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적 장르가 된 한국 힙합 (글 윤광은)
[culture critic] 힙합은 저항의 음악인가 과시의 음악인가?
[미디어스] 래퍼 이센스는 지난달 한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접했다. ‘힙합은 저항 정신이라고 하는데 래퍼들이 우리 사회를 담는 이야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센스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는 래퍼의 선택에 달렸고 오히려 힙합은 파티 음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짧은 문답에는 래퍼 및 리스너 등 힙합 신 구성원들과 힙합 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힙합의 ‘본질’이 어떻게 엇갈리고 맞서는지 도식화돼 있다.
이센스의 말이 맞다. 한국에서 힙합의 뿌리는 저항이요, 힙합은 곧 저항 정신이라고 이야기되지만 힙합의 사운드는 파티장에서 디제이가 흥을 돋우기 위해 고안한 턴테이블 스킬에서 비롯되었다. 힙합이든 다른 어떤 문화 예술이든 개별 창작자가 어떤 당위에 의해 특정한 주제를 다루라고 요구받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이센스의 말이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힙합이란 장르 음악의 연원은 파티장에 있지만, 힙합은 랩과 비트를 넘어선 문화이기도 하다. 힙합이란 문화의 바탕에는 미국 흑인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이 폭넓게 깔려 있어 분리할 수가 없다. 다인종 국가 미국의 소수 인종으로서, 흔히 게토라 불리는 빈민가-우범지대에서 살아가는 미국 흑인들의 삶의 특수성이 반영된 음악이 힙합이다. 이 점은 사회적 주제 (한국식으로 말하면 ‘저항 정신’) 등을 다루는 하위 장르 컨셔스 랩으로 표현되는 것은 물론, 언뜻 사회의식과 무관해 보이는 힙합의 여타 표현 양식 아래에도 잠재돼 있는 경우가 많다.
랩은 래퍼가 직접 가사를 쓰며 사적 화자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래퍼들이 자신이 나고 자란 거리와 게토에 관해, 일상화된 수난을 말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미국 힙합에는 왜 그렇게 자수성가와 부귀영화를 과시하는 가사가 많을까. 랩 스타들이 척박하고 핍박받는 공동체 게토에서 성공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원은 없고 흑인의 사회 진출이 차별당하는 상황에서 매달릴 수 있는 비상구는 음악을 통해 인생을 뒤집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힙합이 진보적 음악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힙합은 보수적 색채 또한 강렬한 음악이다. 인종 차별에 항거하는 ‘저항 정신’이 미국 힙합의 한 계보를 이룬다면, 돈에 대한 찬미, 성공에 대한 갈구, ‘셀프 메이드’로 대변되는 능력주의, 남성성에 대한 집착, 그 배면과 같은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또한 엄연히 미국 힙합의 뿌리 깊은 관습이다. 힙합은, 약자들의 음악이라는 진보성과 약자를 혐오하고 강함을 동경하는 보수성이 혼재하는 모순된 음악이다. 한국에서 힙합이 받아들여지는 이상한 광경은, 힙합 신 내부와 힙합 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제각각 관성적 인식을 거쳐, 저 둘 중 하나가 힙합의 본바탕이라 주장하며 장르의 성격을 취사적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래퍼들이 미국처럼 사회적 랩을 뱉어야 한다 아니다 당위를 떠나, 먼저 주목해야 하는 건 장르가 영위되는 한국과 미국의 현실이다. 한국 래퍼들은 미국 흑인들처럼 인종 차별 같은 특수한 권력관계의 당사자가 아니라 보편적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에 저항하는 가사를 자연스레 뱉을 계기가 부족하고, 당사사적 입장이 결여돼 있기에 특별한 연대 의식을 발휘하지 않고는 사회 의제에 대한 발언도 드물 수밖에 없다. 또한 미국 래퍼들은 기층 흑인들과 게토를 공유하는 반면, 한국 래퍼들에겐 자신들을 기층 시민들과 묶어주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 한국 사회에는 국민, 민족 같은 거대한 단일 정체성이 팽배하여 계층적 자의식이 깃든 개별 정체성이 설 자리가 비좁으며 공동체의 기반이 점점 흩어져 간다.
