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아카이브/한국힙합 랩

한국 힙합의 발자취 1~3부 (출처 리드머)

seimo 2010. 12. 10. 18:50

들어가는 글

지금의 세계 문화에서 ‘힙합’이라는 단어는 마치 70년대의 펑크와 히피처럼 단순한 음악의 차원을 넘어서서 일종의 젊은이들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힙합의 발상지이자 세계의 대중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국에서 힙합은 비단 음악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대중문화 전체에 깊숙이 침투했는데, 불과 20여년 만에 흑인들만의 하위 거리 문화에서 세계인들이 즐기는 대중문화로 그 위치가 격상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도 마치 70-80년대의 록과 포크 음악처럼 힙합은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살피는데 필수적인 키워드가 되었다. 힙합은 비슷한 시기에 한국으로 유입된 여타 대중문화들에 비해 훨씬 빨리 국내에 자리 잡았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힙합이라는 음악이 어떻게 탄생되었고 어떻게 힘을 키워왔으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 전파되고 흡수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제껏 힙합에 대한 대중매체의 접근이 다소 편향적이고 왜곡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오면서 힙합 음악이 가진 다양한 성격과 그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는 전혀 다른 주체들에 의해 어울리지 않는 미디어를 통하여 왜곡된 형태로 시작된 한국 힙합이 그 본질을 자체적으로 회복하려 했던 지금까지의 과정은 과연 어떠했는가? 이제부터 리드머에서는 최초 우리에게 다소 이질적인 문화였던 힙합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양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거리의 음악이었던 힙합의 이식과 독립의 역사를 살펴보는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한다. 물론, 그동안 한국 힙합의 역사에 대한 것을 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역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아티스트와 발표된 곡의 연대를 통한 단편적인 나열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아직도 평단과 리스너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부분들-예를 들면, ‘한국 최초의 랩은 어떤 곡인가?’와 같은-에 대한 좀 더 신중하고 깊이 있는 접근이 부족했다. 난 이 기획이 이제 막 힙합음악을 듣기 시작했거나 얼마 되지 않은 이들에게 보다 정확한 한국 힙합의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한국 힙합에 애정을 지녀온 이들에게는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거나 간과하고 넘어간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후에 한국 힙합의 발자취를 살피는데 소중한 자료로 남기를 소망한다.

앞서 밝혔듯이 이 기획은 오랫동안 한국 힙합에 애정을 지녀온 이들 뿐만 아니라 이제 막 힙합음악을 접한 이들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미국 힙합의 대략적인 역사와 흐름을 비롯한 힙합의 구성요소와 각각 특징 등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아래 목차 참고). 또한, 리드머에서는 앞으로 한국 힙합의 발자취를 살피는 것 외에도 한국 힙합 씬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앨범과 미 힙합 역사 속의 걸작 앨범들을 시대별로 선정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자, 이제 어쩌면 대장정이 될 수도 있을 한국 힙합 발자취 탐험의 그 첫 발을 내딛기로 하겠다.

                                                                                                  -리드머 편집장 강일권

목차

1. 들어가는 글

2. 미국 힙합의 역사와 차트를 지배하는 블랙 뮤직의 상황


  (1) 디제이(DJ)와 엠씨(MC), 비트(Beat)와 라임(Rhyme)
    1) 디제잉(DJing)과 브레이크 비트
    2) 엠씨잉(MCing)과 라임(Rhyme)


  (2) 랩/힙합 음악의 탄생과 성장
    1) 랩/힙합의 탄생
    2) 힙합 음악의 과도기-올드 스쿨에서 뉴 스쿨로의 발전 진행 양상
    3)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의 부상
    4) 90년대 후반의 주류 힙합씬
    5) 2000년대 힙합 음악


  (3) 현재 미국 주류 음악 시장과 문화에서 힙합이 차지하는 영향력
    1) 문화 전반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 힙합
    2) 지역적 음악색이 뚜렷한 독특한 캐릭터의 랩
    3) 언더그라운드의 급부상
    4) 미국 음악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첨단의 힙합 음악

3. 한국 힙합 음악의 발자취


  (1) 한국 힙합 음악 수용의 방식
    1) 도입기(1992~1995): 댄스 음악을 통한 절반의 수용
      ① 힙합 음악의 변형된 형태, 랩 댄스의 등장
      ② 랩 댄스와 힙합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③ 미국 힙합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던 갱스터 랩 해프닝


    2) 과도기(1996~2000): 힙합 문화 주체들의 결속과 교포 래퍼들의 등장
      ① PC 통신을 통한 힙합 문화 주체들의 결속
      ② 교포 출신 래퍼들의 등장, 그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③ 라임에 대한 인식과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의 등장


