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케이팝
출처: 한겨레21 (2012.01.16 제894호)
원문: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193.html
음악의 프랑켄슈타인은 가라
케이팝 세계 진출의 명암…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력 커졌지만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기획 상품’ 스타들이라는 비극
‘케이팝’(K-POP)의 정의가 뭘까? 의미를 글자 그대로 취하면 ‘한국의 대중가요’라는 뜻일 텐데, 이 경우 케이팝의 역사는 멀리 식민지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케이팝’을 “남한에서 나온 팝, 댄스, 일렉트로팝, 힙합, 록, 리듬앤드블루스(R&B) 등으로 이루어진 음악의 장르”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케이팝의 역사에 관한 기술은 1990년대부터 시작한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케이팝은 1990년대에 형성되었다는 의미일 게다.
한국 대중음악의 비약적 성장
대중음악의 취향은 대충 10~20대에 형성되는 모양이다. 나의 그 시절은 포크의 시대. 그때, 통기타는 MT를 갈 때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대학가에서 접한 이른바 ‘민중가요’ 역시 음악적으로는 포크에서 크게 벗어난 게 아니었다. 확실히 1990년대에 들어와 음악이 확 달라지긴 했던 모양이다. 서태지 음악의 낯섦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뒤 유학을 가는 바람에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사는 내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은 무척 다양해졌다. 음악적 수준도 높아져서, 이제는 노래방에서 가사 보고 따라 부르는 것조차 벅찰 정도. 그러다가 2000년 이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가요가 국제적 현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물결이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거쳐, 남아메리카까지 뻗어나가더니 최근엔 아예 미국과 유럽에까지 상륙한 모양이다. ‘케이팝’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이 국제화의 결과로 생긴 것이리라.
언젠가 <노바디>라는 노래가 한참 유행을 했다. 좋은 노래라도 자꾸 들으면 지겨운 법. 한국에서 이 노래의 열풍이 가라앉았을 때쯤 필리핀에 갔더니, 세상에, 거기선 이제 막 유행이 시작됐는지 어디를 가나 그 노래가 흘러나온다. 택시가 신호를 받아 길에 멈추면, 어느 구석에선가 아이들이 나타나 박수를 치는 동작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른다. “노바디, 노바디 원 추, 짝짝 쿵 짝.” 하긴 한국 관광객의 지갑을 여는 데는 그 방법이 최고일 게다.
1990년대 이후 영화, 드라마, 가요 등 한국 대중문화는 글자 그대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적어도 동남아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그곳 사람들의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만나본 필리핀 젊은이들은 적어도 나보다는 한국 드라마를 더 많이 보고, 한국 가요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한국 대중문화가 그곳 사람들의 안목을 높여, 그곳 대중문화의 수준도 따라 높이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역시 관심을 끄는 것은 케이팝이 일본이나 유럽, 무엇보다도 팝의 본고장인 미국에 진출하느냐 여부일 것이다. 온전히 뿌리내린 것은 아니지만, 이미 부분적으로 성공한 예들이 존재한다. 가령 원더걸스는 2009년 빌보드 핫 싱글 차트 100에 올랐고, 2011년 빅뱅은 미국 아이튠즈 앨범 차트 톱 10에 올랐다. 한편 비는 2005년에 이어 2011년에도 <타임>에서 뽑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두 번째로 선정됐다.
한편 2011년에는 케이팝이 드디어 유럽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샤이니,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그룹이 출연한 이 공연은 발매 15분 만에 표가 동났고,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 덕분에 공연이 하루 연장되기도 했다. 한류 스타들이 입국하던 날 샤를드골 공항에는 1천여 명의 케이팝 팬들이 몰려들어 열광적으로 환성을 질러댔다.
부풀린 위상, 숨겨진 노예계약
아시아에서 케이팝은 이미 주류로 자리잡았지만, 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케이팝의 영향력은 아직 미미한 편이다. 유럽 팬들의 상당수는 ‘망가’를 비롯한 일본의 대중문화를 먼저 접한 뒤 한국의 대중문화로 넘어온 이들이라고 한다. 일본처럼 유럽 사회 역시 취향이 매우 세분화돼 있어, 이미 다양한 나라의 음악이 들어와 있다. 거기서 케이팝은 그저 특정한 마니아 그룹이 즐기는 음악 정도의 위상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한다.
프랑스 파리 공연과 관련해 <르몽드>에서 ‘한국 팝의 물결이 유럽에 밀려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초점은 주로 케이팝의 기업적 성격에 맞추어져 있었다. 케이팝의 아이돌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치밀한 계획에 따라 오랜 기간에 걸쳐 양성되나, 그 수명은 고작 몇 년 정도로 짧다는 내용이다. “한국의 당국에 케이팝은 이웃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자동차와 전자제품, 그리고 이제는 문화 제품의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를 더 잘 알리는 수단이다.”
