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시네21)
원문: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439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437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438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으로 돌아보는
1980~90년대 미국 흑인 사회와 갱스터랩
글 : 김봉현 | 2015-09-29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Straight Outta Compton, 이하 <SOC>)의 기세가 놀랍다. 198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며 시대를 뒤흔든 힙합 그룹 N.W.A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현재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중이다. 영화에 대한 평 역시 좋은 편이다. ‘로튼토마토’의 신선함 지수가 90%라면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호평 뒤에는 ‘드라마’의 힘이 있다. <SOC>는 정공법으로 충실하게 밀어붙인 영화다. N.W.A 멤버 각자의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그들이 모이게 되는 과정, 그룹 내에서의 역할 분담, 성공의 요인, 명곡의 탄생 동기, 갈등과 위기, 끝내 무산된 재결합까지 사실에 근거해 밀도 높게 담아냈다. 힙합을 모르거나 심지어 싫어하더라도 매력적으로 느끼게끔.
물론 어쩔 수 없이 ‘미화’ 논란도 있기는 하다. 닥터 드레가 1991년에 여성 힙합 저널리스트 디반즈를 폭행한 사실, 또 닥터 드레와 이지-E간의 격렬한 ‘디스’전이 담기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다. 그러나 전자는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으나 삭제된 사실이 밝혀졌고, 후자는 한명이 고인이 된 지 20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 다시 들추기가 여러모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한팀에 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강렬하게 비방하고 깎아내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미화 수준이라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엔 이 영화는 제법 많은 치부와 어두운 면을 놓치지 않고 있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영화가 ‘잘’ 나온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현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고 거칠 것이 없던 래퍼가 에이즈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 앞에서는 제아무리 잘난 이라도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흡사 그리스 비극마저 연상하게 하는 이 ‘실화’는 마치 영화화를 위해 미리 준비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실화의 디테일을 모조리 챙겨줄 당사자들, 즉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 이지-E의 아내 등이 모두 영화 제작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 역시 축복이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바로 영화의 감독이 F. 게리 그레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게리 그레이는 <이탈리안 잡>이나 <모범시민>의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실은 수십편의 흑인 음악 뮤직비디오를 감독한 인물이다. 그는 아이스 큐브, 닥터 드레와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며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고, 아이스 큐브와는 감독과 배우로서 코미디영화 <프라이데이> 시리즈라는 더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다.
이렇듯 그는 영화 당사자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본인 스스로가 유년기를 ‘길거리’에서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N.W.A 멤버들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은 게리 그레이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덕분에 게리 그레이는 ‘상상’ 대신 ‘기억’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에 이지-E가 들어가 있던 ‘마약하우스’를 굴삭기 같은 기계가 한순간에 파괴해버리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기계의 이름은 배터램(Batterram). 1980년대 게토의 흑인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실존 장비로서, 마약 단속을 구실로 경찰이 남용(?)하던 거대한 파괴기계였다. 1985년에 흑인 래퍼 토디티가 발표한 싱글 《Batterram》은 바로 이 배터램이 흑인의 삶을 파괴하는 것에 관한 노래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N.W.A 멤버들의 음악을 미리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N.W.A가 활동했던 당시 컴턴의 상황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컴턴은 캘리포니아의 LA 남부에 위치한 소도시다. 조금 더 위에 위치한 도시 와츠와 함께 흔히 LA의 대표적인 게토로 분류된다. 주변 도시에 비해 흑인/히스패닉 인구 비율이 높고 실업률 역시 높으며 사건 사고가 잦다. 말 그대로 ‘위험하고 가난한 동네’다.