    3) 한국 힙합의 현재(2001~2006): 정착의 초기 단계 혹은 여전한 과도기
      ① 한국 힙합의 문화적 양상
      ② 힙합 음악의 정착
      ③ 다양한 크루와 레이블의 출현 및 조직화
      ④ ‘한국의’ 힙합을 세우기 위한 음악적 노력들  
      ⑤ 언더그라운드의 성장
      ⑥ 전문 힙합 프로듀서들의 등장
      ⑦ 힙합 전문 공연의 활성화


  (2) 한국 대중음악에서 힙합 음악이 차지하는 위치
    1) 멜로디에서 리듬으로
    2) 미국 본토 음악 씬의 흑인음악 강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국내 대중음악 씬
      ① 미국의 대중가요가 되어버린 힙합
      ② 국내 대중가수들의 힙합 따라 하기


    3) 힙합 뮤지션들의 노력과 성과
      ①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의 주류 진출을 위한 노력
      ② 힙합 뮤지션들의 잇따른 성공
      ③ 힙합 뮤지션과 대중 가수와의 공동 작업

4. 한국 힙합의 대안과 미래
  
  (1) 한국 힙합의 문제점과 한계
    1) 남아있는 대중들의 오해와 편견
    2) 힙합음악 그 자체가 가지는 영향력은 미비한 실정
    3) 힙합 뮤지션들의 애환
    4) 주체적 수용이 아닌 여전한 모방과 흉내 내기


  (2) 한국 힙합 발전의 대안
    1) 국내 음악 시장 주체의 변화
    2) 매체의 다양화
    3) 클럽 공연 문화의 활성화 노력
    4) 힙합 아이콘의 등장

5. 한국 힙합 음악의 미래

기사작성 / RHYTHMER.NET 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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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 힙합의 역사와 차트를 지배하는 블랙 뮤직의 상황

20여 년 전의 미국 마이너리티들을 대변하던 문화가 오늘날 어떻게 해서 세계와 한국 젊은이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 힙합 음악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힙합만의 독특한 음악적 형식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다른 음악들과 구별되는 힙합 고유의 형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디제이(DJ)와 엠씨(MC), 비트(Beat)와 라임(Rhyme)

힙합 음악을 타 장르와 비교함에 있어 가장 차별되는 점을 꼽으라면 랩(Rap)이라는 메시지 전달 수단과, 일정 마디가 계속 반복되면서 특유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브레이크 비트(Break Beat)라는 형식적 수단, 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힙합은 사전적 의미로 “엉덩이(Hip)를 들썩거리는(Hop) 것a”인데 이것은 가장 단순화된 힙합 음악의 정의이자 또한 가장 유효한 정의이기도 하다. 랩과 비트,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바로 ‘리듬’에 있기 때문이다.

