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보이 문화에 대한 단상 (글 이동연)
원문: www.vop.co.kr/A00000064540.html
한국 비보이(B-boy)의 문화에 대한 단상
문화자본의 이윤추구와 문화다양성의 논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이동연
입력 2007-03-01
한국의 비보이 문화가 언더그라운드를 넘어서서 세계무대에서 성공하면서 포스트 한류바람이 불고 있다. 기업과 미디어들의 과잉된 상업화 기획에 편승하여 문화관광부는 물론 국회의 한류연구회까지 가세하고 나서는 형국이다. 그러나 비보이 문화를 형성한 사회적 배경과 문화적 계기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비보이의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윤추구에 목을 건 주류 대중문화산업에 포획된 또 하나의 박제화된 상품만이 남을 것이다.
올 초 지역 청소년 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안산시 청소년수련관에서 댄스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열혈 비보이(B-boy)들이다. 지하 1층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10여명의 청소년들이 나에게 제일 먼저 했던 말은 24시간 춤을 추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하철 맨바닥에서 직원들의 단속을 피해가며 춤을 추던 시절에 비한다면 청소년수련관 지하 연습실은 천국 같은 곳이지만, 모든 것을 잊고 춤에 빠진 이들에게 밤 10시라는 이용시간은 가혹한 족쇄인 셈이다. 왜 그리도 춤추는 게 좋은지 물어보았을 때, 이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좋아서요.
한국 비보이(B-boy)의 문화에 대한 단상
비보이 문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 휴스턴과 뉴욕 부르클린 흑인 슬럼가 거리에서 자본과 인종으로부터 버림받은 비보이들은 춤을 추는 것이 그냥 좋아서 폭력 대신 ‘댄스 배틀’을 선택하며 새로운 거리문화, 하위문화를 형성했다. 비보이 문화는 1980년대 신보수주의 시절, 백인 중심의 뉴웨이브 문화를 대체하는 흑인 슬램 문화의 형성과 그 맥을 같이하면서 앰싱(MCing:래퍼들의 소리), 그레피티(graffiti:스프레이로 거리에서 낙서를 하는 퍼퍼먼스), DJ와 함께 이른바 힙합문화의 4대 요소로 자리잡았다. 가난한 흑인들에게 거리에서의 비보이는 학교를 대신하는 자생적인 자기 놀이이며,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은 채 선의의 경쟁으로 다양한 춤 기술을 진화시킨 또래문화의 전위이다. 비보이는 1990년대에 오면 흑인들만의 문화에서 백인 청년들도 가세하면서 새로운 청소년 하위문화로 발전했고, 다양한 기술적인 진화와 댄스배틀 대회의 개최 등으로 독자적인 문화영역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비보이 문화가 한국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은 두 가지의 계기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계기는 1990년대 초반 한국에 상륙한 힙합문화의 형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른바 힙합 댄스그룹들이 주류 대중음악 시장의 등장은 비보이 문화의 원시적 토대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노이즈‘와 같은 댄스그룹들이 1980년대 인기를 얻었던 브레이크 댄스를 힙합적인 요소로 변형하여 춤을 대중음악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 양현석, 듀스의 이현도, 그리고 현진영 등은 당시 언더그라운드 나이트 클럽에서 유흥거리로 인식했던 춤을 주류 음악의 중심 반열에 올려놓았다. 댄스그룹들의 역동적인 춤동작은 단번에 청소년들의 문화적 감성을 자극해서 노래보다는 ’백댄서‘를 더 선호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 비보이들에게 한국적 힙합 댄스는 상업적인 음악을 뒤에서 보조하는 무대의 엑스트라행위에 불과했다. 힙합 음악은 이제 주류 음악으로 성장했지만, 춤은 독립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1997년 한국 최초의 비보이 그룹인 ‘익스프레션’이 탄생하게 된 계기도 춤을 상업적인 댄스 음악의 시장에서 건져내어 독자적인 문화표현의 양식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비보이들은 아이돌 스타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대중의 아티스트로 탄생한 것이다.
‘그냥 좋아서’ 형성된 비보이 문화
비주류 문화의 장에서 활동하던 비보이들이 대중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 최근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세계적인 비보이 경연대회 중의 하나인 독일의 ‘베틀 오브 더 이어2005(Battle of the Year2005)’에서 한국 대표로 나간 ‘라스트 포원’(Last4One)이 우승하면서 한국의 포탈 미디어와 주류 언론 방송사는 이 소식을 “유럽에서 부는 제2의 한류”로 포장해 대대적인 소개를 하였다. 비보이 문화 대중화의 두 번째 계기는 바로 비보이의 국제화이다. 물론 한국의 비보이들은 이미 2002, 2004, 2005 영국 ‘비보이 챔피언십 우승’, 2002, 2004 ‘베틀 오브 더 이어’에서 우승한 전력을 갖고 있어 유럽에서는 명성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터였다.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유럽 비보이 매니아들, 단단한 체격의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비보이팀들을 베틀경기에서 보기 좋게 넉아웃 시켜버리는 현장을 미디어가 집중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비보이들은 거리의 불량배에서 민족의 역동적 에너지를 발산한 영웅으로 전환한다.
