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평론이란 무엇인가 (글 김영대)
인간적 소음 | 음악평론가 김영대의 리뷰와 평론
시작하며
대중음악 평론가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종종 그렇게 묻곤 한다. 언뜻 몇 가지 이미지들이 뒤섞여 스쳐간다. 잡지나 포탈 따위에 조금은 난해한 어휘를 섞어가며 음반에 대한 분석을 길에 늘어놓는 사람, 유명한 음악 방송에 나와 이런저런 정보를 전달하며 진행을 돕는 사람, 혹은 음반 속 해설지나 음원 사이트 등에 새로 나온 음악에 대해 추천의 글을 올리는 사람 등등. 대강의 이미지는 있지만 그런데도 확실한 한가지 정의는 떠오르지 않는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평론이란 어떤 일일까? 왠지 더 복잡한 기분이 든다. 평론과 비평은 어떻게 다를까? 음악을 분석하는 것과 대중음악을 평론하는 것은 다른 걸까? 평론가는 칼럼니스트나 저널리스트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일까? 간단한 듯 난해한 질문이 꼬리를 문다. 이 시대 대중음악 비평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대중음악을 평론한다는 행위가 무엇일까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비평이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해왔고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로키즘과 팝티미즘
200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발전해 온 음악학musicology, 그리고 흔히 클래식 음악이라 불리는 서양 고전 음악을 다루는 음악 저널리즘music journalism의 오랜 역사에 비해 우리가 현재 ‘대중음악 평론’이라 일컫는 것과 유사한 글쓰기와 담론의 양식이 도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팝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대중음악이 학문 혹은 연구의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던 유일한 대중음악은 재즈였는데, 그마저도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디지 길레스피Dizzie Gillespie가 ‘현대 음악modern music’이라 자칭했던 비밥be-bop 을 제한적으로 언급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새로 나온 음악의 정보, 음악계의 동향 정도를 전하는 것에 머물던 대중음악 저널리즘의 제한적인 발언폭은 1963년 비틀즈Beatles의 등장과 함께 근본적인 확장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1963년 비틀즈의 JFK 공항 상륙, 즉 브리티쉬 인베이젼British Invasion이라 불리는 역사적 순간은 ‘록 시대rock age’의 탄생임과 동시에 곧 본격적으로 시도될 록 비평 (rock criticism)의 도래이기도 했다. 비틀즈의 미국 침공, 그리고 몇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공연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번진 유행처럼 여겨졌던 로큰롤rock ‘n roll은 록rock으로 그 성격이 탈바꿈했고, 대중음악 비평은 바로 그 순간 탄생했다. 이들의 음악이 팝pop이나 R&B가 아니라 ‘록’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록 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체들이 앞다투어 등장했고, 이들은 비틀즈나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음악에서 평범한 ‘유행가’와는 다른 예술로서의 가치, 혹은 적어도 클래식이나 재즈에 버금가는 미학적 의미를 발견했다고 흥분했다. 이를테면 그것은 시대 정신으로서의 록의 등장이었다.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와 블렌더Blender 등 음악 전문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현대 록 비평의 대부로 불리게 된 로버트 크리스트가우Robert Christgau 같은 인물이 등장해 록의 세상을 선포했고, 학계는 록을 위시한 대중음악을 마침내 심각한 예술 장르로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새롭게 대중음악의 ‘규범’으로 삼은 록 음악 비평의 두가지 축은 진정성authenticity과 뮤지션쉽이었다. 악보의 음표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악곡의 구조에 천착하는 고전음악 비평과는 달리 음악가의 독특한 태도와 가사와 연주에 담긴 메시지의 미묘한 상징을 파헤치는 록 비평의 스타일은 매력적이었고, 대중음악 평론의 황금기는 이러한 록 비평의 고유한 태도를 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상 현존하는 모든 대중음악 담론은 바로 이러한 록 비평의 고전적인 방법론에 기대고 있거나 그 이데올로기에 일부 지배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록 비평 =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등식에 일말의 균열의 조짐이 감지된 것은 2000년대 초반에 가까워서였다. 