1) 디제잉(DJing)과 브레이크 비트

70년대 초중반 미국의 클럽이나 파티에서는 주로 디스코 음악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자메이카 출신의 쿨 디제이 허크(Kool DJ Herc)는 자신이 틀어주던 레게(Raegge) 음악이 그다지 반응을 얻지 못하자 당시 미국의 주류 흑인 음악이었던 알앤비(R&B)나 훵크(Funk) 음악을 틀어주면서 곡의 간주(Break) 부분을 반복시키는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는 곡 중간의 가사가 없는 부분의 일정 마디만을 계속 거듭해 플레이시킴으로써 곡 전체의 기승전결의 구성에서 벗어난 단순하고 반복적인 비트가 극도의 리듬감을 생성해냈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샘플링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브레이크 비트는 초기 힙합의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반주)적인 형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단순한 루프(Loop)의 반복으로 전체의 곡을 구성하는 힙합의 음악적 형태 때문에 오히려 생동감 있는 리듬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초의 랩 싱글로 평가받는 슈거힐 갱(Sugahill Gang)의 'Rapper's Delight(*정확하게는 최초로 레코딩된 랩 싱글이다)'이다. 훵크 그룹 쉭(Chic)의 'Good Times'의 브레이크 비트를 고스란히 가져와 루핑시키고 그 외의 잡다한 소스들을 첨가하여 흥을 더한 이 트랙은 초기 힙합 비트의 형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 디제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한 곡의 간주 부분만을 반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2개 이상의 레코드 덱(Record Deck)을 이용해 여러 곡의 주요 부분을 짧게 믹스해 틀어주는 한편 재빨리 음반을 바꾸어 가면서 쇼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후엔 디지털 샘플러(*특정 소스로부터 소리를 따와서 그것을 재생하거나 반복시킬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음원의 디지털 저장과 환원이 가능해짐에 따라 샘플링을 활용한 브레이크 비트의 재해석과 재창조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힙합 비트의 음악적 완성 역시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컷 앤 믹스나 컷 앤 페이스트b 같은 사운드 콜라쥬 형태의 비트 메이킹의 대중화는 샘플의 무단 도용에 대한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c, 샘플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힙합 음악의 태생적인 한계와 짝을 이루는 그 탄생에 대한 동경은 샘플링을 통한 작법의 유효함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한편, 초기에는 주로 훵크와 알앤비 음악의 소스들을 사용하던 샘플링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쳐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Boogie Down Productions)가 레게와 힙합 비트를 접목시키고 데 라 소울(De La Soul), 갱스타(Gang starr)등이 재즈(Jazz)를 샘플링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면서 그 음악적인 영역을 더욱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샘플링을 통한 힙합 음악의 크로스오버적이고 하이브리드한 면모는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퍼프 대디(Puff Daddy)나 와이클레프 장(Wyclef Jean)이 시도한 록(Rock)과 클래식(Classic)의 샘플링, 더불어 일찍이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가 시도하였고 팀발랜드(Timbaland)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일렉트로니카와 테크노와의 결합이 현대적으로 재현되면서 그 음악적 영역의 한계를 넓혀갔고, 이에 따라 힙합은 모든 장르의 음악과 교배가 가능한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또한 90년대 후반부터는 팀발랜드식 샘플링을 되도록 지양하는 비트 메이킹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는 근래 들어 스캇 스토치(Scott Storch)나 스위즈 비츠(Swizz Beatz) 등에 의해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2) 엠씨잉(MCing)과 라임(Rhyme)

랩의 시작에 대해서는 사실상 정확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여러 흑인 음악 매체는 디제이 쿨 허크가 파티에서 브레이크 비트를 틀어주고 큰 호응을 얻자 무대의 생동감과 흥분을 더하기 위해 마이크를 통해 거리의 슬랭(Slang)들을 외쳤던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캡 칼로웨이-Cab Calloway-의 'Minnie the Moocher'라는 곡은 랩의 모태가 되었던 곡으로 유명하다). 당시 일종의 여흥구이자 쇼의 진행 멘트였던 랩은 디제이들이 복잡해지고 다양화된 턴테이블 스킬로 인해 쇼의 진행을 전문적으로 맡는 엠씨(MC)를 고용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 같은 팀이 브롱스를 중심으로 점차 늘어감에 따라 지금의 디제이와 엠씨(혹은 랩퍼)의 구도가 갖춰지게 된 것이다. 이후 엠씨들은 점차 자신들의 멘트를 음악에 걸맞게 하기 위해 효과적인 발음법을 개발하며 랩이 가지는 리듬의 영역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이용된 것이 바로 각운, 즉 라임(Rhyme)이다. 이처럼 기존 엠씨들의 구술적이고 자유로운 메시지에 라임을 통한 리듬의 요소가 결합하면서 랩은 점차 음악적인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또한 진화했다.

그럼 여기서 공식적인 최초의 랩 음악으로 거론되는 슈거힐 갱의 의 가사를 잠깐 살펴보자. 보시다시피 여흥구와 간단한 라임이 어우러지며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 said a hip hop the hippie the hippie
to the hip hip hop, a you dont stop the rock it
to the bang bang boogie, say up jumped the boogie
to the rhythm of the boogie, the beat..."

