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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반] 가리온 1집, 시간을 넘어 도착한 '하드코어' 힙합
    힙합 아카이브/랩 창작가들 2011. 5. 14. 17:58
    ===www.weiv.co.kr===

     

    시간을 넘어 도착한 '하드코어' 힙합


    선민 sun1830@hotmail.com | contributor

    가리온(Garion)은 한국 힙합 씬이 형성되던 초기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형님들'이었다. 하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서' 그들의 앨범 발매는 오랫동안 늦춰져 왔고, 청자들의 기대는 커져만 갔다. 그 동안 MC메타가 절충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가끔씩 활동의 그림자를 비추기는 했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옛날 MP3들을 빼고는 가리온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가리온](2004)의 발매 소식이 들려왔다. 반응은 기대 반 실망 반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음악이지만 공개된 곡의 절반 이상이 1998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옛날'에 만들어진 것들. 한국 힙합의 초기에나 통했던 음악이 지금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아무도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한 우물만 파다가는 시대를 못 따라 간다"는 주장이 예언처럼 가리온을 따라다녔다. 

    가리온의 데뷔(!) 앨범 [가리온]은 표지를 장식하는 멤버들의 인상만큼이나 금욕적인 앨범이다. 힙합의 클리셰로 자리잡은 자기과시와 마초성, 섹스와 폭력에 대한 집착이 보이지 않고 입을 모아 외치는 '떼창'이나 흥겨운 파티용 비트도 찾을 수 없다. 대신 [가리온]은 한 번에 드러내기는 힘들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부여잡은,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넌 분명 어제보다 더 잘 쓰기 바라는 가사도 있고 / 지난 달 커팅한 비트가 맘에 들지 않기도 하고 채로 걸러낸 부드런 입자처럼 / 걸르고 거른 순금의 비트와 어휘와 철학과 행동하는 양심과 고집스런 한 길의 완성을 바라고 있음을 알고 있나니 / 내 존경은 그 위를 맴도나니 이를 일컫어 힙합이라 말하니 / 그것이 바로 언더다운 언더그라운드이나니"("언더그라운드") 

    확실히 이 가사는 트렌드를 따르고 있지 않다. 정직한 단어의 나열과 비타협적인 태도의 표현은 1998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그 때의 느낌 바로 그것이다. 단정하면서 묵직한 비트와 베이스, 피아노가 약간의 암울한 공기를 만들면 MC메타와 나찰의 랩이 오밀조밀 그 공간을 채우며 곡의 긴장감을 조율한다. 저음과 고음을 번갈아 주고받는 그들의 랩은 훅이 강렬하지는 않지만 JU의 비트와 맞물리며 강렬한 플로우를 만들어낸다. 

    JU가 직접 밝힌 것처럼 이 비트들은 현재의 트렌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신 그가 말하는 힙합의 황금기인 90년대 중반을 그대로 잘라서 여기에 던져놓는 듯하다. [Illmatic]과 DJ 프리미어(Premier)의 그림자가 느껴지지만, '한국산' 샘플의 배치와 날선 긴장감은 가리온 고유의 것이다. 뉴욕까지 들고 가서 매만진 정성어린 마스터링에 힘입어 [가리온]은 시간의 무게를 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앨범 전반부에서 "뿌리깊은 나무", "언더그라운드", "마르지 않는 펜"이 가사와 사운드 양면에서 비타협성을 잔뜩 과시하고, 후반부 "회상", "시간의 여행자", "자장가"가 피아노 루핑을 바탕으로 긴장감 어린 재즈의 느낌을 전달한다. MC메타의 연륜이 느껴지는 "나이테"와 "음의 여백", 한창 주목받고 있는 킵루츠(Keeproots)가 참여한 리믹스까지 앨범의 일관성과 균형감각은 절묘하다. 

    "때론 조용히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 외로운 자만이 희망의 샘물을 먹진 않지 그 샘물을 먹고 자라는 자신의 나무 한 그루 / 안으루 들어감으로 보이네 그 결실의 실한 열매가 맺히네 / 노력을 아는 자에겐 땀방울이 맺히네"("뿌리깊은 나무"), "벌써 해는 지고 갈 길은 너무나 길고/길을 잃은 나는 길고 긴 여정의 길에 힘을 잃고 지고가는 짐도 내겐 필요없이 느껴지고 있고 / 다른 방법을 알 길 없는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내 발을 만졌어 / 고생하는건 너였구나, 내 맘을 아팠어"("음의 여백"), "결코 먼저 걸어가고 싶진 않은데 / 뒤에서 계속 나의 등을 미는데 어찌할 바가 없는 내 속은 / 온통 알 수 없는 수수께끼 /.../ 사람은 원래 두 다리와 두 팔로 / 각자의 방식으로 머리를 잡고싶어.. 바람을 타고싶어.. / 바람의 속도를 당신이 앞서랴?"("시간의 여행자") 

    이들의 가사는 화려한 비유나 재기발랄한 라임을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곡들의 질감만큼이나 일관된 주제를 다루면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노력을 성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한편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표현할 수 없는 것, 하나로 정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써내려는 시도, 반대편에는 한국어로 힙합을 한다는 왜곡된 위치("단발의 이해도 가지 않는 우스운 기지 / 머릿속 신념에 대한 발설은 단념 / 그래야 칠거지악의 구멍에 체념 / 이 모든 것이 찬란한 우리 역사 수십년"("자장가). 두 가지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가리온은 "뿌리깊은 나무", "마르지 않는 펜"을 세우려고 시도하고 있다. 12곡을 꾹꾹 채워 두 MC는 그 흔한 'yo!' 한 번 없이 한국어 라임으로만 이러한 주제의 일관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리온]에 대해 "대략 지루하다"는 평도 들려오지만, 그래도 이 음반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는 음악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흔한 샘플링과 듣기 편한 훅의 강조, 힙합 클리셰의 반복 대신 가리온은 기본에 충실한 비트와 끝없이 반추하는 가사를 선택했다. 총소리도 욕설도 섹스에 대한 언급도 없지만, [가리온]은 힙합 음악의 단단한(hard) 핵심(core)을 추출해내는 명반이다.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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