1980년대 미국은 극우세력의 보스인 로널드 레이건의 시대였다. ‘복지 여왕’(Welfare Queen)이라는 허상이 증명하듯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특히 게토 흑인에게 직격탄으로 날아왔고, ‘크랙 에피데믹’(Crack Epidemic)이라고 명명된 코카인 파동 역시 흑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컴턴이 위치한 사우스센트럴 지역은 1980년대 들어 자동차 산업이 붕괴되어 일자리가 모두 없어짐으로써 많은 흑인이 몰락을 경험했다. 여기에다 고정자산세에 상한선을 거는 개정안이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되었고, 국방비에 과다 지출을 한 공화당이 복지 부담을 지방자치기관에 떠넘기면서 컴턴처럼 유색인종이 많고 젊은 인구 비율이 높은 도시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N.W.A로 상징되는 ‘갱스터랩’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지점과 연관된다. 갱스터랩은 불법적인 거리의 삶을 찬양하고 폭력, 섹스, 쾌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하는 메시지를 담은 힙합의 하위장르를 가리킨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 것처럼 갱스터랩은 수많은 도덕적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아이스 큐브는 대답한다. “우리의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뿐입니다.” ‘리얼리티 랩’(Reality Rap), 즉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동네’의 현실을 담았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아이스 큐브는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이 외면하는 게토 흑인의 실상을 고발하는 저널리스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은 위험한 빈민가에 사는 흑인의 삶에 관심이 없으며, 그곳에 사는 흑인의 삶은 실제로 우리의 음악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 아름답지 않은데 어떻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다. 과연 음악 속 가사가 문제인 걸까, 음악 속 가사를 있게 한 현실을 만든 장본인과 그 시스템이 문제인 걸까. 이 영화는 이런 고민을 안기기도 한다.
N.W.A의 실제 파급력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이었다. N.W.A가 “우리는 컴턴에서 왔다”고 외치기 시작하면서 힙합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N.W.A로 인해 컴턴은 순식간에 힙합과 갱스터랩의 성지로 발돋움했다. N.W.A가 브루클린을 위시한 ‘동부’ 힙합과 달리 초라했던 ‘서부’ 힙합에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음은 물론이다. 또한 라디오플레이나 심의를 의식하지 않았던 그들의 음악은 후대 아티스트에게 ‘나다움’에 대한 깊은 영감을 안겼다. 그들의 욕설이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 이라도 N.W.A의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내뱉고 있잖아?” N.W.A는 아티스트가 나다움을 온전히 지켜내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그룹이었다.
힙합 황금기의 유산
이 영화의 개봉을 전후로 줄줄이 제작이 예고된 힙합영화들의 큰 흐름도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스눕독과 투팍에 대한 영화, DJ 프리미어의 그룹이었던 듀오 갱스타에 대한 영화 등이 예고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흐름이 결코 우연이나 인위적인 결과가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맥락은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가 당시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등장한 것과 어쩌면 비슷할지 모른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는 흔히 힙합의 ‘황금기’라 불린다.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힙합의 고유한 사운드와 멋이 가장 순수한 모양새로 만개했던 시기라는 이유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힙합은 수많은 논란과 열광을 거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힙합을 듣고 자란 이들은 이제 영화도 제작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때가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를 찾아왔다. 황금기를 다시 돌아보고, 유산을 건져올리며, 무언가를 배우고 또 알리는 것이 즐겁고 마땅하게 여겨지는 때가.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과 힙합을 말하다
더 콰이엇, 도끼, MC 메타, 김봉현
