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 담론의 보호구역이 된 한국 힙합 (글 윤광은)
[culture critic] 한국 힙합이 보수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방식
[미디어스] 2000년대는 자기 계발의 시대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한국엔 신자유주의 질서가 확립됐다. 노동 유연화가 진행되고 시장 경쟁이 이념화되며 개인의 삶은 사회를 떠나 온전한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서점가에는 당신의 인생을 진화시킬 계율을 알려주겠노라는 자기 계발 서적이 범람했다. 자기 계발 담론은 곧 긍정성의 담론이었다. 참여정부 시절은 저성장과 실업난이 만성화되기 직전이었고 한 해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것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기업가처럼 경영하는 “부자 되세요”의 희망을 전파하는 담론, 노력하면 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00년대 말 신자유주의 체제가 금융위기를 맞고 저성장이 일상화되면서 자기 계발 담론은 전면에서 후퇴했다.
2010년대 초반 이 빈자리에서 자라난 것이 힐링-멘토 담론이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에는 ‘헬조선’이 사회의 주류 담론으로 교체되었다. 자기 계발 -> 힐링-멘토 -> 헬조선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나열해 서사화해 보면 이렇다.
“‘하면 된다’는 희망을 품고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힘겹다. 날 이끌어주는 멘토와 치유가 필요하다.” “아무리 해봐도 안 된다. 세상은 지옥이다.”
경제난과 고용난이 고착되며 노력에 의한 상승 가능성이 헛되어진 시대에 사회를 향한 절망에 찬 저주가 울려 퍼졌다. 이제 자기 계발의 주문은 찢어진 공수표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자기 계발 담론은 양태가 뒤바뀐 채 살아남아 있다. 00년대 자기 계발이 긍정성의 담론이었다면 10년대 자기 계발은 부정성의 담론이다. "나도 노력을 하자"가 아니라 "노력 안 하는 너"를 향한 혐오와 차별의식이다. 이것의 짝패와도 같이 '무임승차 혐오'가 시대정신이 되었다. “노력은 안 하고 대가만 요구하는 ‘헬조선 개돼지’들 때문에 내 노력이 무효가 된다.” 헬조선 담론 이후에는 젠더 담론이 한국 사회의 논제가 되었는데, 여기에도 부정성의 담론은 바탕에 깔려있다.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남성들은 여성들이 노력은 하지 않고 권리만 챙기는 무임승차자, ‘뷔페미니즘’의 이용객이라 비방한다.
힙합은 이런 시대에 부흥했다. 00년대까지 비주류 장르 음악이자 주류 가요계 내에서 제한적으로 용인되던 힙합이 메인스트림 장르 음악이 된 것에는 ‘쇼미 더 머니’로 대변되는 음악산업적 배경이 있겠다. 하지만 힙합이 젊은 세대 내에서 열광을 부르며 문화적 현상으로 발전한 것에는 사회적 흐름에 따른 배경이 있을 것 같다. 우선, 래퍼들이 전시하는 이미지와 삶의 이념은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과 잘 맞물린다. 00년대 힙합이 비주류 장르답게 자조와 공감의 음악이었다면 미국 메인스트림 힙합의 물질주의와 자기 과시의 문법이 대거 수입된 현세대 한국 힙합은 노력과 성공, 향락의 음악이다.
래퍼들은 자신이 번 돈다발과 포르셰 차키를 인스타그램에 쉴 틈 없이 전시한다. 래퍼들이 뱉는 플렉스 flex라는 낱말은 대략 사치를 자랑한다는 뜻으로 통하는 관용어, 유행어가 되어 힙합 신 바깥에까지 퍼졌다. 이렇듯 현재를 아낌없이 소비하는 태도는 비정규직 증가, 임금 체계와 부동산 가격 체계의 불일치 등으로 안정된 미래가 소실돼 가는 현실에서 현재를 저축하는 대신 소비로 전환해 위안을 찾는 세태와 통한다. 이른바 ‘소확행’이라 불렸던 트렌드가 그런 맥락에 있다. 이삼십 대 젊은 남성이 주 방문자인 커뮤니티 ‘에프엠 코리아’에는 그 나름의 작은 사치를 부려 “플렉스 했지 뭐야”라고 유행어를 따라 읊는 게시물이 자주 올라온다.
