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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진스에는 광야 같은 세계관이 왜 없을까 (글 도우리)

seimo 2023. 2. 13. 14:50

*원문: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323.html

 

뉴진스에는 광야 같은 세계관이 왜 없을까

[요즘 대중가요, 사랑 타령 대신 ‘나 타령’]
‘갓생’ 그 자체인 완성형 신인 걸그룹… ‘능력’ ‘금수저’ ‘사랑받고 자란 티’까지 모두 합쳐야 이뤄지는 ‘자기애’의 현신
 
등록 2023.02.02 
 

요즘 취미로 걸그룹 댄스를 배우고 있다. 지난달에는 르세라핌의 <안티프래자일>(충격을 받을수록 강해지는 성질이라는 뜻)을 익혔다. 이 곡의 포인트 안무 이름은 ‘머슬캣’(Muscle Cat)인데, 뽀빠이처럼 팔을 들어 근육을 자랑하고 절벽을 타듯 앞발질한다. 원래 고양이 발 포인트 안무라면 티아라의 <뽀삐뽀삐>(Bo Peep Bo Peep) 아니던가. 그때는 ‘꾹꾹이’ 흉내를 위해 손톱을 숨긴 잼잼 주먹을 쥐었고, 여성의 근육도 드러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다음에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를 배우기로 했는데, 이때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대학교 장기자랑 무대에서 억지로 췄던 카라의 <프리티 걸>이다. 똑같이 손거울을 드는 동작이더라도 <프리티 걸> 때는 볼터치 흉내를 냈다면, <러브 다이브>에선 거울에 비친 나 자신에 빠져드는 모습을 표현한다. 그래서 내게 걸그룹 댄스 수업은 애교캣에서 머슬캣으로, 짝사랑에서 자기애로 건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차이는 단연 대중가요의 ‘사랑 타령’에서 ‘나 타령’으로의 변화다. 바야흐로 걸그룹 전성시대, 연애 감정 대신 당당한 자기애를 내세우는 노래가 대세다.


난 제일 높은 곳으로… 난 그냥 내가 되고 싶어…

 

17년 전 이 <한겨레21> 지면에 ‘왜 사랑 타령은 식지 않는가’라는 칼럼을 쓴 강준만 교수부터 “유행가 노래 가사는 사랑과 이별, 눈물이구나”라고 노래한 가수 송대관, ‘낭만적인 멜로디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부터 귀를 흐린다’고 지적했던 논객들 그리고 더 나아가 가부장제의 이성애 프로파간다가 담겼음을 간파한 페미니스트까지, 어떤 장르의 어떤 가수가 부르든 ‘대중가요=사랑 타령’이라는 공식은 견고해 보였는데, 이것이 어떻게 깨졌을까?

우선 시대의 변화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나 타령’ 곡들. 걸크러시(Girl Crush), 주체적 여성상 트렌드로도 묶이는 ‘나 타령’은 2019년 이후 데뷔한 4세대 걸그룹(혹은 멤버)이 불렀거나, 그 전 세대더라도 이 시기에 컴백해 발매한 곡들을 말한다.

“제일 높은 곳에 난 닿길 원해 (중략) 겁이 난 없지”(르세라핌 <피어리스>) “사랑 그깟 거 따위 내 눈에 눈물 한 방울 어림없지”((여자)아이들 <톰보이>) “I'm on the next level/ 더 강해져 자유롭게”(에스파 <넥스트 레벨>) “난 그냥 내가 되고 싶어 (I wanna be me, me, me)/ 굳이 뭔가 될 필요는 없어”(있지(ITZY) <워너비>)

아이브는 아예 나르시시즘을 세계관으로 표방한다. 아이브 <애프터 라이크> 뮤직비디오 영상 갈무리.

아예 나르시시즘을 세계관으로 표방하는 그룹도 있다. ‘초통령’(초등학생 대통령)으로 불리는 장원영이 소속된 아이브다. 아이브의 <나르시시즘 3부작>은 얼핏 일반적인 사랑 노래 같지만 실은 빠진 대상이 자기 자신이다. <일레븐>에서는 자신에게 10점 만점에 11점을 매겨주고, <러브 다이브>는 신화 속 나르키소스처럼 호수에 비친 자신에게 반해 뛰어드는 이야기를, <애프터 라이크>는 그 이후 자신에게 완전히 푹 빠져든 모습을 표현한다.

‘삼촌팬’을 휩쓸었던 2세대와 3세대 걸그룹들조차 컴백하며 들고나온 노래에는 오빠의 흔적이 싹 가셔 있는 경우가 많다.