이후 랩의 메시지는 파티에만 고립되지 않고 점차 사회와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렇게 랩의 기술(Skill)이 점차 분화되고 발달하자 랩퍼들 간에 경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이 랩 배틀(Rap Battle), 혹은 프리스타일 배틀(Freestyle Battle)이라 불리는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힙합 문화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랩 배틀은 특정 주제를 라임이라는 룰 안에서 누가 얼마나 더 재치 있고 순발력 있게 표현하는가를 겨루는 것으로 주위 청자들의 호응도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이러한 프리스타일 랩 배틀은 랩이 가지는 핵심적인 특징인 메시지의 전달과 라임을 통한 형식미, 그리고 청자들과 즉시 호흡하는 라이브의 묘미를 두루 갖춤으로써 랩의 시작과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고급의 언어유희적 게임이 되었다. 이것은 엠씨 주변의 상황이나 생각을 아무런 제약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힙합 음악의 메시지가 주제의 한계나 표현의 장애가 없음을 떠올리게 하는 결정적인 힌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랩에 대한 가장 흔한 오류가 바로 ‘랩의 가사는 선동적이고 반항적이다.’ 혹은 ‘랩에는 욕설이 난무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랩 가사의 대표적인 부분은 될 수 있을지언정 랩 가사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랩의 시작은 파티에서 비롯되었다. 그랜드 마스터 플레시 앤 퓨어리어스 파이브(Grand 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 이후 랩 가사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아프리카 밤바타를 거쳐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에 이르러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메시지의 가사로 진보하게 된다. 또한 이후엔 데 라 소울이나 탈립 콸리(Talib Kweli), 커먼(Common) 등으로 대표되는 엠씨들의 다소 이상주의적 성향의 가사도 등장하게 된다. 한편, 랩의 가사와 라임의 형식미를 예술적 범주로 편입시킨 장본인은 라킴(Rakim)인데 그는 직설적인 화법에 의존하던 랩의 메시지를 은유와 비유를 통해 문학적으로 강조했으며 라임과 플로우(Flow)d에 있어서도 모음을 주로 이용하던 당시의 수준을 뛰어넘어 기술적으로 한 단계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와 나스(Nas) 같은 후배 랩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Just when things seemed the same, and the whole scene is lame
I come and reign with the unexplained for the brains till things change
They strain to slang sling, I'm trained to bring game...”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고 그 모든 광경들이 절룩거릴 때, 나는 천재들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지니고 와서 이 모든 것들이 변화할 때까지 군림한다. 그들은 비속어의 끈을 잡아당기고 나는 즐거움을 가져오도록 다듬어졌지(그들은 비속어만 내뱉고 있지만 나는 -랩의 순수한-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지)...”

1997년 발매된 라킴의 솔로 데뷔 앨범 [The 18th Letter]의 동명 타이틀곡은 당시 하드코어/갱스터의 과격한 메시지가 전성기를 누리던 힙합 씬 속에서 빛나는 라임과 멋진 은유적 표현의 가사로 많은 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 앨범에서 라킴은 10여 년 전 자신이 선포했던 새로운 라임의 패러다임을 진일보한 메시지와 언어적 유희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이렇듯 랩은 많은 선구자들을 통해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발전해왔으며 근래 들어서는 랩 음악만으로도 장르적 카테고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메시지와 스타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랩에 대한 섣부른 편견이나 접근은 자칫 힙합 문화 전반에 대한 크나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2) 랩/힙합 음악의 탄생과 성장

1) 랩/힙합의 탄생

근래 들어서야 랩/힙합을 비롯해 알앤비(R&B)와 소울(Soul)에 이르는 흑인 음악들이 빌보드 차트를 지배하면서 완전히 주류 음악으로서의 위치를 굳혔지만 랩/힙합 음악 역시 그 탄생의 시기에는 주로 한때의 작은 유행이나 수많은 대안적 음악 중의 하나에 다름없었다. 랩의 탄생은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됐는데, 뉴욕 브롱스의 흑인들이 벌여왔던 블록 파티(Block Party)e에서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rc)가 짧은 시간동안 곡의 주요 부분만을 짧게 믹스한 음악을 틀면서 흑인 고유의 슬랭을 여흥구로 외쳤던 것의 랩의 시초가 되었다. 바로 그 여흥구가 파티에 참여한 대중들의 좋은 반응을 얻자 디제이들이 믹싱에 집중하기 위해 랩을 하는 엠씨(MC)를 따로 고용하면서 디제이와 엠씨의 기본 구성을 갖추게 되었고 각자의 분야에서 기술적인 발전을 이룸에 따라 오늘날의 랩 음악이 등장하게 되었다.

랩 음악이 본격적으로 미국과 세계의 대중들 앞에 등장한 것은 슈거힐 갱(Sugahill Gang)이 79년 발표한 싱글 'Rapper's Delight'을 통해서다. 최초의 녹음된 랩/힙합 싱글이었던 이 곡은 간결하고 신나는 리듬에 다양한 소스를 첨가한 전형적인 힙합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36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어 등장한 그랜드매스터 플래쉬 앤 퓨어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Furious Five)가 1982년 발표한 'The Message'는 랩 음악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곡이다. 그동안의 흑인 음악이 취해왔던 저항이 다소 역설적인 방법이었다면 이 곡은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후일 힙합의 중요한 매력으로 승화되는 직설화법으로 무장한 “하드코어 랩(Hard Core Rap)”의 탄생에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는[Planet Rock](1982) 앨범을 통해 테크노와 힙합 리듬을 결합하며 사운드 스케이프의 확장과 다양한 장르와의 실험적 교배로 힙합이 가지는 음악적 잠재력의 한계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얻었다.