이지-E,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를 주축 멤버로 한 N.W.A(Niggaz With Attitude). 1986년에 결성돼 1991년에 해체된 올드스쿨 힙합 그룹 N.W.A의 이야기를 그린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의 미국 내 흥행 성적이 의미심장하다(3주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힙합은 이제 더이상 미국 게토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거대하고 강력한 문화로서 대중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에도 힙합이 깊숙이 침투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봉현은 말한다. “도끼의 음악은 멜로디컬하지도 않고 ‘뽕끼’도 없다. 어떤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멜론에서 1위를 한다. 먹방이 콘텐츠가 된 시대, 이제 대중은 래퍼들의 자기자랑도 하나의 콘텐츠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젊은 세대가 힙합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헬조선’이란 표현도 생겨났듯, 그 어느 때보다도 젊은 세대가 힘든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힙합을 통해 대리만족하거나 일시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 더 콰이엇이나 도끼가 자주 하는 얘기도 이런 거다. ‘보장되지 않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인생을 희생할래?’ ‘남의 도움 받지 않고 내 힘으로 바닥에서 정상까지 왔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이런 이야기가 매혹적인 거다. 현실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않더라도.”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을 봐도 알 수 있다. 현실은 늘 약자에게 가혹했다는 사실을. 각설하고, 힙합이란 장르를 닮아 거침없고 폭발적인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을 보며 가슴이 뛴다면 당신은 아직 젊다는 뜻이다. 젊다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N.W.A가 보여주었듯, 도끼와 더 콰이엇이 만든 레이블 일리네어가 보여주고 있듯. <나 혼자 산다>의 출연으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도끼의 이름이 올라 있던 주말, 일리네어의 도끼, 더 콰이엇 그리고 한국 힙합신의 산증인인 MC 메타와 김봉현 평론가가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을 얘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을 본 힙합 뮤지션 MC 메타, 도끼, 더 콰이엇, 김봉현 음악평론가의 대담
"진짜 힙합은 진짜 힙합대로 흘러간다"
<씨네21>_<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을 두고 도끼는 “힙합 그 자체”란 평도 했는데, 다른 힙합영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재밌었나.
더 콰이엇_영화적으로 짜임새가 좋은 것 같다. 초반에 복선도 잘 깔아두었고. 음악영화로서 스케일이 큰 것도 강점이 되는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는 편인데, 지금껏 본 힙합영화 중에서 공연 장면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김봉현_부귀영화도 좋아하시고. (웃음)
더 콰이엇_부귀영화 좋아한다.
도끼_영천영화도 좋아하고.
더 콰이엇_자주 가는 고깃집 이름이다. 이래저래 영화 마니아다.
도끼_처음 영화 봤을 때 울컥한 장면이 있었는데, DJ 일을 하고 50달러를 벌어온 닥터 드레한테 엄마가 그런 푼돈 벌어서 어떻게 살 거냐며 잔소리를 한다. 나도 어릴 때 비슷한 얘길 들었다. 드렁큰 타이거 음악에 참여해서 70만원을 벌어왔는데, 엄마가 70만원을 크게 생각 안 하셨다. 그래서 그 부분을 보며 좀 슬펐다. 나중에 닥터 드레는 ‘비츠’라는 헤드폰 회사를 차려 애플과 계약해 1조원을 번다. 그러니 남의 미래는 함부로 점치면 안 된다. (웃음)
김봉현_도끼가 항상 강조하는 ‘came from the bottom’(바닥에서 시작한), ‘self made’(자수성가)와도 일맥상통하는 영화다.
MC 메타_힙합 뮤지션의 전기영화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상영된다는 것이 일단 신기하다. 예전에 DJ 렉스라는 친구가 소개해줘서 <플라이 바이 나이트>(Fly by Night, 1992)를 열광하며 봤는데, 그땐 래퍼들이 랩하고 DJ가 스크래치하는 장면만 나와도 흥분했다. 그런데 지금 N.W.A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김봉현_F. 게리 그레이 감독이 힙합에 대한 이해가 깊은 감독이기에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이스 큐브의 <It Was a Good Day>,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의 <Natural Born Killaz>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이들과 20년 가까이 인연을 쌓은 인물이다.
<씨네21>_도끼, 더 콰이엇, 김봉현 세분이 자막 감수에 참여했다. 본인들의 의견이 실제 자막에 100% 반영되지 않아 아쉽기도 했다고. 개인적으로는 N.W.A라는 팀명은 ‘까칠한 흑형들’보다 더 쿨한 느낌이었으면 싶었다.
