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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음악의 역사

seimo 2016. 4. 1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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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거대 자본과 같은 상업적인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는 형태의 음악. Indie라는 단어는 'Independent'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기서의 독립은 위의 정의와 같이 '상업적인 거대 자본과 유통 시스템에서의 독립'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디 음악의 정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지만(특히 한국에서), 인디 음악의 정의는 이것이 전부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Indie'와 'Underground'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Indie'는 '유통 방식'에 근원을 둔 단어이고, 'Underground'는 대중문화에 속하지 않고 자신들의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으로 일종의 '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결과적으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들의 대부분이 '인디'의 방식으로서 자신들의 음악을 알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인디 음악은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최근 대중을 노리고 나오는 인디 음악 즉 '인디 음악'이지만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아닌 음악들이 많이 등장하고있으므로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실 YG 언더그라운드를 생각해보면 한번에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역사

인디 음악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인디 음악의 정의인 '독립성'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은 70년대의 DIY(Do It Yourself) 원칙에 입각한 개러지 록 음악들로 추정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로 감명받은 일련의 젊은이들이 집 차고에서 되든 안되든 일단 밴드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차고'에서 만든 음악이 거칠고 단순한 모습을 보여 '차고에서 만든 록'이라는 의미에서 개러지 록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 개러지 록은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밴드들이 선험한 프로토펑크와 연계되면서 펑크 록의 중요한 단초로 남게 된다.


이후 펑크 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인디'라는 유통 방식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러프 트레이드나 4AD, IRS, SST, 팩토리 레코드, 도미노 레코드, 크리에이션 레코드 같은 전국구급 인디 레이블들이 속속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발전은 록 음악의 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영국의 경우는 펑크 록의 시대를 거쳐 80년대 중후반부터 인디 밴드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마침내 인디 밴드들이 메이저에 대거 진출해 흥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90년 초중반의 브릿팝 밴드들이다. 미국의 경우는 영국보다는 다소 늦게 인디 그룹들이 메이저에 올라오게 된다. 이는 모타운, MTV 등으로 대표되는 메이저 음악의 상업화와 조직화가 영국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고, 워낙 땅덩이가 넓다 보니 각지의 로컬 씬만으로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90년대를 강타한 얼터너티브나 2000년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포스트록 등은 모두 인디에서 올라온 장르들로, 인디 음악은 오버그라운드에 새로운 장르를 수혈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SNS의 등장은 인디 그룹들이 자신들의 인지도를 폭발적으로 높이는 것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0년대 초중반이 되면 아케이드 파이어를 필두로 하여 오버그라운드의 지원 없는 인디 그룹들이 속속 빌보드의 문을 두드리고 세계적으로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하게 된다. 영국에서도 악틱 몽키즈가 인터넷을 통한 엄청난 인기로 데뷔함으로써 미국과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마이스페이스를 활용한 마케팅이 유행하였으며, 이는 점차 SNS의 등장과 함께 페이스북 등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현 시대의 인디 음악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와 접근성이 커졌다. 물론 상업적인 지분은 그리 크지 않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디 그룹들만의 자체적인 페스티벌을 열 수 있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으며, 세계 투어를 다니면서 인디 레이블에 속해 있는 밴드들도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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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록(Indie rock)은 독립적인 언더그라운드 음악 신(scene)에서 볼 수 있는 대안적인 록(alternative rock) 음악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독립 음반사와 계약을 했거나, 계약없이 활동하는 록 음악가를 지칭한다. 로우 파이(lo-fi), 포스트 록, 세드코어(sadcore), 메스 록(math rock), 슈게이징(shoegazing), 인디 팝 이라는 장르 또는 하위 장르와 같이 거론되며, 인디 록은 음악가가 음반제작에 있어서 외부의 간섭없이 만들어 내고, 독립 음반사를 통해 발매한다. 공연과 입소문, 독립방송 또는 대학방송의 라디오를 통하여 홍보를 하며, 인기를 얻은 음악가들은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맺기도 한다.


1980년대

영국의 경우, 1980년대 초 인디 음악 차트가 생겨났다. 이 차트는 기타와 베이스를 주축으로 결성된 새로운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을 다루고 있었다. 특정 밴드로는 아즈텍 카메라(Aztec Camera), 오렌지 쥬스(Orange Juice)와 같은 인디 팝 아티스트들과 C86 쟁글 팝(jangle-pop) 무브먼트와 트위 팝(Twee Pop)으로 불리는 사라 레코드(Sarah Records)사로 소속 아티스트들이 포함되었다. 다른 정의로는 스미스(The Smith),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 지저스 앤드 메리 체인(The Jesus and Mary Chain)과 같은 1990년대 슈게이징과 브릿팝과 같은 얼터너티브 록에 영향을 준 1980년대 활약한 밴드들을 말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직접만들기(DIY ethic) 원칙에 큰 영향을 받은 얼터너티브 록 음악 신(scene)을 계승한 밴드들을 일반적으로 인디 록이라고 지칭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 인디록은 신경에 거슬리며, 육중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허스커 두(Hüsker Dü), 다이노소어 주니어 (Dinosaur Jr), 소닉 유스(Sonic Youth), 빅 블랙(Big Black)과 같은 미국 인디 레이블 소속 밴드를 지칭하였고, 이와 별개로는 R.E.M.과 10,000 메니악스(10,000 Maniacs)와 같은 컬리지 록 밴드들도 포함되는데, 이들은 10년 후에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게된다. 1980년대 말에 활동 하였던 밴드 픽시스(Pixies)는 90년대와 지금의 인디 록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 한다.


