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혐오로 구원하지 않는다 (글 김봉현)
원문: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7769
힙합은 혐오로 구원하지 않는다
2016년 12월 15일 목요일 제482호
산이와 DJ DOC의 신곡은 여성혐오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여성혐오 문제가 ‘시국’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모두가 모이는 광장에서는 차별 없이 동등한 대우와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김봉현 (힙합 저널리스트) webmaster@sisain.co.kr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부록이다. 산이와 DJ DOC(디제이디오씨)로 인해 불거진 최근의 논란에 대한. 스스로 부록임을 자처한 까닭은 이 글이 논란의 핵심을 다루거나, 찬반과 관련해 첨예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글을 일종의 편지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페미니즘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길 원하고, 무엇보다 힙합을 오랫동안 좋아해온 한 사람이 보내는 편지 말이다.
문제란 늘 복합적이기 마련이지만 결론적으로 나 역시 산이와 DJ DOC의 노래들이 여성혐오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시국에 그런 걸 지적할 때냐’며 답답해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문제가 더 크고 중요할 수 있다. 또 ‘해일이 몰려오고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조개를 줍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조개가 아니라 해일일 수 있다. DJ DOC의 공연이 무산된 것은 아쉽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혹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절충과 타협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매거진 <ize>의 강명석 편집장 말처럼 “적어도 모두가 모이고 지켜본 광장에서는 성별·성 정체성·인종·지역·종교·신체 조건에 상관없이 동등한 대우와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신곡 ‘수취인분명’으로 11월26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DJ DOC(사진)는 혐오 가사 논란으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굳이 산이와 DJ DOC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래퍼들의 가사와 태도를 비판하거나, 최소한 불편해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 즉 힙합을 오랫동안 좋아해오고 있으며, 힙합이 가치 있고 혁신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힙합이 내 삶을 더 긍정적으로 바꾸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영원한 숙제다.
힙합 팬들은, 왜 랩은 욕설과 거친 표현을 좋아하는지, 왜 래퍼들은 자랑과 잘난 척을 하는지, 왜 랩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는지, 제일 유명하다는 랩에 여성혐오 메시지는 왜 들어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 처지에 한 번쯤은 놓이게 된다. “대체 이런 걸 왜 좋아하는 거야?”라는 질문에 익숙해진 나는 그럴 때마다 “무엇을 말하는지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에 형식적·서사적으로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거나, “힙합은 모든 음악 장르를 통틀어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아름답거나 우아하지 않더라도) 가장 진실하게 담아내는 가장 큰 그릇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힙합이 그동안 소수자와 약자를 공격하는 데 표현의 자유를 누린 경향이 있음은 인정해야 한다. 세상에는 힙합이라는 예술보다 더 크고 중요한 보편적인 가치가 있고, 힙합 역시 이 가치에 기여하는 쪽으로 진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란 차별이나 억압, 혐오가 아니라 평등과 인권, 사랑이다. 약자, 소수자에 대한 폄하나 혐오로 의심 및 단정할 수 있는 힙합의 면모들은 비판받고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논란을 조금 비켜서 보자. 힙합 전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에는 일정 부분 아쉬운 지점이 있다. 힙합을 비판하면서 힙합을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규정짓는 반응들을 본다.
이를테면 “힙합은 자기 자랑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들이 그렇다. 자기 자랑은 ‘나쁜 것’이거나 ‘가치 없는 것’인가? 자신의 성취를 매 순간 자축하는 래퍼들의 음악은 누군가의 삶에 그 어떤 것보다 큰 동기부여가 된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상에 오르는 것(Bottom to the Top), 자기 삶의 조건을 하나씩 개선해나가며 늘 방향성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는 것(Negative to Positive), 늘 좋은 기운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Good Vibes Only)은 힙합의 핵심 가치관이자 태도다.
힙합도, 페미니즘도 ‘나를 구원했다’
우리는 타인의 생각과 시선을 의식하도록 배우며 자랐고, 지켜야 한다고 믿어온 많은 것을 여전히 마음에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나의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 때문에 많은 시간 자신을 의심하고 학대하는 데에 사용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스스로 감정에 진실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힙합은 ‘너 자신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에게 힙합은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되는 ‘바름’과 사회적 공기에 억눌려 ‘진짜 자신’으로 살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을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어온 음악이다. 만약 잘 와 닿지 않는다면, 힙합의 이러한 면모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을 삶의 시궁창에서 건져 올렸음을 부디 기억해주길 바란다. 래퍼들이 유독 ‘힙합이 나를 구원했다’는 말을 자주 하는 까닭은, 힙합에 이런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은 혐오 표현에 대한 우려를 항상 받아왔다. 없던 혐오가 갑자기 발생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힙합은 오래전부터 이런 비판을 받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1~2년 전부터 한국 힙합은 여성혐오 논란에 본격적으로 직면했다. 한국 힙합이라는 장르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논란은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었다. 대중화되고 영향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순간이 지금 온 것뿐이다.
지난여름 나와 함께 ‘힙합과 여성혐오’에 대한 강의를 한 적 있는 한 교수는 “한국 여성이 한국 힙합에 드러나는 여성혐오를 비판하기 위해 왜 힙합의 기원적·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내게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다만 스스로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만큼은 아니더라도, 비판하고 싶은 가치에 대한 이해도 조금 더 높여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힙합의 시학(The Poetics of Hip Hop)’에 대한 연구로 알려진 미국의 문학 교수 애덤 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성숙한 관중은 랩을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랩의 가치는 그 안에 담긴 거친 표현이 아니라 시적 형태의 다양성과 섬세함으로 평가해야 한다.”
물론 힙합을 이해하는 일보다 성 평등을 실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페미니즘 덕분에 요즘 내 삶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덕분에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힙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듯이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전향적인 이 시기에 터져 나온 이번 논란이, 한국 사회와 한국 힙합 모두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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