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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힙합, 혐오, 표현의 자유, 그리고 그 다음 (출처 리드머)
    힙합 아카이브/랩 2016. 1. 30. 02:37

    원문: http://board.rhythmer.net/src/go.php?n=16741&m=view&s=feature

     

    힙합, 혐오, 표현의 자유, 그리고 그 다음
    남성훈 작성 | 2016-01-25



    글: 남성훈



    변화무쌍한 사회적 책임의 두 코드 불쾌감’, ‘관심도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용어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용어다.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의무' 정도의 뜻이다. 하지만 그 범위와 맥락은 매우 변화무쌍하다. 현대 사회의 성격과 구성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은 주로 거대 기업에게 강력하게 요구된다. 끊임 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글로벌 기업이 등장하고 사회 안에서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이익을 챙기면서 그 요구는 점점 강해지고 구체화됐다.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면, 사회가 직접 경영의 투명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구성원인 노동자에게 합당한 혜택이 돌아가고, 환경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제는 많은 부분이 법제화되어 필수 준수사항이 되었지만, ‘사회적 책임의 큰 비중은 법적 영역 밖에 있다. 단순히 법을 지키며 돈을 벌기만 하는 기업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법을 떠나 사회가 불쾌감을 느끼느냐 마느냐에 따라 책임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불쾌감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한다. 현재 인종차별적 은유를 담은 광고를 하는 기업은 절대 살아남지 못하게 됐다. 반면 여성비하 뉘앙스를 풍기는 광고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점점 이를 사회적 책임의 시선에서 비난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는 식이다. 물론, 그 적용대상과 범위는 사회의 관심도와 인식에 따라 자연스레 변하는데, 그렇기에 작은 기업이 성장했다면, 법의 준수를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달성하는 데에 큰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관심이 몰리기 때문이다.

     

    법의 영역을 넘어선 사회적 책임을 이해하기 위한 두 코드는 바로 불쾌감 관심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큰 흐름은 거대기업이 아동,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등,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배려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든 차별하거나 비하하는 행태를 보이진 않는지 주시하는 것이다.

     

    대중문화예술계에서 보다 확장된 사회적 책임의 시대

     

    더불어 대중문화예술을 이끌어가는 이들에게도 사회적 책임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 역시 또 하나의 큰 흐름이다. 이는 사실 거대 기업에게 점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맥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스타들은 사회 안에서 부와 명성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이기 때문에 기업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그 결이 다르다. 앞서 말한 사회 환원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가 첫 번째 책임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대중 개개인의 의지와 큰 상관없이 보여지는 스타가 사회적 약자를 다루면서 불쾌감을 유발한다면 그 강도는 더욱 커진다. 관심도가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패턴은 최근 힙합 아티스트에게 아주 빈번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유야 뻔하다. /힙합 안에서 여성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를 부적절하게 다루는 표현이 매우 빈번했고 현재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응 역시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랩퍼들은 자신의 가사가 사회에 불편함을 주고 있다는 비난에 더는 쉽게 무대응으로 일관하거나 반박하지 못한다. 사회의 인식이 변했음도 물론이고, 미디어와 레코드사가 사회에 불쾌감을 주는 이를 지원하면 사회적 책임의 부재를 이유로 사업에 치명타를 받아 해당 아티스트까지 큰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일례로 여성을 약에 취하게 만들어 강간하는 암시가 담긴 가사를 쓴 릭 로스(Rick Ross)와 여성 폭력 뉘앙스가 담긴 가사를 쓴 리치 호미 콴(Rich Homie Quan)이 즉각적으로 사과를 하고, 사과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이자 재차 사과를 한 것만 봐도 체감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빗댄 표현을 사용한 제이콜(J. Cole)과 공연에서 동성애자 비하 단어인‘Faggot’을 사용한 트래비스 스콧(Travis Scott) 역시 즉각적으로 사과했다. 그들 모두 사과에 곁들여 진의가 아님을 적극 호소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그들의 진의나 표현의 맥락이 어떠했는가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비난의 수위와 예술적 맥락과 성취 역시 하등의 관계가 없다. 이 둘을 섞어서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과연 사회적 약자가 불쾌감을 느꼈느냐 아니냐라는 사실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힙합 속 폭력성, 선정성, 여성 비하, 동성애 혐오 등의 배경과 문제점을 다룬 다큐 'Hip-Hop: Beyond Beats and Rhymes'의 한 장면

     