비보이 문화는 순식간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신드롬이 되었다. 기업이나 지방자치 단체에서 개최하는 각종 페스티벌의 주요 이벤트 행사에 비보이들은 단골손님으로 출연하고, 삼성 싱크마스터, SKT, 멜론, 비보이를 모델로 하는 광고들이 줄을 잇고 있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마리오네트‘, ’비트 앤 비보이‘, ’더 코드‘ 등 비보이를 소재로 한 공연작품들도 인기를 얻고 있고, 올 여름에 MBC 드라마 ’오버더 레인 보우‘가 비보이들의 우애를 담았은가 하면, 내년에는 ’브레이커즈‘라는 비보이 관련 영화가 개봉될 예정이다. 대학 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비보이 퍼퍼먼스이고, 가장 인기있는 교양과목 중의 하나도 ’비보이배우기‘이다. 대중들은 왜 비보이 문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비보이 신드롬은 두 가지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보이가 다원화되는 청년 하위문화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문화적 탈출구라는 점이다. 제도화된 공교육 시스템, 학벌과 배경이 지배하는 관료화된 사회, 그리고 일방적인 성공신화를 강요하는 기성사회를 거스르며, 비보이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실험한 춤동작을 소중한 자산으로 삼길 원한다. 토마스, 엘보우프리즈, 윈드밀, 헤드스핀 등 고난도의 기술의 반복적으로 시도한 끝에 새롭고 난해한 동작들이 성공하면, 이들은 새로운 희열을 느낀다. 새로운 춤 형식은 그들에게는 소중한 육체의 자산이 된다. 춤을 추는 곳이 번듯한 공연장이 아니어도, 춤추는 장면을 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비보이들은 자신들의 자생적인 즐거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한다. 이들이 선보이는 프리스타일의 춤, 자유분방하고 펑키한 리듬,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은 격자 속에 갇힌 세상의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비보이들 간의 격렬한 댄스 배틀과 화려한 ‘루틴’(비보이 그룹들 멤버들이 한 동작을 집단적으로 는 춤)은 선의의 ‘도전과 응수’의 교환행위를 통해 공동체적 감성을 공유하려는 하위문화적 가치들을 드러낸다.
두 번째, 한국의 비보이 문화는 탈식민지적 전복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1980년대 초 마이클 잭슨의 브레이크 댄스는 한국 댄서들에게는 원초적 모방의 성소였다. 한국 댄서들이나 대중들은 “Beat it”이나 ”Like a Virgin”의 노래에 맞춰 블레이크 댄스를 추는 마이클 잭슨을 흉내내며 미국 팝문화의 경지에 매료되었다. 한국 댄서들이 마이클 잭슨을 넘어설 수 있을까? 우리는 운명적으로 서양 댄서들이 만들어 놓은 춤을 따라하는 모방자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비보이는 서양의 교본을 넘어 한국적 프리스타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한국 비보이들은 스스로 서양 춤의 모방자라는 운명의 딱지를 떼어내고 세계 비보이 신의 중심에 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1세대 한국 비보이들은 외국의 유명한 비보이들의 춤을 따라하면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적으로 흉내냈지만, 지금은 외국 비보이들이 한국 비보이들의 춤을 교본 삼아 훈련에 매진하는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외국의 비보이 배틀대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비보이들의 춤은 새로운 교과서가 되고, 이들의 헌신적인 열정은 감동적인 에피소드로 회자된다.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던 원본 비보이의 신화는 한국이라는 낮선 국지적 장소에서 새로운 춤의 문화로 재창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보이들은 한국적 사물놀이의 리듬에 맞춰 토착적인 춤동작을 선보이기도 하고, 역동적인 힘을 발산하는 다양한 기술들을 개발한다.
한국에서 비보이 문화의 신드롬은 바로 이러한 한국 비보이들의 글로벌한 성공에 기인한다. 외국 비보이를 압도하는 현란하고 화려한 춤동작을 보면서 대중들은 문화적 자긍심을 갖게 되고, 비보이 문화의 글로벌 경쟁력을 통해 문화적 탈식민화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이는 마치 일본에서의 ‘겨울연가’ 신드롬, 중화권 국가에서의 ‘대장금 신드롬’,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비’ 신드롬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주는 문화민족주의적 정서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비보이 문화신드롬은 이러한 하위문화적 가치와 탈식민지적 전복의 가치들을 재흡수하려는 문화자본의 논리에 의해 포획당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고 있다. 비보이 문화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과정에는 비보이 문화를 상품형식으로 변형하려는 상업적인 이해관계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보이를 소재로 하는 뮤지컬, 드라마, 영화, 광고들은 비보이의 문화적인 맥락과 유산에 대한 충분한 의미부여 없이 상업적인 관객 개발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전략들을 노골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물론 비보이 문화가 주쥬문화의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비보이 문화가 주류로 진입할만큼 우리의 문화환경이 투명하고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문화적 성찰 없는 상업화
1970년대 영국의 급진적인 펑크문화가 기성 주류 부모세대들의 문화에 반기를 들고 자신들만의 하위문화적 스타일을 통해 저항하다 결국 이들의 정화시키고자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복당하거나, 이들의 저항적인 스타일이 고급 패션 브랜드의 상품형식으로 전환되었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동시대 한국의 비보이 문화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상품형식적인 흡수 전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에는 이미 300여명의 전문 비보이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고, 전문 비보이의 미래를 꿈꾸며 오늘도 열심히 춤에 미쳐 사는 청소년들이 있다. 이들의 문화적 욕망, 문화적 감성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려면 비보이 문화를 대중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류 문화의 엔터테인먼트 도구로 활용당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비보이 문화를 주류 문화산업 시장에서 상품화하려는 기획들은 너무 많이 과잉되어 있다. 이러한 기획들이 충분한 준비와 이해없이 비보이 문화를 왜곡할 경우, 한국의 비보이 문화는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비보이 문화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이 없는 미디어의 과잉된 관심과 이것을 문화민족주의적으로 전유하려는 대중들의 나르시시즘은 비보이 문화의 진실된 힘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비보이 문화는 기본적으로 국경, 인종, 경제를 넘어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비보이가 한국의 문화다양성을 실현하고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문화적 자유를 꿈꾸는 자들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문화로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춤을 추는 것을 행복해하는 사람들에게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것이 비보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