1990년대

1990년대 중반까지는 너바나(Nirvana),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사운드가든(Soundgarden)과 펄 잼(Pearl Jam)과 같은 그런지 밴드들이 이끌었던 얼터너티브 록이 주류음악으로 편입되어, 상업적인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널리 알려지게 된다. 얼터너티브가 상업화가 되고 주류음악에서 성공을 거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이저 음반사의 투자가 이어지고, 상업적이고, 상투적이고, 보수적인 접근의 제작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쯤되었을 때 "대안적인(alternative)"이라는 이름표가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얼터너티브 음악이 주류음악에서 거둔 성공에 비교하여 인디 록은 보다 반문화적(反문화적, counter-cultural)인 의미를 가지면서,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에 남아있는 장르 또는 밴드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1990년대 인디 록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중 하나는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 가이디드 바이 보이시스(Guided by Voices), 페이브먼트(Pavement), 세바도(Sebadoh), 그리프터스(The Grifters), 리즈 페어(Liz Phair), 엘리펀트 식스 레코딩 컴퍼니(The Elephant 6 Recording Co.), 뉴트럴 밀크 호텔(Neultral Milk Hotel)과 같은 밴드들이 앞장섰던 로우 파이(lo-fi) 운동이었다. 이들은 미숙한 녹음 기술과 역설적으로 초연한 자세를 가졌으나, 주류 얼터너티브 록 신으로의 편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2000년대 이후 영국

일부 인디 밴드들에게 지원된 문화예술위원회 기금으로, 음악 배급의 상업적 기회와 홍보의 기회를 증가할 수 있었고, 일부 인기있었던 행동들은 전적으로 독립적이었다. 또한, 영국에서의 독립 음악은 주류와 인디 음악 장르사이에 비교적 넓은 겹침으로 인한 이득을 보게된다. 라디오헤드(Radiohead)는 그들의 음악을 독립적으로 발매한다. 그들은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실험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으며, 인기가 있고, 유명하다. 그라임(grime) 음악과 같은 장르에서는 독창적이고, 특유의 음악을 만드는 많은 아티스트들은 주류 시장의 성공을 목표에 두지않는다. 이러한 인식은 영국은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을 제작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게 하며, 메이저 음반 기업에게 포섭당하지 않고도 주류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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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레이블

독립 음반사 또는 인디 레코드 레이블은 대중음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미국의 선 레코드사 같은 음반사는 세계대전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에 메이저 음반사들이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음반사들이 설립하기 어려웠다. 몇몇 영국의 음반제작자와 아티스트들이 독립 음반사를 설립하였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와 그들 작업의 방출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상업적인 시도로 실패하거나 메이저 음반사들에게 잠식되었다.


펑크 록 시대에는 독립 음반사의 과잉이 나타났다. 영국 인디 차트는 1980년대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독립 배급망은 1970년대 후반 이후에 보다 조직화/체계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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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록 (Punk Rock)


약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록 음악의 하위 장르이다. 펑크 문화는 펑크 록과 동반되어 유행한 대중 문화의 한 줄기이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라몬스, 섹스 피스톨스, 댐드, 클래시 등이 있다. 아나키즘운동과 연관이 있다.


펑크 록은 The Standells, The Sonics, The Seeds와 같은 1960년대 중반의 미국 로큰롤 밴드에 기반하여 생겨났다. 최근엔 이런 밴드들을 "개러지 록 (Garage Rock)"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1971년 5월 잡지《크림》에 록 비평가 데이브 마시 (Dave Marsh)가 밴드 '? and the Mysterians'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펑크 록이라는 용어를 고안해 냈고, 그 뒤 1970년대 초에 많은 록 음악 저널리스트들이 이 말을 차용하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전례로 1972년 베스트 앨범《Nuggets》에서 기타리스트이자 비평가인 레니 케이 (Lenny Kaye)는 60년대 개러지 록 그룹들과 1960년대 싸이키델릭 음악의 선구자들을 언급하기 위해 이 용어 "펑크 록"을 사용했다. 그 뒤 레니 케이는 아방가르드 시인 패티 스미스 (Patti Smith)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였고 1975년에 발매된 스미스의 앨범《Horses》는 1970년대 중반의 많은 펑크 록커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길을 통해 펑크라는 용어가 음악으로 스며들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출처 필요]


1960년대의 개라지 밴드들은 펑크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펑크 록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거칠고 귀에 거슬리는 음색, 도어스의 반항적인 자세와 자유 정신, 더 후의 추저분한 자세와 공격적인 악기법, 초기 롤링 스톤스, 디트로이트 출신 밴드 스투지스와 엠씨파이브(MC5)의 폭력적인 공연과 정치적 대항심, 성적인 관심, 영국의 펍 록 Mick Farren, Deviants을 포함한 정치적인 영국 언더그라운드 밴드들, 뉴욕 돌스 (New York Dolls), 데이빗 보위, 게리 글리터(Garry Glitter), 록시 뮤직(Roxy Music)을 포함한 1970년대 초 영국의 일부 글램 록 또는 아트 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로커빌리 (Rockabilly), 펑크 (Funk), 레게 (Reggae)와 같은 음악 장르도 초기 펑크 록에 영향을 주었다.


