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과 광기에 대한 연구 (글 하지현)
원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41&contents_id=98055
2015.9.8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좋게 말해서 술고래, 요샛말로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간헐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불안>, <사춘기> 등의 명화를 남긴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는 심한 불안 장애와 강박증에 시달렸다고 하며, 그런 내면이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 활동은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던 시기와 갑자기 많이 그렸던 시기로 뚜렷이 나뉘는데, 일기와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고흐가 양극성 정동장애, 즉 조울병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우울증일 때에는 그리지 않다가 조증이 오면 창작 욕구가 불타올랐던 것이다. 20세기에는 록 음악계의 3J로 불린 짐 모리슨(Jim Morrison),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알코올과 약물 중독이었고, 모두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예술가의 생애를 다룬 영화나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정서적 불안정과 약물 복용, 알코올 중독, 복잡한 인간관계를 더욱 부각시켜서 예술가의 창의성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에 강한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천재적 예술가들은 정상인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창의적 작품을 만들어낸다’라는 선입관을 갖곤 한다.
예술적 창의성과 정신질환의 연관성
여기서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언뜻 보면 예술가의 창의성은 정서적 불안정이나 특이한 생각, 알코올 남용과 같은 정신질환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매우 안정적인 자아를 갖고 있어 반대의 증거를 댈 만한 예술가들도 많다. 예술적 창의성과 정신질환의 연관성은 어떻게 규명하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왜 많은 정신질환자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작업에 몰두하는 것일까? 오랜 기간 많은 연구자들이 사례 발굴과 객관적 방법론으로 이런 의문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 연구가 인류에게 정신질환이란 특이한 증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었다.
아놀드 루드비히의 <천재인가 광인인가> 영문 책표지. 그는 저명인사 1004명을 표본으로 정신질환과 정서적 불안정 정도를 분석했다. <출처: 네이버책>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특이한 경력의 정신과 의사 낸시 안드레아센(Nancy Andreasen)은 아이오와 대학교의 작가 워크숍에 참가한 30명의 작가들을 면담하고 인생사를 조사해 그 결과를 1987년 《미국정신의학회지(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 발표했다. 참가자 30명 중 대부분이 남성으로 이중 80퍼센트가 한 가지 이상의 정서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40퍼센트는 조울증상이 있었는데, 이는 비교한 통제집단의 4배가 넘는 수치였다.
이런 기초 연구를 바탕으로 켄터키 대학 정신과 교수 아놀드 루드비히(Arnold Ludwig)는 20세기 서양의 저명인사 1,004명을 표본으로 선정해 그들의 전기를 분석했다. 1960년부터 1990년 사이에 발간된 전기 중에 《뉴욕타임스 북 리뷰(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에 언급될 정도로 업적을 이뤘다고 판단되고, 자료의 객관성이 확보된 사람들이었다. 루드비히는 인물들의 정신질환과 정서적 불안정의 정도를 평가하고, 업적을 이룬 시기와 발병 시기의 연관성, 가족력을 분석해 『천재인가 광인인가(The price of greatness)』(1995)라는 책을 펴냈다. 미술가, 소설가, 연주가, 작곡가, 배우 같은 예술가뿐 아니라 과학자, 공무원, 정치가, 군인, 사업가, 사회과학자 등을 모두 연구 대상에 포함하여 그 어떤 연구보다 광범위하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실제로도 다른 직종에 비해 창의적 예술가에게서 정신질환이 흔했다. 먼저 가족환경에서 특이한 점이 있었다. 과학자나 학자는 중상위층 전문직 가정 출신이 많은 데 비해, 예술가는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부모를 둔 경우가 많았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어머니는 팬터마임 연기자였고, 소설가 잭 런던(Jack London)의 아버지는 점성가로 6명의 아내를 둘 정도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특히 부모가 음악·미술·저술 등에서 활발히 활동한 경우, 자녀 역시 같은 예술 분야의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40~70퍼센트나 되어 부모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예술가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가족들도 통계를 내보면 상대적으로 정신질환을 많이 앓았다. 찰리 채플린의 어머니는 조증이 있었고, 잭 런던의 어머니는 아편을 과용하다 자살했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여자 형제 두 명이 자살했으며, 서머셋 모옴(W. Somerset Maugham)은 형제 두 명이 자살했고 다른 한 형제는 우울증을 앓았다. 헤밍웨이는 직계가족들인 아버지와 형제, 누이 그리고 손녀까지 모두 자살했다.