래퍼들의 성공 서사는 제도적 삶의 경로가 불투명해진 현실 속에 부상한 대안적 계층 이동 방식 중 하나다. 현재 한국 사회의 한 경향은 직업의 안정성이 줄어드는 한편, 안정성은 극히 유동적이지만 개인의 콘텐츠를 판매하며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새로운 선호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1인 미디어를 통해 유명세를 광고료와 후원금으로 환급하는 유명세 경쟁 시장, 그 안에서 수익을 얻는 개인 방송 진행자, 유튜버, 유명 SNS 유저 등이 그런 사례다. 웹툰과 웹소설 작가, 전문 강사 같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힙합의 메인스트림화를 이끈 음악채널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방송 <쇼미 더 머니>는 래퍼들에게 유명세를 배당하고 행사료를 책정해주며 랩스타란 존재를 탄생시켰다. 래퍼는 몇십 분간의 공연 행사를 통해 수백만 원을 상회하는 출연료를 받는 지극히 수익성이 높은 직업이다. 규칙적 삶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즐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즐기며 ‘플렉스’하는 그들은 젊은 대중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저임금 노동과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절대다수의 대학생이 있기에 래퍼들의 삶이 특별해 보인다. 힙합 커뮤니티와 사운드 클라우드에선 래퍼를 지망한다는 십 대, 이십 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래퍼가 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는 중고생, 그들을 믿고 음악 장비를 지원해준다는 부모들 얘기 역시 들린다.
2년 전 십 대 출연자들의 <쇼미 더 머니>로 론칭된 엠넷 <고등 래퍼>는 미성년자 래퍼 지망생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해주고 기성 힙합 레이블 드래프트를 제공하는 기회의 장이 되었다. 실제로 이런 루트를 밟아 성공한 십 대 래퍼들이 시즌마다 있었다. 힙합 오디션 방송이 제도 교육을 대신해 계층 이동을 제공하는 입시장, 또 다른 계열의 예체능 입시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는 전체 중고생 숫자에 비춰 소수일 것이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갈수록 줄어드는 취업 시장에서의 대학 프리미엄이 있다. 극적으로 말하면, 직업 안정성이 소진되어 가는 사회에서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대학 입시 대신 공무원 시험을 쳐서 안정성을 확보하든가, 불안정한 대신 판돈을 크게 배팅하는 '고등 래퍼'가 되는 것이다. ‘고시 낭인’ 대신 ‘유튜브 낭인’이란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교육을 통한 성공 가능성이 좁아지면서 래퍼와 1인 크리에이터, SNS 셀럽을 꿈꾸며 미디어를 통한 일확천금을 노린다. 이건 게토라 불리는 미국 흑인 사회와 흡사한 풍경이다. 비유컨대, 한국 사회가 거대한 게토가 되어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래퍼들은 이런 시대에도 "바닥에서 정상으로" 가는 삶을 현존으로 증명하는 실러캔스다. 현재 한국 힙합에선 ‘플렉스’와 함께 부단한 음악 작업을 뜻하는 ‘허슬’, 그리고 ‘셀프 메이드’가 장르적 관습을 대표하고 있다(물론 이것들은 미국 힙합에서도 대표적 관습에 속한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각각 ‘노오력’과 자수성가다. 이 관습들은 래퍼들의 자기 계발 서사를 위인전기화하며 퍼트린다. 래퍼들은 가사와 인터뷰, 인스타 라이브 방송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작업하는지, 혹은 게으른 래퍼들이 얼마나 하찮은지 강변한다. 한편으론 소수의 래퍼가 인디펜던트 레이블을 결성하고 혹은 아예 1인 기획사를 차리는 방식으로 수익이 극대화한다. 래퍼는 자신의 음악을 직접 기획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성격 또한 짙은 창작자다. 음악 노선과 활동 방향 및 스케줄 등 활동 사항을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물론, 말 그대로 회사를 경영하며 과거의 자기 계발 담론이 설파하던 ‘기업가적 주체’가 된다.