더 콰이엇_팀 이름이니까 표현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우린 ‘겁 없는 흑형들’을 추천했는데, 최종 반영되진 않았다. 또 영화에 ‘본 덕스 앤 하모니’(Bone Thugs N Harmony)가 언급되는데, 자막엔 ‘본 석스’로 나온다. 한글표기상 어쩔 수 없는 건지 몰라도 사실 ‘본 석스’는 절대 성립될 수 없는 발음이다. (웃음) 그래도 몇몇 부분에서 우리의 의견이 적용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
도끼_감수 보면서 ‘멋진’을 ‘쩌는’으로 바꿨다. 그게 영화에 세번 정도 나왔다. 슬랭(속어)으로서 ‘dope’가 ‘멋있다’보다는 센 표현이니까.
<씨네21>_<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은 이지-E가 주인공인 영화 같지만, 등장부터 퇴장까지 멋있는 장면을 도맡는 건 닥터 드레다.
도끼_닥터 드레 혼자 멋있게 나오는 건 닥터 드레 혼자 멋있게 살았기 때문이다. 이지-E는 에이즈로 일찍 생을 마감했고, 아이스 큐브는 이후 코미디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배우가 됐다. 닥터 드레는 더 멋있게 그리려면 그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걸 최소화해서 보여주는 게 이 정도면 정말 존재감이 ‘쩌는’ 거 아니겠나.
<씨네21>_닥터 드레의 등장 신과 이지-E의 <Boyz-n-the-Hood> 녹음 장면이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데, 영화에서 특별히 좋았거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김봉현_기자회견 장면이 영화의 핵심인 것 같다. N.W.A를 향한 당시의 비판적 시선을 인상적으로 함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자가 “가사가 너무 폭력적이지 않냐”고 묻자 N.W.A는 “우리의 노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뿐”이라고 답한다. 1980년대 후반, 미국 LA의 현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기, 국방 예산을 과도하게 지출해 복지 예산이 줄어들자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복지 예산을 떠넘겼다. 직격탄을 받는 곳은 컴턴 같은 가난한 동네였다. 십대 흑인 소년들이 마약을 팔고, 눈뜨면 어제까지 같이 놀던 친구가 죽어 있고, LA 경찰은 흑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해 경찰과 흑인 갱단의 대치가 첨예했던 게 컴턴의 현실이었다.
더 콰이엇_랩 뮤직은 솔직하다. 뮤지션들은 자기 얘기를 한다. 간혹 너무 솔직해서 ‘넌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얘기를 듣는다. 그게 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잘나가는 상황들, 우리가 사는 물건들, 시계들, 차들… (웃음) 그런 얘기를 한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하나의 스토리다. 그 사람 고유의 이야기. 도끼의 롤스로이스, 나의 벤틀리, 우리의 롤렉스, 투 체인즈 앤 롤리스(2 chainz & rollies, 더 콰이엇의 노래 제목), 그런 거다. (웃음)
MC 메타_N.W.A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거리에서 그들의 음반을 박살내는 장면이 기억난다. 그러니까, 힙합을 처음 듣기 시작할 무렵엔 무조건 ‘Parental Advisory’(보호자의 지도가 필요함) 딱지가 붙은 음반을 샀다. 19살 이상만 들으라는 음악은, 결국 현실이 제대로 반영된 음악이란 뜻이니까. ‘Parental Advisory’ 딱지 붙은 노래들이 ‘리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그 장면을 보면서,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가 제한받고 또 욕을 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구나 싶었다.