“난 가장 높은 곳에서 (중략) 두렵지 않아 break it down”(카라 <웬 아이 무브>) “더 해봐 난 어떤 위기에도/ 휘어진다 해도 부러지진 않아”(소녀시대 <빌런>)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걸어가/ 날 멈추려 하지 마, 이게 나니까”(이엑스아이디(EXID) <불이나>) “너에게 맞춰서/ 살아간다는 게/ 더는 견디기 힘들어”(선미 <나르시시즘>)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거다. 당당함이 콘셉트인 걸그룹은 예전에도 있지 않았나? 보아의 <걸스 온 톱>이나 투애니원(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처럼. 또 4세대 걸그룹의 대세인 뉴진스의 노래는 모두 사랑 노래 아닌가?


두어 가지 장점만으로는 ‘감히’

 

걸그룹의 ‘나 타령’을 이해하려면 걸그룹 전성시대를 먼저 살펴야 한다. 2022년 수많은 기사와 칼럼에서 첫 문장 혹은 헤드라인으로 “바야흐로 걸그룹 전성시대”가 뽑혔다. 그리고 이 부흥은 단지 걸그룹이 많이 데뷔하고 대중이 그 노래를 많이 듣는 차원 이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걸그룹도 수익이 난다는 걸 증명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영업이익을 좌우하는 앨범 판매량이나 공연은 팬덤이 이끄는데, 그동안 팬덤을 모는 건 보이그룹이었다. 반면 걸그룹은 아무리 인지도가 높아도 ‘충성심’이 낮은 대중이 주요 팬층이기에 수익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업계의 오랜 공식이 깨졌다.

르세라핌의 세계관에는 소설가 김초엽이 참여했다. 르세라핌 <안티프래자일> 뮤직비디오. 

그 공식을 깬 핵심은 ‘여덕’(여성 덕후)이었다. ‘버닝썬 게이트’를 결정적 분기점으로 보이그룹에 크게 실망한 여덕이 대거 ‘탈덕’하고, 대신 주로 패션이나 스타일을 참고하는 대상이었던 걸그룹을 ‘워너비 아이콘’으로 따르면서다. 특히 걸그룹이 구사하는 여성성의 폭을 크게 확장한 덕분에 가능했다. 케이팝의 세계화로 글로벌 팬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섹시나 청순, 걸크러시라는 단기적인 콘셉트로는 한계가 있기에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설계하면서 돌파한 것이다. 르세라핌의 ‘크림슨 하트’라는 세계관은 네이버 웹툰과 웹소설로도 구현돼 있고 에스에프(SF) 소설가 김초엽도 참여할 정도로 치밀하게 짜였다. 그러니까 여덕은 광야를 누비며 뱀을 때려잡으면서 인공지능(AI)과 접속하는 세계관의 에스파, 기후위기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전지적 북극곡 시점’ 세계관의 드림캐쳐를 통해 대리만족하면서 동시에 다채롭게 세계를 해석하고 상상한다. 그리고 어떤 세계관이든 지금 시대의 여성이 닮고 싶고 동경할 걸그룹의 모습이라면 단연 ‘당당한 여성 주체’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나 타령’이 그리 유별난 현상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엠제트(MZ)세대의 별칭으로 ‘미제너레이션’(Me Generation, 나 세대)이 꼽히고, 믿을 건 나뿐인 개인주의 시대이자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가능하고 돈까지 벌어주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플랫폼이 열어젖힌 ‘관종의 시대’이기도 하니 아이돌 업계도 예외는 아닌 거라고.

하지만 지금 걸그룹의 ‘나 타령’은 좀더 특수한 맥락이 있다. 이들의 당당한 자기애는 두어 가지 장점만으로는 ‘감히’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돌 4세대를 두고 ‘완성형 아이돌의 시대’라고도 부르는데, 그만큼 완벽해야 한다.

먼저 능력. 요즘 아이돌의 가창력 논란, 정말 드물지 않은가. 아이돌이 극한직업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한 네티즌의 말로 지금 아이돌의 조건을 요약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때만 해도 그냥 나이트클럽에서 잘 논다는 애들 모아놓고 아이돌 만들었는데…. 요즘엔 진짜 아이돌 되려면 외모 예뻐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인성 좋아야 하고, 학창시절 학교폭력 논란 없어야 하고, 작사·작곡도 해야 하고, 2~3개 언어 해야 하고, 춤 잘 춰야 하고, 노래 잘 불러야 하고, 이젠 표정 연기까지도 잘해야 하고….”


