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재즈는 흑인의 영혼을 노래하는가 (글 임진모 / 출처 풀집)
아직도 재즈는 흑인의 영혼을 노래하는가
재즈는 흑인의 한서린 가슴 밑바닥에서 태어났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블루스 리듬과 현실의 고통을 위무하는 흑인영가를 모태로 하는 재즈는, 지금껏 그 생기어린 리듬과 호소력 짙은 소리로 많은 애호가들을 사로잡아왔다. 여기에 유럽의 클래식이 가미되어 자연발생적인 음율이 예술의 차원으로 높아졌다.
블루스적 리듬과 흑인영가적 호소력이 재즈의 본 바탕이라고 한다면, 재즈를 듣는다는 것은 블루스와 흑인영가를 동시에 듣는 것을 뜻하는가. 그렇지 않다. 재즈는 블루스에 뿌리를 두었으되, 그 예술적 완성도를 더욱 높혀 이른바 즉흥연주로 말해지는 놀라운 어법을 탄생시켰으며 또한 흑인 영가에서 비롯되었으되, 영가의 한서린 절규는 뒤로 물러앉고 현대인의 내밀한 고독을 파고들어 흑인만의 음악이 아닌 모두의 음악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바로 위의 진술은 '어제의 재즈'에 대한 설명이다. 오늘날의 재즈에도 이같은 평가를 내리려면 현실의 여러가지 현상을 애써 무시해야 한다. 재즈를, '흑인의 영혼을 노래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이후 마이클 잭슨과 MC 해머로 대표되는 랩 뮤직을 음악사에서 삭제해야 한다. 재즈를 '호소력 짙은 육감적인 음악'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빌 에반스 이후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인 키쓰 자렛의 실험적인 그랜드 피아노 연주를 듣지 말아야만 한다. 여기 두 명의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키스 자렛. 그들은 1970년대 초반에 자주 만난 적이 있다. 이때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황홀했던 전성기를 서서히 마감하던 때였으며 그의 유업을 이어받게 될 키스 자렛이 마일스 데이비스가 내린 역에서 새 열차로 갈아타던 때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란 이름은 재즈의 역사와 다름없다. 1926년 일리노이주 얼튼에서 태어난 그는 19세 때, 뉴욕 52번가에서 당대의 명장 찰리 파커와 만났으며 줄리어드 음대를 마치고 난 뒤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찰리 파커 밴드에서 활동을 개시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1949년 길 에반스의 편곡과 존 루이스, 제리 멀리건을 비롯한 9중주의 역사적 앨범 [쿨의 탄생]을 발표하여 50년대 쿨재즈를 개척하였다. 그후 얼마 동안 마약 중독으로 침체하였으나 1955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화려하게 복귀하여 존 콜트레인과 더불어 [카인드 오브 블루]를 만들어냈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을 최고 수준의 예술로 등극시킨 역사적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이후 빌 에반스와 함께 스페인 음조에 의한 재즈 음반을 구사하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1964년부터는 허비 행콕, 웨인 쇼터 등 젊은 뮤지션으로 퀸텟을 구성하여 [네퍼티티(Nefertiti)], [마술사(Dorcerer)] 등 캄보 밴드의 명작을 발표하였으며 1969년에는 일렉트릭 사운드를 도입한 [비치스 브류(Bitches Brew)]를 발표하여
퓨전 재즈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였다. 젊은 뮤지션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와 한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레코드 제작자에게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1975년의 교통사고 등으로 마일스 데이비스가 주춤하자 온갖 실험과 크로스 오버가 시도되는 백가쟁명의 시대가 된다. 존 매크러플린, 웨더 리포트, 칙 코레아 등 천재적인 뮤지션이 속속 자기 영역을 선언하는가 하면 윈튼 마샬리스가 나타나 '제2의 마일스'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마일스 데이비스가 걸어온 지독한 장인정신과 고독한 실험 정신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백가쟁명의 시대에 키쓰 자렛이 본격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여 진정으로 마일스 데이비스를 뒤를 잇게 된다. 마일스와 달리 그는 피아노를 자신의 무기로 선택하였다. 그는 피아니스트이지만 단순한 연주가가 아니며 재즈의 대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전통에 얽매어 있지 않은, 다시 말해 진정한 재즈 뮤지션이자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실험적인 예술가이기도 하다. 1945년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에서 태어난 키쓰 자렛은 1962년 재즈의 명문 버클리 음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1965년부터 뉴욕에 진출하여 아트 블레이키, 찰스 로이드 등과 공연하다가 비로소 1970년에 마일즈 데이비스 밴드에 참가하여 보다 깊은 재즈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키쓰 자렛은 1971년부터 듀이 레드맨, 찰리 헤이드, 폴 모션이 중심이 된 미국식 쿼텟과 얀 가바렉, 팔레 다니엘슨, 존 크리스텐센이 중심이 된 유럽식 쿼텟을 동시에 이끌다가 서서히 유럽식 쿼텟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나갔다. 또한 그는 1972년부터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재즈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감행하여 재즈 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써냈다. 그 어떤 재즈 뮤지션도 감행하지 못했던 폭넓고 깊은 음악 활동이 오직 키스 자렛 혼자 힘으로 시도되고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정통 클래식 피아니스트도 도전하기를 꺼려하는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과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집]을 녹음하여 화제 이상의 경탄을 자아냈다.