예술가들 중에서는 어려서 오랜기간 신체질환으로 아팠던 경우가 많다. 극작가 체호프(왼쪽, ⓒ Valentin Alexandrovich Serov)는 어린시절 복막염으로 죽을 뻔 했고, 조각가 로댕(오른쪽, ⓒ Charles Hippolyte Aubry)은 근시가 심했다.
한편 예술가들의 상당수가 어릴 때 오랫동안 신체질환으로 아팠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자연과학자는 15퍼센트, 시인은 10퍼센트가 유전적·선천적 결함이 있거나 한 가지 이상의 장애를 경험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은 근시가 심했고,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나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심한 난청이 있었다. 또 많은 이들이 천식, 결핵 등으로 6개월 이상 학교를 가지 못한 허약 체질이었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는 5세에 디프테리아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2년간 휠체어 생활을 했고,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는 십 대에 두 번이나 복막염으로 죽을 뻔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 에드바르트 뭉크,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당시에는 난치병이었던 결핵을 앓았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으로 그들은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반면, 상대적으로 사회성을 습득할 경험은 적어 상상력을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난과 질병, 정신질환과 중독에서 자유롭지 못한 예술가들
이제 정신질환 빈도에 대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시인·소설가·연주가의 70~77퍼센트가 성인기에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고, 미술가·작곡가·배우·연출가는 약 60퍼센트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건축가·자연과학자·사업가는 훨씬 낮은 18~29퍼센트에 불과했다. 예술가들에게서는 일반적인 발병률 기대치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정신질환이 발견된 것이다.
1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밍웨이는 알콜중독자였는데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Ernest Hemingway Photograph Collection>
2 음악가 짐 모리슨은 약물중독이었다. <ⓒ Dade County Public Safety Department>
예술가 중에는 일생 동안 알코올 문제가 있는 사람도 많아서 배우의 60퍼센트, 연주가와 소설가의 40퍼센트가 알코올 중독이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인 7명 중 5명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유진 오닐(Eugene O'Neill), 싱클레어 루이스(Sinclair Lewis),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 알코올 중독자였다. 연주가와 배우가 마약 등의 약물을 남용하는 비율도 약 24~36퍼센트에 달했고, 예술가 유형이 전체 표본에 비해 약 3~10배나 높았다. 앞서 언급한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도 약물에 빠졌다.
우울증 발병률도 높다. 일반인의 4~5퍼센트에서 발견되는 우울증은 시인, 소설가, 작곡가, 미술가에게서 특히 많이 나타나 예술가 유형의 50퍼센트에 달했다. 특히 25세 이후에 우울증이 발병하여 중년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우울증이나 약물 남용과 연관이 깊은 자살 시도도 시인이 20퍼센트, 연주가와 배우가 7~9퍼센트로 보고되는 등 전체적으로 예술가 유형의 약 14퍼센트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1,004명의 저명인사 중 4퍼센트가 자살했는데, 이는 미국인의 평균 자살률보다 약 3배 이상 높았다.
과도하게 기분이 고양되는 조증은 일반인에게서 약 1퍼센트가 관찰되는 데 비해 배우에게서 17퍼센트, 시인에게서 13퍼센트, 연주가에게서 9퍼센트가 관찰되었다. 헤밍웨이의 손녀이자 모델인 마고 헤밍웨이(Margaux Hemingway), 록 음악가 커트 코베인(Kurt Cobain) 등이 조울증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연구자 유형에서는 한 명도 관찰되지 않았다.