뉴진스에는 광야나 초능력 같은 세계관이 왜 없을까

 

능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금수저여야 한다. 과거 아이돌은 자수성가 스토리도 자주 회자됐다. 동생과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단칸방에서 생활했다는 아이유,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고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가정사로 알려진 원더걸스의 선예,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십 대 때 소녀가장이 된 선미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스토리에 ‘그냥 예쁘고 잘생겨서 잘된 줄 알았는데 저렇게 노력했다니’라며 더욱 매력을 느끼고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요즘은 그 반대다. 아이돌은 ‘그저 취미’로 하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돈이 많고 집안도 좋으면서 똑똑하고 스펙도 좋았던 게 ‘셀링 포인트’가 된다. 아이돌의 집안 재력과 출신에 순위를 매기는 콘텐츠까지 있을 정도다. 지금 아이돌 사이에서도 완벽한 외모로 꼽히는 아이브의 장원영, 아스트로의 차은우조차 방송에서 학창 시절 성적과 학생회장 이력을 강조하고 변호사와 검사가 꿈이었다고 말했다.

자수성가를 강조에서 출신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변화한 아이돌 시장. 방송 화면 갈무리

완벽한 실력을 어필하는 아이돌 장원영(좌)과 차은우(우). <라디오스타> <아는 형님> 화면 갈무리.

금수저로도 충분하지 않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야 한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자 작가인 곽예인은 요즘 아이돌이 부모와 통화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친한 사이를 과시하는 콘텐츠가 마케팅 요소로 뜨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김살’이 없어 보여야 하니까. ‘어머니랑 연락하는 게 행복한 해원이 ㅋㅋㅋㅋ’ ‘채연이의 가족=‘예능캐’ [아이즈원/이채연/어머니, 아버지, ITZY 채령]’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콘텐츠는 놀랄 정도로 닮았다.

‘나 타령’에서 예외로 보이는 뉴진스도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나 타령’의 최정상이라 할 수 있다. 뉴진스의 <하이프 보이> 댄스 유튜브 영상에서 3만6천 명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이렇다. “얘들아… 사이좋게 지내고… 건강하고… 10년 이상은 가자… 너희만큼 완성형은 나오기가 힘들다 ㅠㅠ 사랑해” 뉴진스는 완성형 아이돌 사이에서도 완성형 아이돌로 불린다. 데뷔하자마자 ‘비주얼 멤버’가 따로 꼽히지 않을 만큼 모두 예쁘고 콘셉트가 ‘자연스러움’이 꼽힐 정도로 여유로움의 아우라가 진하게 풍겨서다.

뉴진스는 ‘영 리치 브이로거’의 현신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완성형’ 아이돌이다. 뉴진스 <어텐션> 뮤직비디오. 유튜브 채널 영상 갈무리

<코스모폴리탄>의 이예지 에디터는 칼럼 ‘뉴진스가 시대의 새 얼굴이 된 이유’에서 뉴진스를 ‘영 리치 브이로거의 현신’이라고 명명했다. “풍요로운 집안에서 듬뿍 사랑받고 자라나 구김 없는 딸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무해’한, 시대가 가장 열망하는 얼굴이 된 것”이라며 “‘강남 8학군 출신’이나 ‘가정교육 잘 받은’ ‘아빠가 교수’인 게 아이돌을 자랑하는 수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뉴진스는 더 큰 ‘시대관’을 담은 것이다.


나 타령 다음의 시대에 바라는 것
 
 

소설가 아밀은 문학잡지 <릿터>에 실은 글 ‘여자들이 사랑하는 무해한 걸크러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자 아이돌들은 ‘마르고 예쁘고 무해한 여자’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예쁘고 강인한 여자’를 완벽하게 재현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살, 성형 이력, 나이, 사생활, 과거, 가난, 가족사, 갈등, 출신을 모조리 도려내면서 지금 걸그룹의 안티프래자일한 자기애의 세계관이 유지되고 있다. 뒤집으면 어리고 완벽한 여성 청년에게 조금의 티끌조차 견딜 수 없는 이 시대는 너무나 프래자일하다.

‘나 타령은 식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될 칼럼이 쓰일 미래는, 다시 아밀의 말을 빌리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여자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세계이기를 바란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대표적인 4세대 걸그룹 이름 뜻
에스파(aespa) ‘Avatar(아바타) × Experience(경험)’를 표현한 ‘æ’와 ‘aspect’(양면)를 합친 조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 ae를 만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세계관
아이브(IVE) I HAVE의 축약형인 I'VE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내가 가진(have) 것을 모두 당당히 보여준다는 뜻
르세라핌(LE SSERAFIM) ‘I’M FEARLESS’(난 겁이 없지)를 재배치한 이름으로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자기 확신을 담음
엔믹스(NMIXX) Now, New, Next, 미지수 n을 뜻하는 문자 ‘N'과 조합, 다양성을 상징하는 단어 ‘MIX'의 합성어.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최상의 조합’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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