1980년부터는 게리 피콕, 잭 디조넷과 트리오를 결성하여 앨범 [변화(Changes)], [스탠더즈 라이브 1], [스탠더즈 라이브 2] 등을 발표하여 빌 에반스 이후 가장 격조놓은 피아니스트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얀 가바렉 등의 유럽식 쿼텟과 발표한 [소유(Belonging)]과 [나의 노래(My Song)]로 "완벽한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재즈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해 강력한 문제제기가 일기 시작한다. 1980년대 이후 키스 자렛의 연주를 '재즈'라고 할 수 있는가. 특히 로잔, 브레멘, 파리, 쾰른 등지에서 가진 피아노 솔로 연주를 재즈라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는가, 하는 본격적인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무려 60분이 훨씬 넘는 대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한 그의 음반을 재즈 항목에 넣을 수 있는 것인가. 그의 음반은 물론 레코드 매장의 재즈 코너에 꽂혀 있지만 말이다. 재즈를 양식과 정신으로 나누어 살필 때, 흔히 '즉흥 연주'와 '영혼의 호소력'으로 간단히 말한다. 사전에 아무런 약속도 악보도 없이 그저 간단한 주제를 교환한 뒤 곧장 강렬한 선율로 몰입해 들어가는 재즈의 묘미는 말할 수 없이 격정적이고 섬세하고 장렬하다. 그 드라마틱한 즉흥 연주 속에서 흑인 특유의 리듬과 울분이 뒤섞이는 것이다.
키쓰 자렛에게는 즉흥은 있되 격정은 없다. 흥겨움은 있되 울분은 없다. 요컨대 그는 60여 분이 넘는 대곡을 두드리면서 끊임없는 즉흥의 연속선을 따라가지만 그 밀도높은 음의 모험 끝에는 매우 지적이면서도 창백해 보이는 피아니스트가 남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라이브 음반에는 환호성은 들리지 않고 예의바른 박수 소리만 들린다.
키쓰 자렛에게 재즈 종말의 어떤 혐의를 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재즈의 한계 상황을 그 자신만이 '즉흥성'이란 화두를 부여잡고 안감힘을 쓰는 지 모른다. 50년대로 돌아가자는 일련의 경향에서는 회귀 본능 이상의 실험정신은 찾아볼 수 없고, '재즈의 현대화'를 외치는 경향에서는 깔끔하게 포장된 상품성밖에 보이지 않는다. 케니 G나 조지 윈스턴을 들으면서 재즈를 들었다고 말하기에는 난감한 노릇이다. 재즈가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는 곳도 미국이 아니라 서유럽과 일본이다.
어쩌면 재즈사가들은 60여 분 동안 혼자서 건반을 두들겨대는 키스 자렛을 마지막 재즈 뮤지션으로 인정할 지 모른다. 재즈를 구성하는 모든 핵심적인 요소가 마멸된 상황에서 그나마 '즉흥성'을 끝내 버리지 않고 즉흥 연주의 최고 밀도를 구축해나가는 키스 자렛. 그는 1993년에 새로 발표한 음반 제목을 [bye bye blackbird]로 삼았다. 여기서 '블랙버드'는 물론 마일스 데이비스이다. 5번째 곡 [마일스를 위하여]에서 키쓰 자렛은 게리 피코크와 잭 디조넷의 도움을 받아 일생을 실험과 창조로 버텨나갔던 불멸의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를 격정적으로 추모한다. 이 곡은 마일스에 대한 간절한 추모사이자 자신의 미래에게 부치는 고독한 등기속달이다.
출처 풀집아카데미 www.puljib.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