영국 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의 어두운 면’을 조명했다. 케이팝 스타들은 ‘노예계약’에 묶여 턱없이 낮은 보수를 받는다. 기획사 쪽에서는 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말한다. 음반 시장은 정체됐고, 해적 사이트와 경쟁하느라 다운로드 가격을 턱없이 낮게 책정하다 보니 가수들과 나눌 수익이란 게 없다. 그러니 해외로 진출하는 데 목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케이팝의 돈줄은 국내가 아니라 실은 일본에 있다고 한다.
뮤지션은 ‘태어나는’ 것이라 믿어온 나에게 ‘만들어지는’ 뮤지션이란 개념은 매우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음악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는 느낌이랄까? 음악 시장과 대중 취향에 맞춰 노래·안무·의상은 물론 외모(성형수술)까지 완벽히 계산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된 뮤지션들이라면 차라리 기획사의 아바타라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뮤지션의 개념이 여전히 수공업적이라면, 케이팝은 이미 공장 생산의 단계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동방신기에서 탈퇴한 JYJ의 활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동연 교수는 이를 가리켜 “자신들의 활동을 자신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회복”이라 부른다. “동방신기 시절 SM의 일방적인 스케줄에 의해 활동해야 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자신의 활동에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이제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프로듀싱하고, 그래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아티스트로 불리길 원한다.”
동방신기의 계약 기간이 무려 13년. 이 정도면 시장의 ‘노예’나 다름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아바타가 아닌 뮤지션으로, 기획상품이 아닌 아티스트로 끝내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팬덤이었다. 복잡하게 꼬인 시장의 현실을 보면 해법이 전혀 보이지 않으나, JYJ의 팬들은 수용자의 적극적 태도만으로도 이 답답한 상황을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JYJ가 보여준 변화에 기대를 걸다
음악의 산업화는 어쩌면 불가피한 현상일지 모른다. 오늘날 케이팝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해 국제적 현상이 된 것도 실은 이 음악의 철저한 자본주의화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또 어린 시절부터 거의 ‘아동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것이 케이팝 스타들이 지닌 음악적 기량의 바탕이 돼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고, 아무리 대중의 취향에 맞더라도, ‘영혼’이 결여된 음악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뮤지션은 음악의 생산자(Producer)이지 생산품(Product)이 아니다. 케이팝의 미래는 JYJ가 보여준 이 변화, 이 이행의 가능성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어떤 노래가 대중의 대뇌를 자극하나
과학자의 눈에 불안하기만 한 케이팝의 미래… 히트곡의 보편성에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절묘하게 결합해야만 승부할 수 있을 것
지난 몇 년 사이, 언론은 한국의 대중가요를 ‘케이팝’(K-POP)이라 지칭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만들어진 우리 영화가 질적 성장을 거두면서 ‘방화’ 혹은 ‘국산 영화’라는 지칭에서 벗어나 ‘한국 영화’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처럼, 한국의 대중가요도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 남미 등지에서 주목을 받자 좀더 현대적인 이름을 얻게 됐다. 덕분에 우리는 ‘한국 대중음악’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녀시대의 춤이 왜 매력적인지, 2PM의 노래가 왜 좋은지, 외국인들에게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성찰해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한국 문화의 상품성은 한동안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작곡과 편곡 측면에서 훨씬 세련돼졌고(나처럼 아마추어 문화수용자가 들었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있으며, 글로벌 마케팅의 노하우를 축적했다. 더불어 한국의 기획사들이 아이돌 그룹을 훈련시켜 키워내는 능력, ‘귀로 맛보는 달고나’ 같은 훅송을 찍어내는 능력, 10대 소년·소녀들을 성적 눈요깃감으로 포장하는 능력 또한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문화 키워드’로서 케이팝을 주목하는 것은 적절할 텐데, ‘음악이라는 예술을 즐기는 인간의 뇌’에 관심이 깊은 과학자로서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그러니까 케이팝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만들었으며, 히트한 곡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홍콩 영화’와 같은 비극을 볼 수도…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서양 사람들은 한국 음악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한국 가수의 노래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1990년대 말 가요를 들려주며 뇌파를 측정하는 연구를 수행하던 무렵(그 시절 ‘가요의 신경과학적 연구’에 대한 흥미진진한 뒷얘기는 <과학 콘서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양인들에게 신승훈의 앨범을 들려주면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은 “이 사람은 왜 노래가 다 똑같아?”였다. 신승훈의 독특한 창법과 노래 스타일은 우리에게나 섬세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었지, 우리말을 모르는 그들에겐 모두 비슷하게 들린 모양이다.
당시 히트한 곡들이 갖는 보편적 특징에 대한 연구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음악을 듣는 행위는 그저 청각신호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다음에 나올 음들을 끊임없이 예측하며 즐기는 매우 적극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쉽게 예측 가능해도 자장가처럼 졸리고, 너무 예측이 어려워도 사람들은 즐기지 못한다.
