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중문화연구가 겸 비평가 김창남 교수 (출처 한겨레)
원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6985.html
[한겨레] [짬] 대중문화연구가 겸 비평가 김창남 교수
“고우영 만화 보고 ‘간첩 차림새’ 뒤쫓던 반공소년이었죠”
2016-01-19
대중문화 연구자인 김창남(사진)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1960년생이다. 그의 유소년기는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시기(1961~79년)와 겹친다. 독재자는 그의 ‘신민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새겼을까. 김 교수가 ‘깨알 기억력’으로 복원한 그의 유소년기 문화편력기는 이 물음을 푸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난 13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정희시대와 겹친 유소년기 ‘기억’
만화·소설·영화·방송 등 대중문화
‘나의 문화편력기’ 펴내 촘촘히 ‘복원’
정치권력이 대중문화 검열하던 시대
민주화로 양적·질적으로 성장했으나
“자본의 승자독식 구조로 다양성 위축”
그가 최근 펴낸 <나의 문화편력기>(정한책방)엔 만화·소설에서 영화·코미디까지 60~70년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촘촘한 체로 걸러져 있다. 어린 시절, 재미를 찾아 읽을거리·볼거리·들을거리를 게걸스럽게 탐했다는 그의 회고가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임창의 만화에서 사랑과 우정의 의미를, 손의성과 이근철에게선 정의감을, 고우영과 길창덕에게선 유머코드를 배웠음을 기억해낸다. 이발소에서 자주 보았던 <선데이 서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로 ‘벌거벗고 온 손님’(에로 번역소설)을 떠올린다. 그는 ‘007 시리즈’를 영화에 앞서 소설로 읽은 희귀한 학생이었다.
그의 회고는 정치가 일상의 삶에 끼친 흔적을 추적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듯하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김 교수가 지금도 외우고 있는 ‘맹호부대 찬가’의 가사다. 베트남 파병 이후 라디오나 영화관에서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초등생 시절 전국자유교양경시대회(68~75) 강원도 대표로 뽑혔다. 대통령 부인이 운영하는 재단에서 정한 고전도서 목록의 책을 강제로 읽고 시험을 봐야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티브이 있는 이웃집을 전전하며 얻어봤던 반공드라마 <실화극장>의 작가는 알고 보니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다. 김 교수는 초등생 때 간첩처럼 보이는 이가 있으면 신고를 위해 뒤를 밟았던 열혈 반공소년이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밀짚모자를 쓰고 갈색 가죽가방을 든 그의 머릿속 간첩 이미지는 당시 고우영 만화에서 학습한 것이다.
“저의 개인적 감수성은 유소년기에 형성되었지요. 대학 시절에 상당히 깨졌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게 있어요. 그 시대의 노래들이 여전히 좋거든요.” 그는 최희준의 ‘하숙생’을 지금도 좋아한다. “산업화와 전근대적 문화의식이 섞여 있던 60년대, 대중문화 전반의 무력감이 배어 있지요.” ‘하숙생’에 나오는 ‘정처 없이 흘러서’ 가는 남자의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고 했다.
그는 체험으로 읽힌 대중문화의 위력을 이렇게 적었다. ‘유신정권이 금지곡을 지정한 뒤 76년(고교 2학년 때) 라디오에서 난데없이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가 들려왔다. 캠페인용 건전가요 같아 혐오스러웠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더라. 대중문화의 특징은 일상적이며, 무의식의 공간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잡는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대중문화는? “생산과 규율의 권력이 정치에서 자본으로 바뀌었지요. 과거엔 국민통합 논리로 대중문화를 재단하고 검열했다면 지금은 산업주의 시장논리가 작용합니다. 60년대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주요 시장은 성인층이었지만 지금은 10대의 영향력이 커졌지요.”
그는 이 기간 대중문화의 성장을 부인하지 않았다. “양적으로 엄청 성장했죠. 질적인 발전의 계기는 87년 민주화입니다. 검열 구조가 변하면서 특히 영화가 크게 발전했죠.” 그럼에도 미래 예측은 비관적이다. “지금의 대중문화 흐름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장은 커지겠지만 모든 사람이 문화적 결핍을 느낄 겁니다.” 문화의 핵심인 다양성이 과거 군사정권에 견줘 커진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자본권력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다는 게 비관론의 배경이다.
“대중문화의 사회적 위상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대중의 자기정체성을 투사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제공이 안 되고 있어요. 대중은 다양해졌는데 말이죠.”
김 교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인 승자독식 구조가 대중문화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디나 마니아 영역의 생산, 재생산 구조가 허약합니다. 대부분 서른살이 지나면 포기해요. 문화적 창의력은 이런 주변부에서 나오는데…. 표현의 자유 문제까지 겹치면서 다양성이 위축되고 있어요.” 그는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비주류 문화를 키우려는 배려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사라졌다며 “문화적 공공성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했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린 시절 ‘풍요로운 문화 체험’이 가능했던 것은 “공부 잘하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관대함”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 78학번으로 같은 대학 신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 우리만화연대 고문 등의 일도 함께 하고 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큰아들은 록밴드 활동을 하고 있고, 둘째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상원에서 이론을 전공하고 있다.
“백일도 되기 전에 큰아들을 콘서트장에 데려갔어요. 제가 뿌린 씨앗이죠. 그(인디음악) 바닥을 잘 아니 걱정이 되지요. 하지만 앞으로 현재 직업의 60%가 없어진다고 하잖아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도 없는데…. 좋아하는 걸 해야죠.”
아이돌이나 게임에 탐닉하는 자녀들과 갈등을 빚는 부모들이 꽤 많다. “자녀가 어떤 가수를 좋아하면 ‘왜 좋아해’라고 물었으면 해요. 그 이유를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통해 문화적 주체로서의 자각이 생기지요. 그러면 대개 ‘그냥’, ‘예쁘잖아요’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글을 써보라고 하지요.” 그는 젊은 세대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능력을 키우는 데서 문화적 싹이 생긴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영화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지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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