이 전환은 팝티미즘(poptimism) 혹은 팝피즘(popism) 이라고 불리는 대안적 관점, 혹은 저항적 담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록을 대중음악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음악을 이야기하는 비평의 태도를 ‘로키즘rockism’이라고 칭하며 날을 세웠는데, 가령 디스코disco는 펑크punk 이상으로 중요한 음악 장르였으며, 여느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음악 이상으로 리듬앤블루스R&B나 힙합Hip-hop이 논할만한 가치를 가진 음악이고, 샘플러로 만들어진 테크노나 힙합이 밴드가 실제로 연주한 록에 못지않은 음악이라는 주장을 설파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요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평론계는 물론이고 학계 역시 이 팝티미즘의 논리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호응하기 시작했고, 블랙뮤직과 전자음악 등 평론의 영역에서 가벼이 취급받았던 음악의 지지자들이 함께 열광했다. 그간 평론가와 음악 마니아에겐 거의 조롱의 대상에 가까웠던 ‘팝’ 뮤지션들, 가령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나 필 콜린스Phil Collins 등의 이름이 학술대회나 대중음악 컨퍼런스에서 심심치 않게 호명되며 뒤늦게 재평가의 기회를 얻었는가 하면, 일라이자 왈드Elijah Wald 같은 진보적 평론가들은 비욘세Beyonce와 케이티 페리Katy Perry 처럼 시대를 규정한 여성 팝 아티스트에 대해 사실상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학계와 평론계의 게으름과 편견을 도발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팝티미즘의 가장 유쾌한 성과로 보는 것은 대중음악(popular music)을 대하는 평론가들의 모순된 태도를 일정 부분 환기시킨 것이다. 왜 평론가는 ‘대중’음악 혹은 ‘통속’음악을 다루면서 대중성이 아닌 음악성이라는 필터를 활용하는가? 그들은 예술음악과는 다른 상업 음악을 다룬다고 하면서 왜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굳이 들이밀어야 하는가? 팝티미스트들은 대중들의 막연하게 품고 있던 불편한 질문을 여과 없이 던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논쟁이다.
한국 대중음악 평론의 만들어지기까지
이 시대에 유효한 대중음악 평론의 정체正體를 말하기 위해 먼저 떠올려야 할 것들이 있다. 과연 한국에서 음악 평론은 어떠한 모습이었나 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로키즘과 팝티미즘’으로 대표되는 논쟁의 구도를 빌려와 한국 대중음악 담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지금의 풍경을 점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그 탄생 배경과 역사적 발전 과정 및 맥락이 상이한 한국의 대중음악 평론을 서구 담론의 틀에 직접 대입해 분석하는 것은 불완전한 시도이겠으나, 여전히 몇가지 유사한 함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한국의 음악평론이 소위 ‘로키즘’으로 대표되는 영미 록 비평의 영향권 아래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 한국의 초기 대중음악 평론가중에 특별히 자신을 장르 비평가로 표방한 이는 많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 중심에는 70년대 이후 로버트 크리스트가우 등이 주도한 록 비평이 중요한 레퍼런스로 자리했다. 본격적인 대중 음악 평론의 실마리는 소위 전영혁과 성우진 등 ‘팝 칼럼니스트’로 일컬어지는 80년대의 팝음악 저널리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의 음악평론은 팝 매체의 필수적이며 정통적인 존재 이유인 ‘정보’에 ‘관점’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다. 음악 평론가는 대중이 혼자서는 입수하지 못하는 독점적인 지식, 특히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영미 록 음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유통하는 지식 소매상으로서 존재 가치를 유지하는 동시에 음반에 담긴 메시지와 사회문화적 함의를 새롭게 말하기 시작했고, 바로 이 점에서 단순히 히트 곡과 최신 뉴스를 찾아 소개하는 소위 ‘Top 40’ 형식의 FM 라디오 DJ와는 다른 영역을 선포했다. 전영혁의 [월간 팝송]이나 성우진의 [핫뮤직] 등은 청년문화로서 록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롤링스톤, 멜로디메이커 등 영미 록 음악 담론을 인용 혹은 현지화 함으로써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음악 대중’의 탄생을 이끌었다.