2) 힙합 음악의 과도기-올드 스쿨에서 뉴 스쿨로의 발전 진행 양상

이후 랩과 비트는 점차 기술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80년대 미국 흑인 사회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황폐화되자 랩은 흑인 사회의 목소리 역할의 수단으로 발전하는데, 이런 흑인 사회의 대변자 역할과 동시에 대중음악적 상품으로서의 가능성까지 검증받은 것은 런 디엠씨(Run-D.M.C.)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랩/록 크로스오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데 특히 1986년 발매한 [Raising Hell] 앨범에선 인기 록 그룹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협연한 'Walk This Way'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최초로 멀티 플레티넘을 달성한 랩 앨범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는다. 하지만 그들의 사운드는 록 음악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었기에 독창적인 힙합 음악을 완성해낸 그룹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랩 음악이 나름의 형식과 구성의 완전한 완성을 이룬 것은 이후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와 에릭 비 앤 라킴(Eric B. And Rakim),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Boogie Down Productions)등에 의해서였다.

에릭 비 앤 라킴은 기술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비트와 라킴의 랩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가사의 구술과는 별개로 자음과 모음을 보다 기술적으로 활용하며 랩 자체에 리듬감을 부여한 입체적인 개념의 라임(Rhyme)은 후대의 랩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의 래퍼 케이알에스 원(KRS-One)은 거리의 문화들을 나름대로 집대성하며 철학으로 승화시켰는데 그가 정의한 거리의 철학은 훗날 갱스터 랩(Gangster Rap)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이러한 하드코어 랩의 완성은 퍼블릭 에너미의 정치적인 랩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1988년 발표한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은 그 자체가 바로 하드코어 힙합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정치적인 메시지와 강렬한 사운드는 비단 흑인들뿐만 아니라 백인 저소득층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8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f 한편, 80년대 중반에 등장한 백인 그룹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는 랩과 록의 양쪽 팬들로부터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데뷔 앨범 [Licensed To Ill](1986)은 랩 앨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챠트 1위로 데뷔하며 7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는데 힙합 비트와 록과 훵크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이후 팝, 재즈에 이르는 방대한 음악적 스케일에 걸맞는 탁월한 조화를 선보이며 힙합 음악의 하이브리드한 면모를 극단적으로 대변했던 그들의 캐릭터는 산업적/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g

3)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의 부상

퍼블릭 에너미와 뉴욕의 힙합씬이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걸쳐 약간의 침체기에 놓여 있을 때 대중 음악계에서 맹위를 떨치던 것은 엠씨 해머(MC Hammer)를 위시한 댄스/랩 계열의 래퍼들이었다. 특히 엠씨 해머는 80년대 후반 뉴욕 하드코어 랩의 부진과 90년대 초반 팝계에 전면으로 급부상할 서부 갱스터 랩의 공백기에서 앨범 [Please Hammer Don't Hurt Em](1990)을 통해 천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랩이라는 음악 장르를 전 세계로 알렸다. 디제이 재지 제프 앤 프레시 프린스(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나 톤 록(Tone Loc) 또한 싱글차트와 앨범차트를 누비며 나름대로 랩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지만 이들 모두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는 힘들었다.

뉴욕에서 퍼블릭 에너미가 강력한 어조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설파하던 무렵 미국의 정반대편 LA에서 등장한 N.W.A.는 파괴적이고 향락적인 무법자의 이미지로 대중 음악계에 또 다른 파장을 몰고 왔다. 이들은 케이알에스 원과 아이스 티(Ice-T)가 먼저 정립해놓았던 게토(Ghetto)와 갱스터의 이미지 위에 폭력과 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미화를 더해 거리의 삶을 찬양하는 갱스터 랩의 전형적인 양식을 확립한다. N.W.A.의 일원이었던 닥터 드레는 92년 지-훵크(G-Funk)h라는 독자적이고 충격적인 사운드로 무장된 [Chronic]을 발표해 그해 빌보드 차트에 8개월간이나 10권내에 머물렀고 4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갱스터 랩의 전성기를 선포했다. 이듬해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g)의 데뷔 앨범[Doggystyle]이 5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뒤이어 워렌 지(Warren G)와 독 파운드(Dogg Pound)가 잇따라 히트하면서 갱스터 랩의 위상은 끝없이 치솟았다. 폭력과 마약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여성 비하 등의 이유로 받던 많은 비판과는 대조적으로 하늘을 찌르던 갱스터 랩의 인기는 투팍(2Pac)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 특히 랩 음악 사상 최초의 더블 앨범이었던 [All Eyez On Me(1996)]의 엄청난 성공은 이전부터 갱단과 관련된 사건에 잇따라 연루되었던 과거를 배경으로 갱스터라는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진실성을 확보한 결과이자 그 성공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투팍이 의문의 총격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갱스터 랩도 차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투팍이 죽은 후에도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메시지는 많은 흑인 청년들의 공감과 존경을 얻어내며 많은 게토의 청년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90년대 후반의 주류 힙합씬