김봉현_LA폭동 장면에서, 빨간 손수건과 파란 손수건을 묶고 경찰을 향해 걸어가는 흑인들을 보여주는 것도 ‘간지’였다. 영화에서 각각의 손수건은 LA의 대표적 두 갱단 블러드(Blood)와 크립스(Crips)를 상징한다. ‘나는 블러드, 너는 크립스, 폭동이 일어났으니 우리 힘을 합쳐 LA 경찰에 맞서자’, 이런 유치한 설명 대신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그 의미를 전달한다. 흑인 갱단에 대해 첨언을 하면, 일정 부분 흑인들의 인종적 유대 혹은 흑인들의 방어기제로서의 생태계라는 성격이 있다. 흑인 갱단을 살인을 일삼는 나쁜 범죄 집단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백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흑인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갱으로 발전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LA의 래퍼들은 두 갱단 중 한곳에 소속돼 있는 경우가 많다. DJ 퀵이란 뮤지션은 자신이 블러드 소속이기 때문에 라이벌 그룹의 ‘C’를 이름에 쓸 수 없다 하여 ‘Quick’이 아니라 ‘Quik’이라 이름을 표기한다.
<씨네21>_LA폭동을 촉발한 로드니 킹 폭행 사건과 관련해, 아이스 큐브가 백인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도 재밌다. 로드니 킹 폭행 사건에 대해 얘기하려고 만난 자리에서 기자는 아이스 큐브의 가사를 문제 삼으며 당신은 유대인을 혐오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이스 큐브는 인터뷰를 끝내버린다. 어쨌든 N.W.A를 비롯한 당시 래퍼들은 상당히 사회 참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봉현_아이스 큐브의 솔로 1, 2, 3집에는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랩이 많다. 아이스 큐브가 20대 시절에 쓴 건데, 욕이 난무한다고 폄하하기엔 굉장히 통찰력 있는 가사들이다. 지금도 클래식으로 추앙받는 음반들이다.
더 콰이엇_퍼블릭 에너미도 그랬고, 당시엔 어느 정도 그런 가사를 담은 음악이 주류의 랩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다.
김봉현_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많은 래퍼들이 말콤 엑스의 영향 아래 있었고, <똑바로 살아라>(1989)와 <보이즈 앤 후드>(1991) 같은 투쟁적인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지금은 소수의 래퍼들만이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씨네21>_LA의 컴턴이라는 도시도 N.W.A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 거주자의 다수가 흑인 노동자인 컴턴이 이들의 음악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김봉현_N.W.A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힙합 하면 뉴욕을 얘기했는데, N.W.A로 인해서 서부 힙합신(웨스트 코스트 힙합)이 자생적으로 형성됐다고 한다. 그리고 래퍼들이 자기의 출신을 밝히고 고향을 대표(represent)하게 되는 것도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에서 촉발됐다는 얘기를 책에서 읽었다. <Straight Outta Compton> 이후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가 래퍼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자기의 출신을 얘기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거니까.
도끼_컴턴이 워낙 무서운 동네로 유명해서, 일전에 더 콰이엇과 둘이서 컴턴에 뭐가 있나 싶어 놀러간 적 있다. 시계랑 모자랑 다 벗고. 문신도 보이면 안 되니까 옷으로 가리고. (웃음) 그런데 너무 이른 아침에 갔는지 별거 없더라.
<씨네21>_N.W.A의 경우 닥터 드레가 비트를 만들고, 아이스 큐브가 가사를 쓰고, 이지-E가 랩을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분명했다. 래퍼들이 자신의 가사를 직접 쓰는 게 일반적인 거 아닌가.
김봉현_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했다. 다들 힙합을 한마디로 정의하려 한다. 힙합은 자유다, 저항이다, 뭐다…. 그런데 그 단어들이 100% 힙합을 정의할 순 없다. 힙합은 자유라고 하지만 랩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고, 힙합은 저항이라 하지만 힙합의 뿌리가 저항정신에서 출발한 것만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N.W.A의 가사는 아이스 큐브가 거의 다 썼다. 닥터 드레는 솔로 앨범에서도 다른 래퍼들이 쓴 가사로 곡을 만들었다. 최근에 래퍼 믹 밀이 드레이크에게 직접 가사도 쓰지 않는 대필받는 래퍼라고 ‘디스’했다. 그렇다면 믹 밀은 N.W.A도 가짜라고 말해야 일관성이 있는 거다. 게다가 이지-E는 마약상 출신이지만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는 갱단에 가입한 적이 없다. 힙합 그리고 갱스터랩이란 게 결국 진실과 엔터테인먼트의 경계에 있다는 얘기다.