9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싹을 틔운 대중가요 평론은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출발했다. 무엇보다 평론의 대상이 팝이 아닌 가요였다는 점, 그에 따라 음악에 대한 단순 정보보다는 자연스럽게 담론의 관점과 필자의 포지셔닝을 평론의 특징으로 삼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정확히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음악 마니아’가 아닌 담론가들이었고, 팝 칼럼니스트들과는 달리 음악의 ‘현장’에서 뛰면서 산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이들도 아니었다. 이들의 주장은 전통적인 록 비평의 성격에 운동권의 민중 담론을 결합한 것이 주된 특징이었는데, 음악이 가진 사회적 파급력 혹은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음악성과 등치 시키거나 적어도 가장 중요한 평가의 준거로 삼는 것은 이 시기에 활동한 대중음악평론가들이 가진 유사한 태도였다. 이영미, 강헌, 신현준 등 80년대 학생 운동의 적극적 참여자였거나 예술을 (혹은 예술적 활동을) 하나의 혁명적 태도의 발현 내지는 도구로 보았던 문화예술 운동의 주역들이 한국 대중음악 평론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될 테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1세대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음악 그 자체의 미학에 직접 반응하기보다는 사회적 급격한 변화의 기운에서 음악, 특히 록이라는 장르가 앞장서 만들어 낸 (혹은 그렇다고 믿은) 풍경과 전복적 기운에 더 큰 감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한다. 가령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두루 걸친 얼터너티브 록과 네오-펑크의 득세, 서태지와 신해철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펼쳐낸 강렬한 록 사운드는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본격적으로 글을 쏟아낸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마치 우드스탁Woodstock과 사이키델리아Psychedelia 운동이 록 비평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듯, 80년대에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그쳤던 한국 록 음악이 일부 제도권 음악인들에 의해 이식되며 신을 바꾸는 모습에 평론가들은 열렬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여가’ 때만 해도 실험적인 신세대 음악가 정도로 취급받던 서태지가 록 사운드와 사회 담론으로 무장한 3집 이후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기 시작하며 음악평론의 주요한 대상이 된 것, 랩-댄스라는 카테고리에서는 동시대에 서태지와 맞먹는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던 김창환 사단의 음악이나 현진영 등의 작가들이 평론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외면받았다는 점도 한국 대중음악 평론에서 로키즘의 경향에 대한 의심을 부추기는 부분이다. ‘세대’, ‘혁명’, ‘전복’ 등의 단어가 제도권 음악에 빈번히 사용되고, 이 단어들이 매우 특정한 스타일의 음악가들, 그러니까 사회 비판적인 록 음악이나 그와 유사한 태도를 지니고 있던 자의식 강한 팝 뮤지션에게만 적용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어쨌든 당시의 젊은 대중은 한국 대중음악을 주제로 진지한 평론이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신기해하면서, 동시에 이 새로운 평론가들이 말하는 방식에 주목한 것은 중요했다. 이전 세대 록 대중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충성스러운 대중음악 마니아가 등장했고, 이들은 서구 음악이 아니라 한국 음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록을 중심으로 두고 창작자의 진정성을 문제 삼는 한국 대중음악 평론 1세대들의 경향은 나를 포함한 2세대 평론가들에 이르러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거나 오히려 일정부분 강화되었다. 다만 록이나 포크가 아니면 통속적인 유행가라는 구도에 묻히지 않고 블랙 뮤직, 전자음악 등 장르 음악의 접근 방식을 어설프게나마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일견 의미 있는 변화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학생운동이나 노래패 출신이 아닌 음악 전문 동호회 출신으로, ‘혁명’이나 ‘전복’과 같은 문학적 수사대신 ‘사운드’, ‘편곡’ 등의 음악 용어를 더 빈번히 사용하는가 하면, 밴드 플레이를 뜻하는 ‘연주’라는 말은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그 의미와 범주를 넓혀 사용했다. 하지만 록 비평의 핵심이랄 수 있는 진정성 담론 및 작가주의 평론, 즉 예술가로서 음악인의 진정성과 태도를 평가의 우선적인 가치로 고려하는 특유의 태도는 유산으로 상속되었다. 박준흠이 주도한 ‘서브’, ‘가슴’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음악을 철저히 ‘작가’의 예술로 보는, 편협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관점으로 무장해 대중음악 평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동시에 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 대중음의 주류로 떠올라 절대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담보했던 댄스 가요 및 아이돌 음악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기피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완전히 다르지 않다.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왜 한국 대중음악 평론에서 팝티미즘적 태도나 그와 유사한 관점은 진작에 시도되지 않았거나 혹은 그 필요성조차 인식되지 못했었나 하는 점이다. 