무용가 젤다 피츠제럴드는 젊은 시절에 망상이 발생해,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했다. <public domain>
가장 심한 정신질환이라 할 수 있는 정신분열증이나 이에 상응하는 정신증도 예술가에게서 꽤 많이 관찰됐다. 이 역시 일반 유병률이 1퍼센트로 추정되는 데 비해 시인이 17퍼센트나 되었고, 전체 예술가 유형으로 보면 8퍼센트였다. 실제로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부인이자 유명한 단편작가, 미술가, 무용가였던 젤다 피츠제럴드(Zelda Fitzgerald)는 20대 후반부터 심한 망상이 발생해 자신이 영국 노르만 왕조의 시조인 정복왕 윌리엄 1세와 접촉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독일의 정신과 의사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년)에게서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그녀는 몇 년간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인슐린 혼수 치료를 받다가 병원 화재로 사망했다. 러시아의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도 20대 후반부터 망상이 생겨 정신분열증을 진단 받은 후에는 무용을 그만두고 정신병원에 10년간 입원했다.
정리해 보면 연주가와 배우는 불법 마약 사용이 많았고, 작곡가·미술가·논픽션 작가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이 많았다. 시인은 조증이나 정신분열증이 많았고, 시인·배우·소설가·연주가는 자살 시도가 많았다. 반면 건축가, 설계사, 논픽션 작가의 경우 창의적인 일을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즉 정밀함, 이성, 논리에 더 많이 의존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정신질환이 적었지만 감성적 표현이나 체험, 상상력을 요구하는 직업의 경우 정서장애가 훨씬 많았다.
자극과 일탈, 광기가 예술성을 자극한다고?
예술가들의 정서적 불안정이 예술분야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강화될 수도 있다.
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예술가 중에 많고, 또 그들은 예술 분야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예술가는 다른 직업에 비해 자격증이나 정식 훈련이 필요하지 않아 진입 장벽이 낮으며, 예술계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와 일탈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다. 오직 예술적 창작물이라는 결과물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어떤 면에서는 예술가의 일탈 행위가 창의성을 더 돋보이게 한다. 또한 예술 창작의 영역에서 심리적 고통과 예민한 감수성 등 정서적 불안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예술가들은 작업 과정에서 이를 일부러 자극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물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재즈 음악가나 록 음악가들은 마리화나나 아편, LSD와 같은 마약류에 손을 대고, 이를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예술가의 정신적 취약성이 예술 분야에서 오히려 장점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
정신질환적 소인이 창의적 예술창작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는 다른 이에게는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창작욕을 자극하는 백신 역할을 하여 일종의 특징적 면역성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창의성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작가라는 존재는 책상에 의존한다. 광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절대 책상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라고 했고,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는 반복적 공황발작과 이로 인한 불안감을 창작의 영감으로 활용했다. 철학자 세네카(Seneca)가 “약간의 광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위대한 천재는 없다”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둘째는 정신질환이 심한 환자들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겪지만, 환자들 중 드물게는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 또는 직후에 일반인들이 경험할 수 없는 매우 특출한 창의적 기능을 해내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기질적으로 정신적 불안정성이 있는 사람 중 일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의성을 치유적 환상(curative fantasy)으로 이용한다. 이성적으로 접근해서는 불가능하지만 자아의 통제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 미적 즐거움과 통찰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광인의 그림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미적 영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는 우연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창의적 결과물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를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시대와 문화, 지역을 넘어서 세계인이 모두 향유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경우라면 더욱 분명한 자아의 힘이 필요하다.