더 콰이엇_N.W.A의 랩에도, 우리의 랩에도 과장이 있다. 메시지인 동시에 엔터테인먼트다. 다큐멘터리영화라고 해도 프로덕션 과정에 연출이 있듯, 우리가 하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이야기에서 출발은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극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한다. 꼼꼼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힙합 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이거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랩을 하는 이유는 즐겁기 위해서다. 듣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고.
MC 메타_1990년대에 처음 닥터 드레나 스눕독의 음악을 들으면서 가사를 해석하는데, 너무 내용이 잔인한 거다. 가사만 보면 다들 킬러고 마약상이다. (웃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앨범을 내고 유명해지고 스타가 되는 거지? 미국은 무슨 악의 제국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면만 보면 그렇게 된다. <Ego Trip’s Book of Rap Lists>라고, 힙합신의 이슈들을 순위별로 정리한 재밌는 책이 있다. 책에서 역사상 최고의 페이크 갱스터 래퍼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순위를 매겼는데, 1위가 아이스 큐브였다. 아이스 큐브는 거짓 갱스터 래퍼니까 추방하자, 그런 의미가 아니다. 랩에도 연출과 액팅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김봉현_아이스 큐브가 쓴 가사가 모두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엔 리얼리티가 있다. 아이스 큐브가 흑인 사회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소화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N.W.A를 얘기하면서 갱스터랩이란 장르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선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갱스터랩은 말 그대로 갱스터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랩이다. 영화에도 나오듯 불법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찬양하기도 한다. 그걸 보면서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힙합을 둘러싼 비난과 논란이 떠올랐다. 힙합의 가사가 여성 비하적이라든가.
더 콰이엇_<쇼 미 더 머니>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쇼 미 더 머니>가 문제다. (웃음)
김봉현_도끼와 더 콰이엇은 <쇼 미 더 머니> 시즌3에 출연했는데.
도끼_우리는 참가자가 아니라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니까 논란의 대상이 될 일은 없었다.
김봉현_일리네어의 가사에도 거친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가사가 거칠다, 자랑이 심하다, 마초적이다, 라는 얘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도끼_가사를 쓸 때 특별히 대중을 신경 쓰지 않는다.
더 콰이엇_확실히 자랑이 심하고 마초적인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좋아하는 힙합의 가사이고 방식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당당한 태도로 세상을 살고 싶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씨네21>_<쇼 미 더 머니> 시즌4 때는 출연 제의가 없었나.
도끼_우리는 뭐 시즌1 때부터 항상 출연 제의를 받았다. <쇼 미 더 머니> 시즌10 때도 출연 제의가 오겠지. (웃음)
<씨네21>_<쇼 미 더 머니> 시즌4는 논란 속에 종영됐다. 참가자의 여성 비하적 가사나 퍼포먼스 등 전반적으로 힙합 정신을 왜곡했다는 평이 많았다.
MC 메타_<뉴스타파>와 함께 <쇼 미 더 힙합>이라는 영상 작업을 했고 거기서 지적한 바이기도 하지만, PD와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요소들을 찾는다. 자극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킨다. 결국 힙합이 Mnet의 시청률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이용된 거다.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 블랙넛이건, 송민호건, 수많은 래퍼들이 비유적, 은유적 표현들로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거기에도 자성의 목소리는 있지만, <쇼 미 더 머니>는 그것을 여과 없이 노출하고 이용했다는 점에서 문제였다.
