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아카이브/랩

드레이크, 남자답지 않은 힙합의 시대 (글 김봉현)

seimo 2017. 5. 4. 14:34

출처: http://tuney.kr/cNyPjC (에스콰이어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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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 남자답지 않은 힙합의 시대

드레이크는 힙합의 금기를 수차례 깨뜨렸다.




깊은 잠에 든 상태였다. 새벽까지 NBA 경기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뿌린 냉수를 맞고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우적대는 나에게 엄마가 물었다.


“요즘 래퍼 중에 누가 짱이냐?”


이걸 왜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대답했다.


“켄드릭 라마랑 드레이크요.”


엄마가 말했다.


“드레이크? 걔도 래퍼야? 걘 노래도 막 하던데?”


난 한심하다듯 불효자 스타일로 말했다.


“엄마, 제발 트렌드도 좀 살펴보고 하세요. 드레이크가 힙합의 룰을 바꾸고 있잖아요.”


그렇다. 드레이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래퍼다. 그의 앨범은 아직도 장당 400만 장씩 팔리고,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3579만 명이다.


제이지가 이제는 한발 물러나 앉아 있는, 반쯤 은퇴한 큰형님 느낌이라면 드레이크는 당대 최전선에 있는 현역 중의 현역이다. 힙합뿐 아니라 팝 전체를 통틀어도 드레이크만큼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뮤지션은 몇 없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켄드릭 라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격과 비아냥거림에 시달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드레이크의 ‘헤이터’는 대부분 ‘힙합 순수주의자’와 일치한다. 그들이 드레이크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한 가지로 수렴된다.


드레이크는 너무 부드럽고 유약하며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남성성이 강하게 지배하는 힙합의 세계에서 드레이크는 이단아이고 변절자이며 계집애 그 자체다. 실제로 많은 ‘남자’들이 드레이크를 놀려댔다.


미트 롬니가 버락 오바마에게 선거에서 졌을 때 남자들은 ‘롬니는 지금 드레이크의 노래를 듣고 있다’며 낄낄댔고, 래퍼 커먼은 자신의 노래 ‘Sweet’에서 드레이크를 가리켜 “넌 너무 부드럽고 달콤한 새끼”라며 디스했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는 드레이크가 왠지 할 것 같은 일을 그려달라고 하자 도예를 하는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완성하기도 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한 장면처럼.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드레이크라는 돌연변이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카니예 웨스트는 드레이크의 본보기였다.


이미 데뷔 때부터 ‘마약과 범죄로 가득한 길거리의 거친 흑인’ 대신 ‘폴로셔츠를 입고 백팩을 멘 평범하고 약간 귀여운 래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했던 카니예 웨스트는 2008년 작에서도 역시 기존의 힙합 스테레오 타입에 반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우울, 상실, 후회, 외로움 같은 정서로 앨범을 꽉 채운 것이다.


이후 카니예 웨스트가 기인 혹은 록스타 혹은 반인반신의 길로 나아가는 동안 드레이크는 이 앨범의 기조를 이어받아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존 카라마니카의 글이 이를 뒷받침한다.


“드레이크는 카니예 웨스트의 자기 성찰 중에서 흥분이나 불안은 버리고 오직 정서적 혼란만을 가져왔다.”


이렇듯 드레이크는 ‘남자답지 않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 힙합의 금기를 깨뜨리는 한편, 랩과 노래를 넘나들기도 하고, 힙합과 팝을 도시의 야경 느낌으로 섞어내는 특유의 스타일로 젊은 왕이 되었다.


드레이크는 남성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최대치의 솔직함을 드러냈다. 다시 말하자면 드레이크에 이르러서야 힙합이 비로소 남성이 아니라 인간을 완성했다.

드레이크가 유약하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노래 ‘Best I Ever Had’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야, 넌 내 전부야. 넌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이야. 넌 내가 가졌던 모든 것 중에서 최고야.”


그런가 하면 ‘Marvin’s Room’에서 그는 술에 취한 상태로 클럽을 전전하다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네가 지금 사귀는 그 새끼 엿이나 먹으라고 해. 너 아직도 내 생각하는 거 알아.(울음)”


새벽 2시인지는 확인 되지 않았다. 한편 최근에 발표한 앨범 의 수록곡 ‘Teenage Fever’에서 드레이크는 아예 10대의 심리 상태로 걸어 들어간다.


