 신인들에게 무관심했고 Run DMC같은 신진세력에게는 적대적인 태도까지 가졌었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려는 태도와 창의력의 부재는 결국 현상유지조차 힘들게 했고, 서서히 도태의 길을 걷다가 85년 재정적인 문제에 부딪혀 결국 Sugar Hill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글: zenn

    출처:
    http://cafe.daum.net/hiphopclassic (다음의 힙합명반 카페)
    http://www.hiphopbug.com (힙합버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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