    사회적 약자가 느낀 불쾌감에 대해 진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맥락을 파악해라.”라는 식으로 억누르는 것은 이제껏 사회에서 그들이 취급 당한 역사의 연장일 뿐이다. 물론, 힙합 안의 여성비하 표현이 왜 빈번한지 설명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해당 장르와 문화의 배경을 알기 위한 설명 자체로 존재한다면 모를까, 비판에 대한 일차적 해명,혹은 반박의 근거로 쓰이는 건 부적절하다. 혹자는 단순히 장르문화나 아티스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쉽게 대중의 무지함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기업의 광고 예를 들었듯이 북미에서는 인종차별적 표현이나 아동성애, 사회적 약자를 향한 범죄 등등, 사회 안에서 금기시되는 표현에 누구도 쉽게 그런 식의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사회가 성장할수록 이 같은 부분을 향한 비난과 책임요구의 범위 및 강도가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상황은 좀 다르다. 일부 대중은 물론, 심지어 문화평론가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이 같은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모호하거나 무책임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 아이유의 제제 논란을 들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아이유의 사과는 (진정성 여부를 떠나) 현재 한국대중음악계의 스타 가수가 사회적 불쾌감에 대해 표할 수 있는 적합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정작 많은 평자들은 표현의 자유나 작가의 진의를 애써 설명하며, 사회적 불쾌감을 조롱하고 교조적 자세를 취하여 실소를 유발했다. 그야말로 촌극이 따로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억압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 이쯤에서 지금 발생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 몇 가지 오해에 관해 짚고 넘어가보자. 먼저, 이런 흐름이 “(랩퍼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예술적 행보를 해한다.”는 지적이다. 이런 지적은 애초에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자유의지로 표현된 것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랩퍼 중 그 누구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하지 않는다. 사회적 책임 요구에 대한 모든 논의는 표현 이후, , 표현에 따른 책임에 대한 문제다. “비난을 받으면 추후 자기검열 때문에 결국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지적도 맞지 않다. 과거 부당한 법규나 공권력에 의해 억압받은 탓에 강제로 검열당하거나 어쩔 수 없이 자기검열을 거친 작품이 나오곤 했던 역사를 오늘날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행위와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불매운동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망친다는 궤변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사회가 제기한 문제제기나 비난에 대응해 사과를 하느냐 마느냐, 혹은 자기검열을 하느냐 마느냐 역시 온전히 창작자의 자유다. 쉬운 예로 칸예 웨스트(Kanye West)는 파킨슨병 환자를 조롱하는 듯한 가사를 써서 엄청난 비난을 들었지만, 별다른 사과를 하지 않았다. 물론, 사회마다 창작 집단이 감당해야 할 부담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한다. 한국 힙합 시장에선 아직 이러한 논란이 실질적인 활동이나 경제적인 제약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지 않아 아티스트에게 부여되는 부담감이 매우 가벼운 편이다. 최근 “Indigo Child”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여성비하, 실명을 거론한 성희롱, 치매환자비하 등등, 물의를 일으킬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고,다른 랩퍼를 공격하기 위해 아직 사회적으로 상처가 여물지 않은 세월호 건을 언급한 블랙넛이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이를 잘 대변한다.  


     

     

    솔직히 난 키디비 사진보고 딸 쳐봤지 물론 보기 전이지 언프리티 / 씨잼이 너흴 너무 높게 봤어, 너흰 국힙 여초딩 / 참 잘해 포장 없는데 있는 척, 김치녀의 젖보다 내가 대단한 게 아냐, 내가 튀는 것도 아냐 / 감추지마 니 진심 치매 걸린 노인 똥구녕처럼 drop your shit easy / 니가 진짜 걱정하는 건 추락하는 니 위치지 아니잖아 세월호의 진실이

    - "Indigo Child" 

     

    랩퍼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4]에 나온 송민호의 여성비하 라인이 이례적으로 적극적 사과로 이어진 것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송출됐고, 산부인과협회의 강한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회는 좀 더 대중음악에서 표현을 깊숙이 바라보고, 아티스트는 시대의 흐름을 인지한 상태에서 사회적 위치를 충분히 고려하여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의 범위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력 힙합레이블 소속에 방송, 광고에까지 등장하는 블랙넛은 표현의 자유에 기반한 창작의 스탠스는 유지하더라도 최소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움직임이 채 여물지 않은 한국의 상황 덕에 혐오성 가사로 비정상적인 혜택을 누린다는 자기인식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음악적 평가와 사회적 책임 요구는 별개의 영역이다.

     