김봉현_너무 노림수가 보여서 프로그램 자체가 멋이 없다. 얼짱끼리 묶어 대결시키고 할머니 래퍼 내보내고. 그런데 정작 랩 잘하는 사람의 랩은 제대로 내보내지 않는다.
더 콰이엇_기존의 힙합신에선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이 부각되고 아이돌 문화와 믹스돼 희한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씨네21>_힙합 뮤지션으로서 현재의 고민이나 화두는 뭔가.
더 콰이엇_사실 이거저거 많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더 잘될까, 그런 게 주된 고민이다. <쇼 미 더 머니>가 어떻든 우리는 타격받지 않으니까.
도끼_진짜 힙합은 진짜 힙합대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더 콰이엇_좋은 것만 보고, 계속 발전적인 방향만 고민한다. 시간이 흐르면 음악의 트렌드도 당연히 바뀔 거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음악적 세계도 새롭게 형성될 텐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음악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인 것은 분명하다.
MC 메타_힙합의 역사가 그리 길진 않지만, 그사이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과 다양한 뮤지션들이 등장했다. 여전히 진행형이고. 음악의 스타일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흐를지 예측하긴 힘들다. 현재 일리네어가 하고 있는 음악 스타일이 10년 전에는 아무도 한국에서 성공하리라 상상하지 못했던 음악이다. 우리나라에선 사우스 힙합이 절대 안 통한다는 얘기들을 했었으니까. 지금의 한국 힙합신은 어떤가. 일리네어가 보여주는 사우스 비트를 다들 좋아한다. 앞으로 또 어떤 흐름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한국적 힙합이라는, 약간 다른 결의 음악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그런 측면에서 언어적인 것(사투리)에 집중해왔다. 고향을 대변하는, 대구를 레프리젠트하는 입장에서(웃음) 한국적 힙합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이스트 코스트 힙합이 궁금해?
MC 메타, 도끼, 김봉현, 더 콰이엇이 추천한 힙합영화
MC 메타
<와일드 스타일>(1983). 1980년대 초반 뉴욕의 흑인 게토를 중심으로 싹텄던 힙합 문화- 그래비티, 브레이크 댄스- 를 전반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다. MC 메타는 “한글자막도 없는 비디오테이프를 정말 많이도 돌려봤다. 1980년대 초반, 힙합 파이어니어(선구자)들이 보여주는 음악이나 이미지들이 굉장히 강렬했고, 이런 게 힙합이구나 싶었다”며 <와일드 스타일>을 추천했다. 더불어 나스, DMX, 메소드 맨이 주연한 <벨리>(1998)도 빼놓을 수 없는 영화라고 추천.
도끼
<노토리어스>(2009). 뉴욕 브루클린을 대표하는 래퍼 노토리어스 B.I.G.의 전기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이 LA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다뤘다면 <노토리어스>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이야기를 그린다. 둘을 비교해서 봐도 흥미로울 것이다. 도끼는 “추천 이유는 없다”고 했는데, 추천 이유가 없는 이유는 영화가 워낙 재밌기 때문. 더 콰이엇 역시 “지금도 가끔씩 집에서 찾아 보는 영화”라고 <노토리어스>를 언급했다.
김봉현
<보이즈 앤 후드>(1991). 아이스 큐브와 쿠바 구딩 주니어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로,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에도 <보이즈 앤 후드>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봉현 평론가는 “<똑바로 살아라>와 함께, 흑인 게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1990년대 문제작”이라며 이 영화를 추천했다.
더 콰이엇
<슬램>(1998). 신중을 기하느라 네명 중 가장 늦게 답을 내놓은 더 콰이엇은 <슬램>을 추천했다. 슬램 혹은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은 시와 랩이 결합된 하나의 장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작이자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인 <슬램>은 바로 이 “인디펜던트 중의 인디펜던트 장르를 소재로 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