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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이 30년 대를 이어 흑인 힙합 “성지” 일구다 (이경민 기자)
    힙합 아카이브/힙합 2015. 9. 10. 12:43
    한인이 30년 대를 이어 흑인 힙합 “성지” 일구다
    [LA중앙일보]    발행 2015/08/20 미주판 3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힙합 음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인 커크 김씨.

    화제 영화 “스트레이트…” 주인공 N.W.A 등

    뮤지션 성장 무대 캄튼 “사이커델릭 레코즈” 커크 김

    고인된 부친에게 "파파"라 불러

    그 청년들이 폭동 때는 막아줘

     

    신인들 "CD 팔아달라" 찾아와

    요청 들어주니 가게 홍보 절로

     

    온라인 판매로 각국 단골 생겨

    저소득층 돕기 등 봉사활동도

      

    커크 김씨와 "사이커델릭 레코즈"스태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스트레이트 아우터 캄튼(Straight Outta Compton:이하 SOC)"이 폭발적인 흥행 몰이 중이다.영화 SOC는 80년대말 흑인밀집 빈민지역인 사우스LA 캄튼 지역에서 태동했던 갱스터랩 그룹 N.W.A.의 전기 영화다. 영화 제목은 이들의 데뷔 앨범에서 따왔다. 

     

    이 분위기를 타고 새삼 재조명되고 있는 곳이 있다. 캄튼 시티 쇼핑 센터에 위치한 “사이커델릭 레코즈(Cycadelic Records)”라는 음반 가게다. 얼핏 비좁고 허름해 보이지만 “사이커델릭 레코즈”는 캄튼 지역 흑인 커뮤니티와 힙합음악 팬들 사이에선 “성지”로 꼽힌다. “스트레이트 아우터 캄튼”의 주인공인 N.W.A를 비롯, 수많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이곳을 거쳐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퍼스타가 돼 있는 캄튼 출신 뮤지션들이 어린 시절 처음 만든 데모 음반을 들고 제일 먼저 찾아 오곤 했던 곳이 여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들의 첫 창작물을 팔아주며 세계적 뮤지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해줬던 셈이다. 

     

    # 한인 부자, 캄튼의 전설이 되다 

     

    현재 “사이커델릭 레코즈”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은 한인 2세인 커크 김(38)씨.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김완준씨의 뒤를 이어 2대째 가게를 이어받았다. LA폭동의 진원지이자 흑인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던 캄튼 지역에서 한인 부자가 30년 가까이 한 음반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희귀한 경우다. 2012년 LA타임스가 “갱스터랩의 탄생을 도운 한국인”이라는 내용으로 아버지 김완준씨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북출신으로 1976년 도미했던 김완준씨는 1985년부터 캄튼에서 “사이커델릭 레코즈”를 운영했다. 우연히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인 친구를 통해 음반 도매업자를 소개받아 시작하게 된 일이다. 커크씨도 두 누나와 함께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 차를 타고 도매상에 함께 가던 기억이 선해요. 아버지는 힙합 음악에 대해 전혀 모르셨지만, 늘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애쓰셨어요. 함께 음악도 듣고 가사도 해석해드리면서 그런 아버지를 도왔죠."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타겟이나 월마트 같은 대형매장도 없어서 음반 가게가 잘 되던 시절이었다. “사이커델릭 레코즈”는 특히 캄튼 출신 뮤지션들에게 너그러웠다. 

     

    "아버지는 직접 만든 음반을 팔아달라고 가져오는 동네 아이들을 내치는 법이 없었어요. 몇 장이라도 사서 진열해주곤 하셨죠. 대신 아이들은 주변에 저희 가게를 널리 알려줬고요. “사이커델릭 레코즈”는 그렇게 유명해졌습니다." 

     

    모든게 디지털 음원으로 바뀐 시대지만, “사이커델릭 레코즈”엔 아직도 하루 2~3명씩 신인들이 CD를 들고 찾아 온다. 쉽게 팔릴 리 없는 CD지만 커크 김씨도 아버지를 따라 그들의 음반을 구입해 대신 판매해준다. “사이커델릭 레코즈”가 캄튼의 성지, 힙합계의 전설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 캄튼판 “레 미제라블”을 쓰다 

     

    90년대까지 남가주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악명높았던 캄튼 지역에 자리한 만큼, “사이커델릭 레코즈”에도 위기의 순간은 많았다. 인근에서 패싸움이 나거나 총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갱단 “블러드”와 “크립스” 단원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저희가 라이벌 갱단을 상징하는 색의 옷을 입고 있으면 “당장 벗으라”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어요. 그래도 직접적인 해를 끼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다들 아버지를 “파파”라고 부르며 따랐거든요. LA폭동 때도 그들이 먼저 나서서 가게를 지켜줬다더라고요." 

     

    김완준씨는 거리를 배회하며 도둑질을 일삼던 흑인 청소년들에게도 늘 따뜻한 손길을 내밀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속 한 장면 같은 에피소드도 있다. 

     

    "얼마 전 온 몸에 문신을 한 거구의 흑인 한 명이 가게 주변을 서성이다 아버지 안부를 묻더라고요. 자초지종을 묻자, “12살 무렵 이 가게에서 음반을 훔쳐 달아나다 경비원에게 걸려 경찰서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왜 그랬냐” 묻길래 “그냥 갖고 싶었다”고 솔직히 얘기하자 등을 다독여주며 “다음부턴 그냥 나에게 얘기하렴”하고 용서해 준 적이 있다. 얼마 전 범죄를 저질러 감옥 독방 신세를 지던 중 후회와 함께 아저씨의 따뜻한 미소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꼭 한번 다시 뵙고 싶어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제 앞에서 많이 울다 갔어요." 

     

    사실 커크 김씨도 “사이커델릭 레코즈”를 접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처음 가게 문을 열었던 캄튼 패션 센터가 올해 초 문을 닫으면서, 길 건너편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야 했던 때엔 특히 그랬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가 그립다고 찾아오는 단골들 때문에라도, 커크 김씨는 가게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 사업을 계속할 거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그의 대답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힌다. 

     

    # 캄튼의 새로운 시대를 열다 

     

    커크 김씨는 최근 “사이커델릭 레코즈”의 새로운 시대를 열였다. 음반 뿐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티셔츠, 모자 등 머천다이징의 비중을 늘렸고, 아마존과 이베이 등을 통해 온라인 판매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시절엔 시도해보지 못했던 영역을 개척해 새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덕분에 독일, 헝가리, 일본 등 세계 곳곳까지 “사이커델릭 레코즈”의 단골들이 생겼다. 

     

    몇 년 전부터는 가까운 뮤지션들의 매니지먼트 일도 하고 있다. 덥-씨나 도그파운드 등 모두 힙합계에선 널리 알려진 인기 뮤지션들이다. N.W.A의 리더였던 이지-이의 아들 베이비 이지-이의 일도 봐주고 있다. 이들과 함께 캄튼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자선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캄튼 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일하며, 커뮤니티를 위한 토이 드라이브나 자선 공연 등을 기획하기도 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동네 공원에서 큰 공연을 기획해 7000 여개의 장난감을 모아 캄튼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아버지가 그러셨듯, 저도 이시대의 캄튼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커크 김씨에겐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한국의 빼어난 힙합 뮤지션들과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꿈이다. 

     

    "인터넷을 통해 실력있는 한국 힙합 뮤지션들을 꾸준히 봐 왔어요. 아직 한 번도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멋진 음악적 교류를 해보고 싶네요."

     

    이경민 기자 lee.rache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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