히트한 곡들에 보편적 법칙이나 인기 비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많은 공학자들이 ‘히트곡 제조기’(뛰어난 작곡가에게 붙이는 수식어로서가 아니라 진짜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나 ‘히트곡 예측판별기’를 만들어 사업화하려는 시도를 낳았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창업한 ‘폴리포닉HMI’이나 ‘뮤직 인텔리전스 솔루션’ 등은 인공지능 분야의 ‘머신 러닝 기법’을 활용해 히트할 만한 곡을 만들거나, 여러 후보 중에서 가장 히트할 곡을 선별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음반 제작사들에게 컨설팅해주었다. 노라 존스의 메가히트 데뷔앨범은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찾아낸 히트곡의 일반적 특징은 이런 보편성과 특수성의 ‘절묘한 결합’이었다.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어필하는 대목과 더불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개성적인 특수성이 내재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2NE1 앨범은 서양인이나 동양인 모두에게 어필할 만한 매력적인 멜로디 전개, 세련된 편곡, 신나는 박자 등의 미덕을 갖고 있다. 이와 함께 전 앨범을 관통하는 독특한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랩, 자기비하와 자기만족이 과도하게 교차하는 10대의 정서 등이 그들만의 개성,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케이팝의 인기는 오래갈까? 음악 전문가가 아니라 과학자적 관점에서 보자면(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기도 하지만), 세련되고 화려하며 다양한 기술적 뒷받침과 마케팅 전략이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는 점에서 저력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개성 없이 비슷한 노래를 양산해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대로 했다가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던지게 된다. ‘홍콩 영화’처럼, 한때 전세계적 돌풍을 일으켰으나 이내 진부해진 ‘한 시대의 퇴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집단에 동조하려는 본능이 만든 유행
가장 큰 우려는 ‘동양인들이 서양음악을 흉내내고 있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문화적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흉내내기와 진정한 내적 창조를 구별해낸다. 그런데 흉내내기로 글로벌 마켓에서 살아남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시라. 미국의 한 젊은이가 판소리를 멋들어지게 한다 해도, 우리나라 명창의 판소리를 놔두고 왜 그의 노래를 듣겠는가? 결국 우리는 서양인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독특한 소리, 개성 있는 춤, 한국적인 음악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서양음악의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힙합이나 재즈, 솔의 영향을 받은 곡들이라 하더라도.
그런 점에서 박진영의 미국 진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는 서양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서양의 무대에서 서양 가수들이 성장하는 방식으로 우리 가수를 키워 성공하려 했으나, 패착이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인정받는 ‘아시아적 개성’을 담은 음악으로 넘볼 수 없는 명성을 쌓은 뒤, 그 무시할 수 없는 권력으로 서양 진출을 시도하는 것이 좀더 현실적인 대안이었으리라(SM이 그러는 것처럼).
음악은 ‘유행’을 타며 그 덕에 케이팝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보편적 아름다움과 개성 있는 매력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지 않으면 오랫동안 사랑받기 어렵다. 가요가 음악 자체만이 아닌 ‘집단에 동조하려는 유행’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연구는 굉장히 많다. 이 유행도 조만간 쉽게 꺼진다는 얘기다.
미국 에모리대 신경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그레고리 번스와 그의 동료들은 앨범 구매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사춘기 청소년(12~17살)을 대상으로 노래에 대한 대뇌 반응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같은 노래로 두 차례 선호도 평가를 하는데, 한 번은 그냥 노래를 들려주었고 다른 한 번은 그 노래의 인기 순위를 알려준 뒤 감상하도록 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같은 노래였지만 인기 순위를 알고 난 뒤 선호도가 급격히 상승’했다는 것이다(이 연구 결과는 신경과학저널 <뉴로이미지> 2010년 2월호에 발표돼 화제가 된 바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음악적 취향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좇아 노래에 대한 선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회집단의 행동에 동조하려는 성향은 대뇌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쾌락의 중추인 ‘미상핵’(Caudate nucleus)이 활성화됐다. 반면 인기 순위를 알고 난 뒤 노래를 들을 때는 선호도는 올라갔지만 미상핵의 활동이 늘어나진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나 역겨움을 표상하는 ‘섬피질’(Insular cortex)이 활성화됐는데, 노래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자신의 취향과 다를수록 그만큼 ‘대중의 선호에 따라야 한다’는 감정적 부담이 커지지 때문에 10대의 뇌 안에서 고통과 관련된 섬피질이 활성화된 것이다.
개성 없는 천편일률은 오래가지 못할 것
그러나 유행은 물처럼 흐르는 것. 대중의 마음이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상황에선 남들과 다른 ‘개성적인 매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케이팝의 인기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그레고리 번스는 얘기한다(정말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외국 친구들은 모두 케이팝의 인기를 한국 언론이 말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와 예술의 개성 있는 매력은 천편일률적인 훅송, 노출이 심한 10대들의 성적 교태, 성형수술로 만들어진 사이보그 아이돌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음악까지도 즐기는 서양인들의 ‘음악적 다양성’이 부럽다.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도 바로 그것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