투팍과 노터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한 갱스터 랩의 퇴조 이후 씬의 전면에 나선 것은 푸지스(Fugees)와 퍼프 대디(Puff Daddy)가 주도한 팝-랩이었다. 96년 푸지스는 [The Score] 앨범을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그 전면에는 와이클레프 장(Wycelf Jean)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에 보태 로린 힐(Lauryn Hill)의 스타적인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듬해에는 노터리어스 비아이지의 추모곡 'I'll Be Missing You'으로 탁월한 팝적 감각을 뽐냈던 퍼프 대디가 데뷔 앨범[No Way Out(1997)]을 내놓고 97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90년대 중후반에는 많은 뮤지션들이 등장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머쥐었는데 빠르고 멜로디컬한 랩으로 주목받았던 클리블랜드 출신 본 떡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를 비롯해 노터리어스 비아이지 사망 이후 뉴욕 힙합의 맹주로 추앙 받는 나스(Nas)나 제이 지(Jay-Z)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5) 2000년대 힙합 음악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기까지 힙합 씬의 가장 큰 화두는 “언더그라운드(Under Ground)힙합”이었다. 모스 데프(Mos Def)와 탈립 콸리(Talib Kweli)는 그들의 듀오 앨범 [Black Star]와 각각의 솔로 앨범을 통해 새천년 힙합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패로아 먼치(Pharoah Monch)를 비롯한 수많은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대중적으로 주목받았다. 한편 주류 힙합 씬에서는 90년대 후반 이후의 팀발랜드와 넵튠스, 스위즈 비츠 등의 여전한 득세와 퍼프 대디의 몰락, 그리고 백인 래퍼 에미넴(Eminem)을 앞세운 닥터 드레의 재입성이 이루어졌다. 특히 96년 자신의 레이블 애프터매스(Aftermath)를 설립한 닥터 드레는 에미넴과 자신의 복귀 앨범, 그리고 50 센트(50 cent)의 앨범을 연달아 크게 성공시키며 독특한 소울 샘플링으로 인기를 얻은 신예 프로듀서/랩퍼 칸예 웨스트(Kanye West)를 발굴해낸 제이 지의 락카펠라(Roc-a-Fella) 레이블과 함께 주류 힙합 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등극하였다.

3부에서 계속

※참고

a 최초로 힙합(Hip Hop)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뮤지션은 불분명한데 대개 디제이 할리우드(DJ Hollywood) 또는 그랜드 매스터 플래시 앤 퓨어리어스 파이브(Grand 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에서 활동했던 고(故) 카우보이(Cowboy)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당시의 광고 전단지 등에선 힙합 뮤지션으로 소개되기보다는 디스코 계열의 뮤지션으로 분류되었다.

b 일반적으로 기존의 어떤 곡의 소스나 곡의 일부를 잘라내서 새로운 곡의 소스로 결합시키는 샘플링의 기법. 예로써 디제이 프리미어가 프로듀스한 나스(Nas)의 'Memory Lane'은 루벤 윌슨의 'We're In Love'를 샘플로 해서 컷 앤 페이스트 기법을 통해 창조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기존 곡의 익숙한 매력과 재창조의 신선한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c 1987년 에릭 비 앤 라킴(Eric B. & Rakim)의 데뷔 앨범 [Paid In Full]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샘플을 무단 사용해 법적 제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얼마 전에는 1997년 사망한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의 1994년 발매된 데뷔 앨범 [Ready To Die]가 오하이오 플레이어스(Ohio Players)의 곡을 무단 도용한 것이 인정되어 내쉬빌 법정에서 판매 금지 처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d사실 랩에서 플로우(flow)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랩을 할 때 리듬을 타면서 형성되는 일정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래퍼마다 라임을 배치하는 것이 다르고 랩을 할 때의 억양과 호흡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플로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얼마나 라임을 잘 살리면서 리듬을 잘 타는가에 따라 플로우가 좋냐 나쁘냐가 갈린다.