우선 오랜 세월 대중음악 담론을 주도했던 기성 평론가들이 예전처럼 동시대의 주류 음악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이유이다. 그들이 2000년대 이후의 케이팝이나 아이돌 음악과 힙합을 비롯한 동시대의 제도권 음악에 무심하거나 다소 미지근한 평가로 일관해온 것은 주류 대중음악의 미학적 수준이 낮아졌거나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문제적인 작품을 더이상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서라기보다는 애초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장르 및 담론의 틀에 동시대의 한국 대중음악이 매끄럽게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상황, 즉 변한 트렌드에 대응할만한 유연한 비평의 틀을 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떠올려 보면 대중음악 평론이 한창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계는 전례 없는 양적, 질적 성장에 한껏 들떠 있었다. 지금은 ‘인디’라는 카테고리에 더 잘 어울릴법한 음악들이 지상파의 음악차트를 손쉽게 누비고, 뮤지션쉽과 상업성의 간득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옅음으로써 그 둘을 굳이 의식적으로 분리해 다룰 이유도 없었다. 작곡가와 프로듀서 등 창작자가 주역이 된 소위 작가주의적 대중가요의 층위는 매우 두터워 보였고, 평론가들은 그 안에서도 진짜와 가짜를 분리해 내며 일종의 호사를 누렸다. 그 와중에 엄청난 변화가 도래했다. 90년대 후반까지도 허접스러운 통속음악으로 치부되던 댄스 가요는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 세계적인 흐름에 근접한 트렌디 음악으로 거듭났고, 작가주의 음악은 적어도 제도권에서는 사실상 무력해지거나, 케이팝의 산업에 부분적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인디라는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 대중음악 평론가의 역할이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케이팝과 힙합등 새로운 트렌드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담론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재능있는 일부는 문화 평론이나 방송 평론의 영역으로 발을 옮겼고, 또 몇몇은 언론이 아닌 학계로, 또는 아예 음악 산업 내부로 위치를 바꾸었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글밥’으로 이야기되는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아닌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바라보고 싶다. 음악 평론이 무엇인가, 변화된 트렌드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시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대중음악 평론계 내부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 이를테면 대중음악 평론가들과 기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읽히는 태도 변화는 이런 맥락에서 더욱 주목해 봐야 할 지점이 있다고 본다. 단순히 어떤 장르나 흐름을 끼워주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된 음악계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관점과 시선을 평론가들이 갖추기 시작했느냐가 더 중요하고 궁금한 부분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평론계 내부의 시선 변화는 단순히 청년문화의 주류가 록에서 힙합으로 바뀌었다거나, 작가주의 주류 가요의 흐름이 몰락하고 케이팝 아이돌 음악이 득세했다는 정도로 단순화시킬 성질의 사안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힙합과 아이돌 음악, EDM 등이 새롭게 조명되는 추세가 정말 새로운 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인지, 전 세계로 퍼진 한류 열풍을 타고 문화학과 사회학 등에 유행처럼 번진 밴드왜건 효과, 소위 말해 ‘숟가락 얹기’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시선을 한국 바깥으로 돌려보면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다급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의 학계들은 최근 몇 년간 아시안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한국 대중음악에 예외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시애틀에 소재한 EMP 박물관 (Experience Music Project Museum)은 매년 전국적 규모의 팝 컨퍼런스를 열고 있는데, 최근에는 케이팝만을 따로 다룬 패널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미국 평론가와 학자들이 한국의 힙합과 전자음악 등에 대해 심도 높은 토론을 벌이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케이팝을 다룬 최초의 학술서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나왔는가 하면, 현재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가장 많은 학술 논문이 발표되는 곳도 한국이 아닌 미국이다. 이 같은 격차는 한동안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중요한 것은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의 평론가들이 이런 역동적 변화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음악계 내부의 변화, 산업 논리의 변화, 음악가의 태도의 변화 등 이 역동적인 흐름의 와중에 개인적인 게으름으로, 혹은 직업적인 관성 때문에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한 평론의 본질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평이 해야 하는 일, 비평이 할 수 없는 일