“말만해, 내가 갈게 / 이 감정은 마치 10대때 앓았던 열병 같아 / 하지만 난 두렵 지 않아.”


방금 속보가 도착했다. 아다치 미츠루가 신작을 발표하는데 주인공 이름이 드레이크라고 한다.


힙합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장르적 정수로 내세워온 태도는 바로 ‘킵 잇 리얼(keep it real)’이다. 늘 진실할 것. 늘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 이 리얼리티 게임에서 거짓말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하지만 힙합의 킵 잇 리얼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가 배제돼 있었다. ‘남자답지 못함’, 그리고 ‘동성애’. 힙합의 세계에서 이 두 가지는 오랜 금기였다.


설령 남자답지 못한 감정이 자신의 진짜 감정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내색하면 안 되는 것이었고 스스로 삭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크가 지난 몇 년간 게임의 룰을 바꾸었고 지금도 바꾸는 중이다.


드레이크가 술에 취해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자 많은 래퍼들이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이제 래퍼들은 ‘널 놓치고 싶지 않다’고 대놓고 랩을 하거나, 자괴감의 끝을 맛본 사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동성애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사랑이라고 외친다.


‘래퍼가 노래를 부르는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래퍼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된 행위였다.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래를 부른 래퍼가 있기는 했다.


노토리어스 비아이지가 대표적이다. 그는 ‘Playa Hater’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에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난’이다. 실제로 그는 이 곡에서 일부러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노래 부른다. 1990년대의 래퍼에게 노래란 이런 존재였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다.


실제로 푸샤티는 자신의 노래 ‘King Push’에서 “난 마약에 대해 랩하는 래퍼야, 후렴에서 노래 부르는 짓은 안 해”라며 드레이크를 겨냥했다. 그러나 대세는 드레이크의 편이었다. 드레이크가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이후 많은 래퍼들이 자신의 랩에 멜로디를 넣기 시작했으니까.


드레이크, 힙합 - 에스콰이어

물론 드레이크가 혼자서 이 모든 걸 바꾸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 변화의 상징적 존재로 임명될 자격이 있다. 또 드레이크의 성취가 “남자답지 않은 감정을 표현했다”라는 문장보다 실은 더 거대하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 드레이크의 음악은 남자답지 않은 감정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드레이크도 남자다울 때가 있다. 대신에 드레이크는 남자다움을 벗어나는 모든 다채로운 감정 역시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실제로 드레이크의 어떤 노래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힙합의 스테레오타입처럼) 남성 우월적이고 여성 혐오적이다. 하지만 어떤 래퍼에게 이것이 그의 전부라면, 드레이크에게 이것은 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앞서 말했듯 드레이크는 몇몇 노래에서 남자답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다가도 어떨 때는 다분히 마초적인 성질을 자랑한다(‘Energy’). 또 자신의 성공에 도취돼 “내가 지금 죽으면 난 전설이 되는 셈이네?”라며 우쭐대다가도(‘Legend’) 성공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Too Much’).


한편 ‘Tuscan Leather’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사적 실수에 대해 털어놓고, ‘Fake Love’에서는 가짜 사랑을 보여주는 가짜 녀석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한마디로 드레이크는 ‘그냥 나’를 보여준다. 하지만 카메라를 360도 돌려가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자랑스러운 모습은 물론 부끄러운 감정도, 멋있게 보일 것이 확실한 모습은 물론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 있거나 모양 빠지는 모습도 주저 없이 드러낸다.


힙합의 킵 잇 리얼이 그동안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있었다면, 드레이크는 그것을 인간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끌어올렸다. 기존 래퍼들이 학습된 남성성 안에 갇힌 솔직함을 표현해왔다면 드레이크는 남성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최대치의 솔직함을 드러냈다.


다시 말하자면 드레이크에 이르러서야 힙합이 비로소 남성이 아니라 인간을 완성했다. 이것을 어찌 진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힙합이 게토 흑인의 전유물에서 우리 모두의 것으로, 그리고 뉴욕의 지역 문화에서 세계의 기준으로 발돋움할 동안 드레이크는 래퍼들 역시 성장하고 성찰해왔음을 자신의 존재 자체로 증명해냈다. 드레이크는 훗날 역사책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에디터 Esquire Korea

 김 봉현(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 GETTY IMAGES

출처  201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