e음악과 춤이 함께 했던 동네에서 여는 파티나 콘서트. 블록 파티는 70년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역적으로 파티의 색깔이 달랐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이 살던 지역에서는 길의 일정 구역을 막아 놓은 상태에서 DJ들의 음악과 함께 파티가 열렸는데, 대부분 불법적으로 진행이 되었던 반면, 도시 주변의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노동절과 같은 특정 공휴일에 블록 파티가 열렸는데, 저소득층 구역에서 열리던 파티와는 달리 바비큐를 구워먹거나 Simon Says(제스처 게임의 일종으로 사이몬 역이 명령하는 동작을 모두가 따라하는 게임) 등을 하며 다소 얌전(?)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f팀의 리더였던 척 디는 1992년 10월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문화 엘리트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g원래 비스티 보이즈는 훵크 밴드로 결성되었으며 영국의 음악 잡지『스핀』에서 선정한 100대 앨범에 선정된 그들의 데뷔 앨범은 헤비메탈과 랩의 절묘한 조화라고 평하고 있다.

h닥터 드레(Dr.Dre)가 창조한 갱스터 훵크(Gangsta Funk)의 준말로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추구했던 피 훵크(P-Funk)에서 이름의 모티프를 가져왔다. 두터운 베이스와 피 훵크를 비롯한 올드 소울과 훵크 음악에서 따온 샘플링을 바탕으로 한 멜로딕하고 느긋한 분위기의 g-Funk는 드럼과 베이스만이 강조되던 힙합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웨스트코스트(Westcoast)지역 스타일의 힙합음악이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작성 / RHYTHMER.NET 강일권, 김봉현, 염정봉, 예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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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재 미국 주류 음악 시장과 문화에서 힙합이 차지하는 영향력

1) 문화 전반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 힙합

랩 음악이 빌보드 차트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힙합 뮤지션들은 빈민가에서 자수성가한 흑인으로서 게토의 롤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는 상품으로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밑바닥 인생에서 음악을 통해 거듭나 엄청난 부를 이룩한 백인 래퍼 에미넴(Eminem)이나 최근 이슈 메이커로 떠오른 50센트(50Cent)는 일종의 문화적인 아이콘이 되었고 더불어 그들의 슬랭 가득한 언행이나 큼직한 힙합 패션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은 물론 백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힙합은 이제 패션 산업에서도 중요한 시장이 되었으며 많은 브랜드들이 래퍼들과 계약을 맺고 나름의 홍보를 기획하는가 하면 뮤지션 본인이 투자에 뛰어들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패션 레이블을 차리기도 한다. 앨런 아이버슨(Allen Iverson) 이후 미 프로 농구 리그인 NBA를 통해서도 힙합은 문화와 패션은 물론 문신과 헤어스타일을 통해 대중적으로 더욱 널리 전파 되었다.a 한편, 영화계에서도 힙합은 중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는데 꼭 에미넴의 <8 Mile>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윌 스미스(Will Smith)를 비롯해 아이스 큐브, 디엠엑스(DMX)같은 인기 래퍼들의 영화계 진출은 흔한 일이 되었으며 영화의 O.S.T.가 힙합 음악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많다.

2) 지역적 음악색이 뚜렷한 독특한 캐릭터의 랩

힙합 음악이 가지는 또 하나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각 지역마다 나름의 음악적 색깔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뉴욕을 위시한 동부의 재즈와 소울에 기반을 둔 묵직하고 단단한 질감의 사운드와 LA로 대표되는 서부 연안의 나긋나긋한 베이스 라인의 선율이 강조되는 지-훵크 사운드에서 예를 들 수 있다. 또한 마이애미 베이스(Miami Bass)b나 드럼 앤 베이스(Drum 'n Bass)c 등에서 영향을 받은 남부 계열의 마이애미, 휴스턴, 애틀란타 같은 도시들도 나름대로의 음악적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근래에 접어들면서 팀발랜드(Timbaland)나 넵튠스(Neptunes)등의 마이크로 싱코페이션(Micro Syncopation) 비트d에 기반한 디지털 훵크(Digital Funk)의 강세로 각 지역의 대표적인 뮤지션들이 주류적인 취향에 편입되면서 예전보다는 지역적 음악색이 많이 중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더욱 과거 지향적이고 간결한 구성으로 진화한 서던 랩이 제2의 도약기를 맞아 다시금 그 차이를 뚜렷이 하고 있다. 하지만 서던 랩의 강세가 거세질수록 사색과 반성이 거세된, 마초적인 허세와 핌프(Pimp)로서의 자기과시에 충만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영향도 나날이 커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적인 음악으로 연이어 호평 받아온 아웃캐스트(Outkast)나 흑인 고전 음악에 바탕을 둔 진지한 재해석으로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한 제이 지나 카니에 웨스트(Kanye West), 커먼(Common) 등은 주류 랩씬에서 음악성과 상업성의 절충점을 찾아낸 선구자들로 호평 받고 있다.