대중음악계 내외부적으로 평론의 위기 혹은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은 심심치 않게 있었다. 사실 평론이나 비평이라는 단어가 다분히 분석적이고 학구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긴 하지만, 음악평론의 가장 고전적인, 그리고 가장 실질적인 목적은 텍스트 비평이나 해석이 아닌 구매 지침, 즉 음악이라는 문화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무엇을 먼저, 혹은 필수적으로 사야 할지를 (혹은 피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내서의 역할은 적어도 대중 음악이라는 장르에서는 유효하거나 매력적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생각해보자.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적어도 음악이라는 장르에 한정해 사실상 무한대의 접근성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대중음악은 구매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대상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손에 넣은 음악을 두고 취향을 확인하고 조직하는 대상으로 그 본질적인 성격이 변화했다. 오랜 세월 평론가들 스스로 가장 중요한 역할이자 특권이라 믿어온 ‘발굴’이나 ‘호명’의 작업은 이제는 각종 음악 및 예능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와 작가들이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음악뿐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들은 성실하기만 하다면 클릭 몇 번으로 과거 평론가들이 수십 년을 걸쳐 쌓아온 지식의 보고에 더 쉽고 빠르고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을 애써 구해 들을 필요가 없는 시대에 음악 평론은 영화나 문학처럼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 혹은 그 과정에 이르는 감수성의 훈련 목적으로 읽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성급하게) 조직된 취향의 논리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더 많이 읽히고 있다. 그것이 전적으로 산업의 변화 때문인지, 혹은 평론가들의 안일한 태도 때문인지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평론가에게 늘 독점적으로 부여되었다고 생각한 이 역할이나 권위의 갑작스러운 부재야 말로 현재 대중음악 비평이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수상하다. 과거라고 완전히 달랐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음악 평론가는 음악 신(scene)을 이끌고 가거나 미래를 예측하고, 혹은 음악가의 다음 행보를 꿰뚫어보는 등의 전지전능한 역할과는 애초에 거리가 있다. 음악가에 평론가란 종종 ‘음악 만들기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가사만을 열심히 분석해 그것이 음악가가 가진 의도의 전부인양 판단하는 사람’ 정도로 한심하게 비치기 일쑤였다. 음악학자들과 평론가들이 늘 한입으로 불평하는바, 음악 비평은 굉장히 추상적인 작업이다. 우선 우리가 다루는 음악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다분히 추상적이다.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소리’의 형태로 전달되게 마련인데, 이를 이루는 요소가 다시 사운드, 음색(톤), 멜로디, 하모니, 템포, 다이내믹 등으로 세분된다. 그리고 가사가 있다. 가사의 내러티브는 종종 곡의 내러티브와 일치하지 않으며 그 논리 관계 역시 모호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매우 축약 적이며 간명한 이 내러티브는 길어야 5분 정도만 지속할 뿐이다. 대중음악 평론이 기본적으로 헛다리를 잘 짚거나 딴소리를 한다고 느껴진다면, 또는 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평론가 개인의 역량 이전에 이처럼 작품 자체가 가진 텍스트로서의 모호함, 그 추상적인 기호 체계에 있다고 변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사를 중시한 비평이 일부 음악가들에게는 공상에 가까운 재해석이라 비판받지만 그나마 소구력이 있는 이유, 클래식 음악처럼 조성이나 화성의 선택을 작자의 논리와 1:1로 연결지어 판단할 수 없는 까닭에 조금은 추상적인 ‘인상비평’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이렇게 의심의 방향을 바꿔본다. 대중음악 평론의 현 상황을 정말 위기라고 진단한다면, 혹은 대중음악 담론의 몰락과 음악 대중의 취향의 ‘게토화’ 같은 것들 때문에 평론가들의 입지가 예전보다는 좁아졌다고 느끼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대중음악 비평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자 넓지 않거나 그 작업이 생각보다 훨씬 난해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다시 로키즘과 팝티미즘의 논쟁으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로키즘의 한계를 충분히 지적했고, 나 자신도 팝티미스트에 가까운 성향과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금의 시대정신이 반드시 팝티미즘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먼저 잠시 언급했듯, 나는 스스로 팝티미스트라 칭하는 (혹은 팝티미즘에 은연중에 가담하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그들이 비난했던 이들이 취한 관점, 그중에서도 ‘진정성’과 ‘음악성’의 주장을 장르만 옮겨 유사하게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팝티미스트들의 록 담론에 대항하며 반대편의 대표주자로 놓았던 힙합 평론의 경우 가사와 태도의 문제라든지 음악의 순혈성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록 비평 못지 않게 진정성 담론의 함정에 깊숙이 빠져드는 모습도 보였다. 