    다음으로 짚어야 할 오해는 비하표현 가득한 과거의 힙합 걸작들 좋게 평가하던 사람들이 흐름에 편승한다.”는 류의 지적이다. 우선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문제적 가사를 담고 있는 힙합 걸작들 대부분이 발매됐을 당시에도 언제나 이 같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흐름은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과 다른 현실이 있었을 뿐이다. 최근 동명의 영화로 재조명된 N.W.A의 걸작[Straight Outta Compton]이 나왔을 당시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는 단순히 백인기득권과 흑인사회의 갈등을 급진적 음악으로 풀어낸 것으로 그렸지만, 사실 당시에 그들을 향한 논란과 보이콧은 힙합 커뮤니티, 더 넓게는 흑인 사회 내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폭력적이며 선동적인 가사와 잘못된 여성관이 흑인사회에 대한 편견을 가중시킨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흑인사회의 개선을 위해 힘쓰던 당대 지식층은 이런 내용의 가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걸 충분히 골칫거리로 여겼으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편견을 가중하여 흑인사회에 억압을 가져다 주는 여러 법안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여겼다. 음악 시장을 뒤흔든 폭발적인 영향력이 가져온 부작용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예였다. 더불어 같은 앨범을 두고 억압에 초점을 맞춘 백인 우파의 움직임과는 다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폭발적인 흥행과 높은 음악적 평가 때문에 그 목소리는 커지지 못했다. 아티스트들도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는 자의식이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앞서갔다. 아이스 큐브(Ice Cube) 남녀가 대등해지면 (사회가) 분열된다.”라는 답을 할 정도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대답이 랩퍼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던 시대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N.W.A의 앨범이 여전히 걸작으로 남았다고 해서 창작자, 혹은 당시의 평론가가 승리했다거나 논의를 일으킨 이들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2010년대 이후 불거진 불특정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는 가사 수준의 사회적 합의나 스타 랩퍼의 현실인식을 장착시킨 긴 노력의 시작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런 논의를 일으키고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 이들이 타깃으로 삼았던 앨범이나 랩퍼의 음악적 성취를 부정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했기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더 적극적으로 개진한 것이다. 별다른 음악적 성취가 없었거나 인기가 없던 이들은 아예 대상 자체에 오르지도 않았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지금과 달리 작은 목소리였다는 이유로 사회적 요구의 흐름을 적절한 선에서 전달치 못한 평단이 더 안이했던 셈이다. 평가의 시선은 감상에 영향을 주기에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순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음악적 평가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는 분리되어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전설적인 랩퍼들이 과거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한 가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해명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지닌 음악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쓴 가사가 사회에 무방비로 풀렸었고, 그것을 통해 큰 돈을 벌고 사회적인 명성을 얻었다.근데 그랬다면 내 가사가 초래한 부정적 영향을 더 살피고 신중했어야 했다.”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여전히 힙합 대 여성, 혹은 힙합 대 사회적 약자와 대결인 양 한 쪽 편을 들 수 없다.”라는 황당한 말을 한다거나, 사회적 불쾌감에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향해 힙합은 원래 비하가 많은 음악이니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식의 설명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다.



     


    랩퍼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정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모든 가사에 광범위한 윤리나 준법의 기준을 적용시켜 쟁점을 확장하고, 위선자로 몰아가려는 접근에 관해 얘기해보자. , 비난하려면 모든 것을 비난하라는 식이다. 대표적인 예로 범죄를 그리는 랩이나 공격적인 태도로 살인 위협을 하는 랩 가사가 약자 비하보다 좋은 게 뭐냐는 물음을 들 수 있겠다.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앞선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다. 사회적 책임 요구는 법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사회가 받은 불쾌함 관심도에 따라 큰 영향을 받고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사실 말이다. ‘널 내 총으로 쏴 죽일 거야.’ 계집애 같은 널 내 총으로 쏴 죽일 거야.’는 같은 살해협박이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비하했기에 반응은 전혀 다를 것이다. 범죄,욕설, 비하표현, 폭력 등을 그리는 것도 노인, 장애인, 병자, 여성, 아동 등등, 보편적 기준에서 약자로 분류된 이들을 향하고 있다면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만약 어차피 윤리적으로 안 좋은 것인데 다 똑 같은 것 아니냐?’라고 반론한다면, 그들이 시대에 맞는 사회인식을 가지지 못했거나 반대로 너무 앞서간다고 웃어 넘길 수밖에 없다.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랩 가사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인종차별적 단어인‘nig#a’가 좋은 예다. 사회적 불쾌감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흑인 비하 단어이지만, 흑인 랩퍼가 사용할 땐 사회적인 불쾌감이 약하다. 그러나 백인이 흑인에게 사용했을 때는 어마어마하게 부정적인 파급력을 갖게 된다. ‘bit#h’ 역시 힙합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단어다. 이 둘은 단순히 가사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비난이나 사회적 책임 요구를 마주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화자(여성이 직접 사용 등)와 상황에 따른 암묵적인 합의선이 그어지고 있고, 확실한 것은 시대에 따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성숙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당장 이 단어들이 쓰인 가사를 몽땅 다 가져와서 힙합은 원래 그런데 어쩌라고? 힙합 듣지마.”라고 말한다면, 현실인식이 너무나 부족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수많은 랩퍼가 비하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유명 랩퍼만 공격 당한다는 푸념도 어쩔 수 없다. 바로 사회적 관심도의 차이 때문이다. 누구나 어떤 표현도 자유의지로 할 수 있다. 다만 사회가 갖는 불쾌감은 노출도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에 대한 책임 요구 역시 집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아직 사회적 약자가 갖는 불쾌감의 목소리에 더욱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줘야 하는 사회이고, 랩 가사에 대한 논쟁도 창작자와 관련 기업부터 이를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기업을 넘어 점차 대중문화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고, 특히, 몇몇 사건들을 통해 랩 가사에 대한 논란이 계속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어서인지 섞지 말아야 할 가치들을 섞는 궤변이 너무 많다. 지금의 쟁점은 예술의 표현에 대한 억압이나 광의의 윤리, 위선의 영역에서 논해야 할 사항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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