요 몇 년 간 한국 힙합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부흥한 것에는 역설적으로 공동체가 흩어지고 개인적 삶의 양식이 강해진 세태가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스웨거’와 ‘플렉스’로 요약되는 강력한 자의식, 주어 ‘나’를 과시하는 거침없는 면모가 매력적으로 다가갔을 것 같다. 그들에게 힙합은 돈과 목걸이, 과시와 성공의 음악, 디스와 혐오 가사를 뱉으며 뱃속에 든 날 것의 말을 토하는 ‘솔직한’ 음악으로 통한다. 이는 곧 사회에 만연해 가는 능력주의와 소수자 혐오 같은 동향과 공명하는 상태다.
돈(힘)을 향한 숭배, 약한 것을 향한 능멸, 허슬(노오력) 이데올로기, 자수성가 신화와 그 거울상 같은 무임승차 혐오, 진지한 것을 향한 적개심(‘씹선비’). 현재 한국 힙합이 영위하는 관습은 인터넷에서 표출되는 넷 우익들의 이념, 힘과 위악의 논리와 일대일로 매칭이 되는 수준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자수성가 이데올로기가 강한 사회지만 오랜 양극화로 인해 자수성가가 요원해졌다. 그런 억눌림이 극우적 이데올로기로 비화되고 있는데, 이 점이 자수성가를 신봉하는 힙합의 관습과 왜곡된 모습으로 조우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스스로 ‘노오력’하는 대신 사회를 향해 떼를 쓰는 약자들을 혐오하는 누군가가 래퍼들의 Came From The Bottom(내 힘으로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왔다)에 감복하고 있다면 어찌할 텐가?
장르적 보수성의 강도에서 한국 힙합이 미국 힙합보다 심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미국 힙합은 게토를 공유하는 약자들의 형제애가 장르의 보수성을 중화해준다. 흑인 래퍼들은 형제들의 현실을 대표하는 정치적 랩을 발표하고, 랩 스타가 된 후에도 뿌리를 잊지 않는다. 때문에 인종 탄압에 대항하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래퍼들이 동참했고, “나는 성공한 흑인이다. 중요한 건 내 인생이다.”라고 BLM을 외면한 래퍼 릴 웨인이 그의 절친 래퍼 티아이에게 공개적으로 비난당했다. 미국 힙합에 자수성가 신화와 게토를 향한 유대감이 공존한다면 한국 힙합에는 전자만 있다. 만약 어떤 미국 래퍼가 가난하고 게으른 흑인들 운운하는 가사를 쓴다면 어마어마한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반면 한국 힙합에는 능력주의 서사가 아래쪽을 향해 흘러내리는 걸 일정 부분 막아주는 공동체적 요소가 부재하고, 도리어 가난한 공동체 기층을 경멸하는 위악으로 돈벌이 서사가 성립한다(“잘 나가는 사람 질투하지 말고 그냥 네 인생을 살아 루저들아”라고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대꾸하는 레퍼토리는 래퍼들과 그 팬들의 상투어가 된 지 오래다).
2010년대에 방영된 <쇼미 더 머니>는 힙합을 메인스트림 장르 음악으로 만드는 데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 방송은 머니 스웨거와 디스 랩 같은 선정적 요소를 앞세워 흥행했고, 그만큼 한국 힙합은 편중된 방식으로 소개되고 구성되었다. 힙합의 모순되고 풍부한 면모 중 특정한 관습의 겉면만 뜯겨와 힙합의 모든 모습처럼 점철되었고, 한국 힙합은 장르의 진보적 성격은 적출된 채 보수적 성격이 극대화된, 극우적 장르가 되고 말았다. 문제는 힙합은 원래 저항의 음악인데 한국에서는 변질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장르에 담긴 보수성이 상이한 사회적·문화적 현실로 인한 굴절을 거쳐 한층 치우친 채 재현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 현실을 논외로 하고 한국 힙합의 현주소를 토론한들 겉핥기에 불과하다.
윤광은 https://brunch.co.kr/@mcwan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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