한국 힙합은 어떻게 자기계발 담론의 보호구역이 되었나
한국 힙합은 자기 계발 담론이 퇴장한 사회에서 그것의 논리가 원형대로 살아 숨 쉬는 보호구역이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대두한 자기 계발의 부정성의 문법을 '윤리화'하는 담론장이 바로 힙합 신이다. 래퍼들의 성공 서사가 현존하기에 "나는 했잖아. 너는 왜 안 해? 성공한 사람 질투나 하는 루저들"이란 문법이 배틀 랩 가사의 절대적 지분을 차지한다. 노력과 같은 생산적 가치가 곧 긍정성으로 등치 되며, 노력하는 대신 불평하는 자들을 경멸하는 부정적 감정 양태를 긍정성의 맥락으로 뒤틀어준다. 힙합 신에서 통하는 관용어를 빌리자면 “Good Vibes only, Bad Vibes lonely” 혹은 “부정적 기운을 멀리하고 긍정적 기운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계발의 서사는 필연적으로 보수성에 도착한다. 그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준비를 때려치우며 제도적 삶의 행로에서 과감하게 일탈한 이들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투신하는 곳은 음악 산업 독과점에 기반을 둔 <쇼미 더 머니>, 또 다른 거대한 제도다. <쇼미 더 머니>는 언더 힙합 신 식민화, 장르 문화 왜곡, ‘악마의 편집’ 등으로 그 시작부터 힙합 신 내부에서 극심한 반발을 불렀지만, 래퍼들을 젊은 갑부로 출세시키는 기적을 보여주며 힙합 신의 투항을 끌어냈다.
래퍼들은 음악인으로서의 자존심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 컸다고 말하거나,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시스템을 이용하는 게 현명하다고 합리화하고, 심지어 <쇼미 더 머니>를 비판하는 래퍼들을 경쟁을 두려워하는 비겁자, 잘나가는 래퍼를 질투하며 ‘반 쇼미 더 머니’ 장사를 하는 기회주의자라고 거꾸로 비난했다. 래퍼들은 가지각색의 숱한 논란으로 사회적 구설수에 오르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이들이 자신을 방어하는 논리도 이렇다. “그냥 솔직하게 내가 부럽다고 말해. 잘나가니까 질투하는 거잖아.” 이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구조는 돌이킬 수 없는 자연의 섭리와 같아 순응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조가 논외 돼 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삭제된다. 세상은 개인의 노력과 성공에 의한 승자와 패자로 양분되며, 물질적 영화는 곧 모든 윤리적 비판을 무력화하는 최강의 윤리다. 패자는 구조의 공정성에 그 어떤 반문을 제기해도 불평불만에 찬 무능한 패배자로서 비윤리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래퍼들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쇼미 더 머니>와 별개의 음악 노선을 관철하는 창작자도 있으며 이 방송에 출연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받을 수는 없다. 한편으론 일부 래퍼들의 오만한 태도는 힙합 팬들에게조차 비판받을 때가 있다. 논점은 이런 차이조차 넘나들며 물밑에서 강화되는 이데올로기다. 도끼와 빈지노, 더 콰이엇, 박재범은 힙합 신 리스너들에게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래퍼들이다. 리스너들이 예찬하는 저들의 덕목은 시시비비에 엮이지 않고 사업에 몰두하며 큰 성공을 거둔 음악가, 모범적 자기 계발 주체로서의 면모다. 평소 이들을 통해 회자되는 래퍼들 처신의 본보기는 남이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일에 ‘허슬’하는 태도다. 그건 논쟁을 단절하고 사회적 세계를 개인의 세계로 대신하는 것과도 같다. 앞서 언급한 부정성의 문법으로 번안하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삶이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구조를 향한 시선의 차단은 보수적 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를 비판시하며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 구조맹과 통한다. 한국 힙합은 개인들이 각개약진으로 최선을 다하면 보답을 얻을 수 있다는 보수적 가치가 더이상 실현되기 힘든 시대에, 여전히 그것이 작동하고 있다고 논픽션을 상영하는 극장이 되어 젊은 세대 일각에서 보수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재생산하고 있다.
정말로 래퍼들은 자력으로 삶을 엎은 인생극장의 주인공일까? 그 많은 자수성가 가사가 난무하는 와중에도, 돈 잘 버는 래퍼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래퍼 개인과 레이블에 따라 빈부격차가 있는 것도 물론이다. 그들에게 부를 안겨준 건 그들 자신의 힘을 넘어 <쇼미 더 머니>라는 시스템인 것도 분명하다. 한국 래퍼들의 허슬-셀프 메이드 서사가 얼마나 허구적이냐면, <쇼미 더 머니>에 출연해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쇼미 더 머니>에 출연할수록 작업물이 적다. 작업할 시간에 방송 나가고 행사 뛰며 ‘연예인 놀이’하니까 당연하다. 그 바깥에서 아무리 ‘허슬’해 봐야 듣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사회 계층을 대표할 수 없는 예체능의 영역에서 작성되는 성공 서사가 사회 환경과 조응하는 이데올로기로 성장했다. 하지만, 잘 뜯어보면 그 안에서도 노력의 효과를 차별적으로 증폭해주는, 기회를 독과점하는 불평등의 구조가 세워져 있다.
윤광은 https://brunch.co.kr/@mcwan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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