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과 정신건강 (글 장창현)
힙합과 정신건강
정신건강의학과의사 장창현 (함께하는정신과의원)
도시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도시로 이사 오면서 가족의 삶도 따라 움직였다. 시골에서의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그 때 힘이 되어 준 건 두 가지였다. 가족과 음악.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처음 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그들의 음악을 도시의 중학교에서도 다시 만났다. ‘재미’로 다가오던 그들의 음악이 ‘위로’로 바뀌는 지점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듀스 너머의 닥터 드레(Dr. Dre) , 서태지와 아이들 너머의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 을 만났고, 무엇보다 힙합 아티스트 투팍(2Pac) 과 조우했다. 그가 내뱉는 에프 워즈(F words) 는 내면의 분노를 풀어 내는 창구가 됐고, 그의 말은 어떤 위로보다 강력했다. 투팍의 대표곡 ‘Me against the world’ 의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때때로 힘들다는 거 알아. 그래도 이거 하나만 기억해. 어두운 밤이 지나면 더 밝은 날이 온다는 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넌 할 수 있어.”
이후로도 래퍼들은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며 롤모델이 되어주었다. 에미넴(Eminem) 의 ’Lose yourself’ 를 통해 마주한 기회를 놓치지 않겠단 의지를 다졌고, 카니에 웨스트(Kanye West) 의’Through the wire’ 를 들으며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의 진면목을 보았으며, 가 음악을 믹스테입(Mixtape) 형태로 대가 없이 세상과 나누고자 하는 챈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의 태도를 통해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세상과 나눌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치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Heinz Kohut) 이 말한 이상화전이(Idealizing transference)처럼 래퍼들과 내 삶을 동일화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내재화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생의 에너지를 주었던 힙합을 나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길 어렴풋이 바랐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중2병’ 소년이 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조그마한 지적에도 상처를 받는 친구였다. 교회에서 만날 때 마다 상담을 했지만 내면의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고 제자리 걸음이었다. 힙합 음악이 떠올랐다. 그맘때 내가 그랬듯이 힙합을 통해 소년의 마음도 치유가 되지 않을까. mp3플레이어에 위로와 힘이 될 만한 음악을 넣어주었다. 우원재의 ‘또’, 이센스가 피쳐링 한 ‘독’, 넉살의 ‘작은 것들의 신’ 과 같은 곡들이었다. 변화는 놀라웠다. 침울함은 줄고 랩을 흥얼거리며 비트를 타기 시작했다. 요즘엔 직접 쓴 가사를 내게 들려줄 정도다.
한 소년을 변화시키는 힙합이 진료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정신장애 환우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들과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힙합곡을 들었다. 감상을 얘기했다. 래퍼의 심정을 공감하고, 자신의 아픈 마음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했다. 이젠 <Rhymecology: Using Hip Hop to Heal>이라는 책을 교재 삼아 ‘함께하는 힙합’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본인들이 직접 쓴 가사를 토대로 공연도 했다. 누군가 이렇게 읊조렸다. "나도 별거 없어. 몸무게도 그대로. 헤매다가 결국 다시 병동에 왔어. 철없는 행동들을 후회하고 있어 난. 그래도 포긴 없어 일어설 수 있어 난."
힙합이 정말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까?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정신과학자 두 명이 만든 사회적 기업, 힙합 사이크(Hip Hop Psych)가 분석한 바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특유의 메시지와 ‘말하듯이 자기감정을 표출’하는 랩의 특성이 정신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한다. 랩을 통해 ‘미래의 긍정적 자아상’도 그릴 수 있다. 정신건강 캠페인에도 힙합을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 예로 로직(Logic) 은 ’1-800-273-8255’란 곡을 통해 우울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했다. 곡명만으로 미국 전역에 자살상담 전화번호를 알렸다. 래퍼 우원재는 눌러쓴 모자 아래로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이야기를 했다. 우린 그 아픔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도 환자분들과 랩 가사를 쓰는 법을 공부했다. 이 시간만큼은 다들 속마음을 랩으로 내뱉는다. 아직은 초기 단계다. 하지만 바다로 가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꾸준히 가려 한다. 영국 BBC 방송 인터뷰에서 10년 간 앓아온 정신장애를 용기 있게 밝힌 래퍼 스윙스가 말했다. 힙합은 바다와 같은 음악이다. 바다는 넉넉하다. 누구나 품는다.
‘함께하는 힙합’의 한 멤버에게 물어보았다. “OO씨에게 힙합은 무엇인가요?” “내세울 것 없던 제가 사람들 앞에서 랩을 뱉어댔어요. 그들 앞에 나서고 있죠. 어제는 운동장 20바퀴를 뛰었어요.” 힙합치유는 단지 음악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음에 대한 것이고, 우리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다. 이 작업을 나와 환자분들뿐만 아니라 힙합이 지닌 치유의 힘을 믿는 이들과 나누기를 바란다. 힙합은 젊은 날의 치기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송가(anthem)다.
*VOGUE KOREA 3월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