1 에른스트 크리스의 <예술의 정신분석적 탐구>. 그는 이 책에서 예술가들의 ‘자아의 통제하에 퇴행하는 능력’을 설명했다. <출처: amazon>
2 프랜시스 골턴은, 100만명 중 한명 정도가 ‘진정한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추산했다. <public domain>
정신분석가 에른스트 크리스(Ernst Kris)는 『예술의 정신분석적 탐구(Psychoanalytic exploration in art)』(1999)란 책에서 예술가의 이런 능력을 “자아의 통제하에 퇴행하는 능력(regression in the service of ego)”이라고 했다. 통제하기 어려운 본능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우며 예측 불가능한 영역, 즉 초현실적인 부분까지 퇴행할 경우, 정신증 환자들은 무력하게 그 안에 머문다. 반면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아의 통제하에 일반인이 가지 못하는 정신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 창의적 활동에 몰입하다가, 작업이 끝나면 다시 현실세계의 자아기능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의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며 눈물 흘리고 공감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광기처럼 반짝하는 창의적 순간보다 이 천부적 재능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추구하면서도 기존 관습과 부딪히며 겪는 좌절과 실패를 견디고 극복해 내는 끈기와 열정이다. 즉 진정한 창의적 예술가는 불안정한 정신적 기질이나 남과 다르게 생각하려는 특이한 사고방식에 더해 끈기와 열정, 적당한 자아의 힘이 함께 할 때 탄생한다.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년)은 『타고난 천재(Hereditary Genius)』(1998)라는 책에서 대략 100만 명당 250명이 뛰어난데, 그들 중 15명 정도가 남들보다 월등히 출중하므로 결국 전국의 지식인이 죽음을 애도하고, 국민장을 치르며, 미래의 교과서에 언급될 만한 ‘진정한 천재’는 100만 명 중 한 명이라고 추산했다.
21세기의 예술 시장의 변화와 천재적 광기의 연관성
과거의 창의적 예술가들이 정신질환의 발병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에 비해, 21세기의 예술가들은 1960~1970년대의 재즈나 록 음악가들을 제외하면 정신질환이 흔치 않다. 이는 예술의 산업화와 연관이 있다. 이전 시대의 예술, 특히 시, 소설, 미술, 음악은 모두 혼자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신질환이라 진단할 만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상태가 심하지 않은 동안 자신의 작업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작업을 돌봐주고, 평가하고,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정신질환을 앓는 예술가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줄어드는 경향인데, 현대의 예술은 과거와 달리 여러 사람과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고 관계유지능력이 보다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출처: 연합뉴스>
현대의 예술은 이와는 다른 양상이다. 특히 20세기의 가장 각광받는 대중문화이자 예술인 영화를 보자. 지금은 영화를 오직 감독의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고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면서, 쇼비즈니스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최소 1~2년의 오랜 준비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배우와 제작진을 통제하는 것 등은 모두 감독이 해야 하는 일이며 대단한 자아의 통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미술, 소설, 음악 분야에서도 사회적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는 능력, 갈등을 견디는 능력, 자신을 적당히 포장하는 능력이 예술가의 작품만큼 중요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21세기에는 정신질환을 앓는 창의적 예술가들이 이전 시대에 비해 덜 관찰되는 것이다.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조사해 보면 다른 전공에 비해 정신질환이 상대적으로 많이 관찰될지도 모르지만, 사회적 명망을 얻을 정도의 예술가 수준에서는 발병률이 확실히 적을 것이라 추측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종합해 보면 정신질환과 예술적 창의성은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신질환의 소인이 되는 불안함, 우울함, 정동의 불안정은 예술가들의 가족력을 보아도 일반인에 비해 확실히 많은 경향이 있다. 또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창의적 예술가들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정신병리적 소인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해 낼 수 있었다. 이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 불안정성을 치유하기 위한 힘겨운 노력이기도 했다. 천재적 예술가의 가족들 중 여러 명이 유사한 기질을 갖고 있었지만 예술가로 성공하지 못했고, 심한 정신질환으로 자살하거나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결국 창의적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특출한 재능이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예술성으로 치환시킬 수 있었고, 적절한 시기에 가족이나 교육환경에 자극을 받았으며, 꾸준히 자기만의 창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아 능력이 있다는 사실들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재’는 역사에서 쉽게 나오기도, 같은 집안에서 여러 명이 나오기도 어려운 것이다.
참고문헌
아놀드 루드비히. 천재인가 광인인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
Nancy Andreasen. Creativity and mental illness: prevalence rates in writers and their first-degree relatives.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987 October; Vol. 144, No.10: 1288-1292
Ernst Kris. Psychoanalytic exploration in art.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52
글 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