록과 포크등 지극히 사회 비판적이거나 참여적인 음악만을 논하는 대중음악 평론의 고전적인 방법론을 넘어 새로운 평론의 형태를 제안하지 못한 채, 기존의 대중음악 평론을 록 중심주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비판하는 소위 팝티미스트들의 태도가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강조하건대, 이것을 단순히 록과 팝이라는 장르 그 자체의 대결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90년대 초에 대중음악 학계 및 평론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던 제도권 음악과 언더그라운드 간의 논쟁이라든지, 흑인과 백인 간의 문화 전용cultural appropriation 문제 같은 것은 록에서 힙합으로, 혹은 록에서 팝으로 장르를 갈아 탔을 뿐, 본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록 비평과 팝티미즘의 장점을 절묘하게 조화하는 방안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불완전한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록이냐 팝이냐, 제도권이나 인디냐의 이분법 내지는 그와 유사한 논리 구조로 무장한 ‘작가주의’의적 담론의 한계를 경계해 보다 음악 그 자체의 미학에 집중하는 것만이 보다 다양하고 대안적인 평론을 가능케 하는 유효한 방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혹자는 대중음악 평론가가 작가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인디음악의 옹호자 내지는 대변자가 되어 상업주의적 음악의 흐름에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할 수도 있다. 언뜻 일리 있는 말이다. 충분히 가치 있지만 잘 알려지지 조금 더 주목해야 할 음악을 알리는 것은 평론가의 어쨌든 우리들의 중요한 책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순수하게 감상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좋은 음악을 고르는 기준이 굳이 주류-인디라는 산업적 구분에 메어 있을 까닭은 없다. 대중의 욕구가 자본주의 경제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순수하게 미학적인 측면에서 주류(상업성)와 인디(음악성)의 뚜렷한 이분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반론 역시 유효하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전 세대의 록 비평,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시도한 작가주의적 평론이 거둔 성취를 애써 부정하거나 싸잡아 깎아내릴 의도는 없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미처 놓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단순히 ‘원고료로 밥을 먹고 살지 못하는’ 정도의 푸념에 그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평론가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새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음악을 음악답게 이야기하는 법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나는 대중음악 비평이 조금 더 음악을 음악다운 태도로 접근했으면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음악답게 접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선 그 시작은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고유한 특성들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사려 깊은 분석이 될 것이다. 소리sound와, 선율melody과, 음색timbre과, 리듬rhythm과, 화성harmony과, 테크닉technique등 곡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모습을 세심히 살피고 그 음악적 성취의 의미를 보다 ‘음악’의 논리 안에서 곱씹는 것이다. 표면적인 메시지만을 쫓아 음악가의 제스쳐를 재빠르게 판단하려 한다거나 음악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섣불리 주목해 의미부여를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음악은 표상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순간적인 기호들이 난무하는 예술 장르다. 비교적 그 뜻이 분명한, 제한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가사를 제외한다면 그 외의 모든 예술적 표현은 음과 소리가 만들어 내는 패턴과 대칭의 결을 통해서만 그 의도를 드러낸다. 제아무리 심미안을 가진 비평가에게도 음악 안에 담긴 메시지 역시 순간적이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데, 음악가의 의도는 작업의 결과만큼 정교하거나 일관적이지 않을 때가 많고, 내러티브가 언제나 분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 비평이 문학 비평이나 영화 비평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내러티브가 애매한, 소리와 제한적인 어휘로만 이루어진 추상적인 메시지를 구체적인 어휘로 번역해 독자(혹은 청자)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런 작업을 온전히 감당하기에 한국 대중음악 평론의 역사와 역량은 아직 짧고 부족하다. 성급한 관찰일지 몰라도 작가와 평론가가 비슷한 시스템에서 훈련되다고 생각되는 문학과 영화와는 달리 음악 평론은 유독 음악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문학도나 사회학도, 혹은 역사학도의 전유물인 경우가 많다는 점은 뼈아프게 돌아볼 부분이다. 물론 음악 평론이 어떤 것인지, 어때야 하는지 그 누구도 제대로 말하거나 가르쳐준 적은 없었고, 이론화나 시스템이 모두 미미한 가운데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어깨너머 음악을 배우고 평론의 방식을 개척해 왔던 개인의 노고는 그것대로 인정받아야 한다. 1970년대 이래로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대학교 시스템 안에서 대중음악의 역사와 이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미국과 비교한다면 이 땅에서 대중음악 평론이란 이제 겨우 유년의 끝을 벗어던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체계적인 시스템, 그리고 그보다더 더 중요한 꾸준한 감수성의 훈련을 통해 음악 평론만이 할 수 있는 글쓰기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 평론이나 방송 평론과는 다른 음악 평론 고유의 맛과 멋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결국 음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음악을 위대한 음반 그리고 위대한 음악가라는 관점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경직성에서 벗어나는 일 또한 시급하다. 