펑크 록은 1970년대의 인기 음악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당시 펑크 족들은 디스코 음악은 천박하고 헤비 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 아레나 록은 너무 으스댄다고 보았다. 펑크는 또한 1960년대의 히피 반문화의 잔재를 거부했다. 1960년대를 지나 살아 남은 제퍼슨 에어플레인 (Jefferson Airplan)과 같은 밴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급진성을 잃어 거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 표본으로 에릭 클랩튼이 1970년대 중반 맥주 TV 광고에 출연한 예가 있다. 1960년대 록의 우상들은 자신들을 그들이 반대하던 시스템에 팔아넘긴 것이다.


"펑크 (Punk)"라는 딱지가 붙은 음악은 1974년과 1976년 사이의 뉴욕 시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때 뉴욕의 클럽 Max's Kansas City와 CBGB에서 라몬스, 텔레비전, 블론디, 하트브레이커스, 보이도이즈, 토킹 헤즈 등의 밴드가 정기적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 초에는 최초의 펑크 잡지가 생겼는데 잡지 기사에서 루 리드와 패티 스미스를 포함한 이들 그룹이 새로운 그룹의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같은 시기의 다른지역에서도 독립적으로 또 다른 "펑크"가 생겨나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섹스 피스톨스와 스트랭글러스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리즈번에서는 세인츠가 두각을 나타냈다.


밴드들은 작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열정적인 고용주와 함께 펑크 씬을 개척해 나갔다. 나이트클럽은 신인 음악가를 발굴해 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초키 펑크 클럽 중에서는 런던의 100클럽, 뉴욕의 CBGB, 할리우드의 마스크가 가장 유명하다.)


런던 밴드들은 초기 펑크 사운드를 만드는 데는 비교적 작은 영향을 주었으나 그 펑크씬은 반항적인 펑크 문화로 정의하고 축도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한때 미국에서 뉴욕돌스의 매니저를 맡았던 영국인 말콤 맥라렌은 1975년 런던으로 돌아와 펑크 옷 스타일의 근본을 만드는 것을 도와 주는 옷가게 ‘SEX'를 만들었다. 뉴욕 펑크 씬에 자극 받은 맥라렌은 영국에서 비슷한 운동을 길러 내려 했다. 그는 자기 옷가게의 단골 몇 명을 모아 섹스 피스톨스를 결성했다. 섹스 피스톨스는 곧 브롬리 패거리를 중심으로 한 엄청난 수의 열정적인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다.


1976년 7월 4일 런던의 원형 극장에서 열린 라몬스의 공연은 펑크 록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순간이다. 이 공연은 영국 펑크 록의 많은 주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영감을 받은 주동자들은 영국 펑크 씬을 크게 흔들었다. 1976년 말이 되자 섹스 피스톨스의 팬들은 스스로 밴드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클래시, 수지 & 더 배시스, 어드버츠, 제너레이션 X, 슬리츠, 엑스레이스펙스 등의 밴드들이 바로 이때 결성되었다.


1976년 11월,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댐드, 하트브레이커스는 합동으로 전국을 도는 일련의 공연인 아나키 투어를 했다. 그러나 타블로이드 신문과 잡지가 밴드들과 팬들의 엽기적인 행태에 관한 선정적인 이야기를 기고하자 많은 공연이 개최지 소유권자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펑크 록의 악명은 섹스 피스톨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가 런던의 생방송 TV 쇼《Thames Today》에 출연했을 때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빌 그런디와 언쟁을 벌이면서 방송에서 금지된 욕설을 퍼부은 일로 인해 더욱 위세를 떨쳤다. 1977년 동안 위에서 언급된 밴드들에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제2의 펑크 조류가 시작되었다. 미스피츠, 블랙 플래그, 크래스를 비롯한 몇몇 밴드들이 나중에 펑크 록의 사운드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밴드들이 나타났다.


1970년대 말 쯤에, 로스앤젤레스에서는 The Germs, The Weirdos, The Screamers, X, Circle Jerks, The Plugz, Fear 등이 활동했고 오렌지 카운티에서는 소셜 디스토션, The Adolescents 등의 펑크 그룹들이 활동했다.


영국에서 펑크는 자메이카의 레게, 스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레게의 영향은 클래시의 첫 번째 앨범에서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말 펑크는 The Beat, The Specials, Madness, The Selecter를 중심으로 2 Tone 스카 부흥 운동이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