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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영나영 제주힙합
    글/기고문 2012. 12. 28. 14:45

     

     세 번째 겨울을 나기 위해 분주합니다. 제주에서 처음 맞은 겨울은 당황스러웠죠. 펑펑 몰아치는 눈보라에 온통 새하얀 마을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불 속에 파묻히기 바빴으니까요. 집 안에서 당장 온기가 있는 곳은 전기장판뿐. 오래도록 싱겁게 들어온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라는 말을 제주에서 절감할 줄이야....... 갑작스럽게 이주를 감행하느라 집 안은 휑했습니다. 한푼 두푼 모아 놓은 쌈지 돈으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1년 동안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석 달 만에 서울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서울 너는 참 매력적인데, 하루가 다르게 뒤바뀌는 상가들이 이젠 보기 괴롭구나. 너와는 다른 데서 살아볼게.’

      마침, 만화 속 인물 같은 지인 한 분이 제주의 시골마을로 함께 이주하자는 솔깃한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 분은 사회적 기업을 준비 중이었고, 제가 그 일을 돕고 있으면 당장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였죠. 서울을 떠나도 한 참 떠나는 거라, 제 인생엔 상당히 파격적인 시나리오였습니다. 제주도는 2007년도에 열린 4.3 문화제의 초청을 받아 랩 공연을 하러 왔던 게 기억의 전부였는데, 그때 한 선생님을 따라 ‘아부오름’에 올라가 보았던 기억만이 선명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제주하면 맑은 바다 보다, 유연한 오름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게 되었죠. 그리고, 위쪽 아래쪽이 어딘지도 잘 모르면서 짐을 내려놓은 제주의 마을은 아부오름이 자랑거리인 ‘송당리’였습니다. 알듯 모를 듯 깔려있는 삶의 암시들이 띄엄띄엄 이어지는 재미가 놀라울 뿐입니다.

      송당리에서 시작한 제주살이는 불안 불안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일꾼직도 반년 만에 그만두었고요. 목공을 하는 일이었는데, 모든 사업의 처음이 그렇듯 밤을 새는 일이 잦아서 랩 음악과 일을 병행해야 하는 저로서는 지속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음악을 주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라 궁지에 몰린 꼴이었습니다. 위기탈출! 뇌세포를 재빨리 회전시켜야 했습니다. 제주에 오기 전 읽어 두었던 ‘희망의 인문학’에서 받았던 영감이 반짝이기 시작했죠. 그 책을 읽고 난 후 틈틈이 ‘힙합과 인문학’이란 화두가 떠오르곤 했는데, 본격적으로 요리를 할 기회였습니다. 힙합을 통해 인문의 즐거움으로 입문하는 수업 말이죠. 랩은 힙합 문화에 속한 ‘말하기 기술’이거든요. 랩과 더불어, 브레이크 댄스, 글씨로 그리는 그림, 음악을 재창조하는 디제이 등을 모두 힙합이라 합니다. 

    무엇보다 제주도는 힙합이 뿌리내린 곳입니다. 랩으로 삶을 증명하는 ‘래퍼’라는 사람들이 많지요. 인구비율로 보자면 상당합니다.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에선 ‘제주힙합’이란 말이 당당하게 등장합니다. 한국 최고의 즉흥래퍼로 이름을 알린 제주의 한 래퍼는 서울에서의 활동을 만류하고 제주힙합을 위해 제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주힙합의 기운을 받아서 인지, 저의 ‘힙합과 인문학’ 수업은 한발 한발 성과를 보였습니다. 힙합 음악을 통해 세계의 역사와 사회를 분석하는 강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랩처럼 발표하는 ‘낭독의 두드림’ 워크숍 등은 청소년부터 40대 여성 분까지 두루두루 좋은 호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성과에 힘입어 지난 8월 <랩으로 인문학 하기>라는 책도 완성시킬 수 있었고요.

     가끔 섬 밖에서 공연이나 강의를 하는 자리에선 제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러움을 사곤 합니다. 그럴 땐 제주어로 말을 이어가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제주어는 아직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입니다. 표준어 제주어 순으로 되어있는 사전과 간단한 문법체계를 설명한 책이 있다면 당장 구하고 싶어요. 말의 어미를 활용하는 법칙이 가장 흥미로운데, 좀처럼 늘지가 않습니다. 래퍼에게 지역어는 보물창고이기도 합니다. 지역어가 지닌 풍부한 장단을 이용해 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랩은 근본적으로 모국어 중심입니다. 래퍼가 영어를 좋아한다는 건 완전 오해입니다. 대부분의 래퍼들은 모국어와 지역어에 큰 사랑을 느낍니다. ‘언어의 장단’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니까요. 래퍼는 ‘말장단꾼’입니다.

     그런데, 제주어로 말 잘하는 사람들도 막상 글을 쓸 때는 표준어 위주로 돌변하곤 하더군요. 앞으로 ‘낭독의 두드림’ 워크숍에선 풍성한 제주어를 캐낼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저도 수업을 통해 차근차근 배워나갈 수 있겠죠. 한 주에 한 번은 도시의 아늑한 뒷골목에서 사람들과 도란도란 모여 즉흥 음악과 춤을 즐기는 모습도 상상하고 있습니다. 열린 공간에서 소유를 넘어 각자의 재능과 열정을 나누는 일, 힙합의 규칙이자 으뜸가는 즐거움입니다. 아직은 골목의 따뜻한 정서가 남아있는 제주이기에 잘 될 것 같아요. 누구나 오고갈 수 있도록 올레를 활짝 열어 두겠습니다. 힙합의 불턱에서 끄덕이며 놀아보게 마씸!

    제주예술문화재단 정기 [삶과 문화] 201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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