물론 시대를 규정한 걸작이나 명반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음악 스타일의 혁신을 이끌어 온 대가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본적으로 훌륭한 음악을 가려 뽑아 호명하고 찬사를 보내는 일, 그에 더해 시대와 분야별로 점수를 주고 순위를 매기는 일은 평론가들의 책무이며 그들이 가진 고유한 특권이자 매혹적인 유희의 방식이기도 하다. 대중들에게는 평론가들이 가려 뽑은 명곡과 명반의 리스트 자체가 필수적인 안내서가 되기도 하며, 평론가들에게는 집단의 취향과 정치적 태도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 명반 혹은 대가라는 구분은 종종 지나치게 편협하며, 그 결과 좋은 음악을 걸러내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더 많은 음악을 의도치 않게 배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하나, 레코딩만이 음악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여전히 대중음악 비평은 ‘레코딩’에 대한 평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음악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 즉 대상이 아닌 과정이라고 본 크리스토퍼 스몰Christopher Small의 ‘musicking’의 개념이나 대중 음악을 하나의 사회 생활social life의 측면에서 접근한 토마스 투리노Thomas Turino 사고 역시도 그래서 주의 깊게 참고하고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명반/명인, 나아가 레코딩/뮤지션의 구도에서 빠져나와 과정으로서의 음악, 퍼포먼스로서의 음악, 삶으로서의 음악에 더 다양하게 접근하는 음악 비평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한다.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비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음악 평론가는 음악 평론만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평론가의 모습으로 작품 자체의 가치만을 분별해 점수를 매기고 줄을 세우는 고전적인 ‘비평가critic’내지 모든 음악에 한 줄 논평을 다는 만능 ‘해설자commentator’의 위치에서 빠져나와 광범위한 의미에서 각자 추구하는 관심과 전문 분야를 심도 있게 다루는 현장 연구자(field researcher)의 모습을 그려본다.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기억의 편린을 포착해 기록하고 조직하는 사가(historian)로서의 역할은 무엇보다 절실하다. 아직 변변한 통사 중심의 대중음악 역사서 하나를 채 마무리하지 못한 비평계의 게으름은 언제라도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음악 역사를 다루는 접근 방식 역시도 더욱 다양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굳이 포스트 모던(post-modern) 이라는 낡은 수식을 걷어내더라도, 기억으로 조직된 개인사라든지, 특정한 시대, 장르., 공간만을 다룬 미시사가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시도되어야 한다. 음악이 가진 사회문화적 맥락과 관계를 고민하는 음악 인류학자(ethnomusicologist)로서의 새로운 모습도 기대해 봄 직하다. 전통적인 음악학의 이론 위에 인류학의 질적 연구 방법을 접목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은 단편적인 정보나 지식이 더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 어려운 인터넷 시대에 비평가가 고민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담론이나 연구로서의 음악 평론이 반드시 학계의 전유물일 까닭은 없다. 음악가의 삶, 혹은 특정한 음악이 벌어진 맥 변화와 궤적을 추적하고 담아내는 인터뷰어 혹은 에스노그래퍼ethnographer 로서의 역할은 오랜 시간 현장에 몸담으며 산업의 구조와 논리를 익힌 평론가들에게 이미 체득된 특질일 것이다. 거창하게 담론의 확장이라고 까지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평론가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꾸준히 고민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글을 열며 스스로 던진 질문, “대중음악 평론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대중음악 평론가의 본분과 정체에 대한 고민은 결국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 가능성과 한계를 고찰하고 마주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풀어 놓은 문제의식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비평이란 음악을 음악답게 이야기하는 본질로의 회귀를 통해서만 성취될 것이라 결론 짓는다. 그러기 위해 음악을 듣고 말하는 취미성의 흥분으로 돌아가 취향과 감상에 더욱 솔직하고 대범한 글쓰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하필 음악이라는 텍스트 내지는 행위의 가치를 분별하는 비평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곱씹는 것, 또한 그 작업을 가능케 하는 평론의 새로운 의미와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 나아가 새로운 글쓰기의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은 앞으로 이 공간을 통해 펼쳐놓게 될 ‘글’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될 것 같다.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