3)언더그라운드의 급부상

거대한 주류 음악 씬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언더그라운드 씬이라는 그림자가 필요한데 힙합 음악이 메인스트림에서 성공하고 그 힘을 공고히 한 데에는 언더그라운드에서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성과가 어느 정도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Do It Yourself" 정신을 바탕으로 돈보다는 음악적인 열정이 우선시되는 언더그라운드 씬에서는 주류 랩 씬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극단적인 음악적 실험이나 사운드의 근원을 향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다. 초기 재즈와 소울에 천착하며 개인적인 자아 반성과 주류 씬에 대한 반론을 구사하던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90년대 초중반 다양한 음악적 집단 혹은 크루(Crew)들이 등장하면서 일종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모스 데프(Mos Def)와 탈립 콸리(Talib Kweli)에 이르는 ‘네이티브 텅(Native Tongue)'e 같은 진보적인 집단에서부터 D.I.T.C.같은 갱스터 멘탈리티를 지향하는 집단까지 다양하게 등장하여 인기를 모았다. 특히 컴퍼니 플로우 (Company Flow)의 멤버 엘-피(El-P)가 설립한 데피니티브 적스(Definitive Jux) 레이블의 실험성 강한 음악이나 베이 에에리어(Bay-Area) 지역의 턴테이블리즘과의 적극적인 결합을 통한 대안적인 힙합은 메인스트림 힙합에 식상해하던 팬들에게 큰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적극적인 도전 정신,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 등은 국내의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국내 힙합의 성장에도 많은 모티브를 제공했다.

4) 미국 음악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첨단의 힙합 음악

국내의 외국음악 청자 층은 아직 록과 팝에 경도되어 있지만 몇 년 전부터 빌보드 차트에서 랩 음악이 강세를 누리고 팝 음악과의 결합이 좀 더 가속화되면서 국내에도 서서히 랩 음악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초기 유입되던 랩 음반들은 소수의 마니아층을 통해서만 구매되었지만 국내 가요계에도 점차 힙합 뮤지션이 많아지고 또한 미국 팝계에서 랩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해마다 증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내 음반시장에서도 힙합 음반이 나름대로 활발히 거래되기 시작했다. 또한 CF나 모바일 시장에서도 랩 음악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더불어 에미넴이 미국에서 정상의 위치에 오르자 국내에서도 반항적인 아이돌의 형태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뒤이어 어셔(Usher)나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등 미국에서 힙합 음악을 도입하는 스타 뮤지션이 증가하면서 그들의 음악과 패션이 동시에 주목을 끌었다. 이에 따라 점차 국내 대중 음악계의 스타들이 그들을 벤치마킹하면서 미국 주류 힙합 음악에 대한 국내 음악 팬들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게다가 시기적절하게 국내에서도 나이트클럽의 대안적인 유흥 공간으로써 생겨난 힙합 클럽이 점차 활성화됨에 따라 기존의 힙합에 대한 반항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고정관념은 ‘좀 더 즐기기 쉬운 문화’로 그 의미가 바뀌어가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그 입지가 점점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3. 한국 힙합음악의 발자취

앞서 우리는 힙합 음악이 국내 대중가요의 주류로 신속히 입성하게 된 사전 배경으로써 미국 힙합 음악의 개략적인 역사와 현재 미국 내에서 힙합 음악과 문화가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럼 힙합음악이 국내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고찰에 앞서 우선 그 상위개념인 문화로서의 힙합이 어떻게 이식 되었는가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오늘날 힙합이라는 단어가 대중문화의 키워드라는 점은 미국과 우리의 그것이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960년대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흑인 민권운동의 과정에서 파생된 그들의 하위문화를 바탕으로, 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 내 흑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대변되던 미국의 힙합 문화는 최초 음악적 측면과 외형적 측면으로만 새로운 시도를 하려던 국내 대중가수들에 의해 그 본질적인 면은 뒤로 밀려난 채 표면적인 부분만 이식되었다. 즉, 음악을 포함한 흑인들의 삶과 철학 전반을 아우르는 하나의 문화로써의 힙합이 아닌, 단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춤을 추거나 랩을 통해 자유를 외치는 것이 곧 힙합이라는 잘못된 형태로 그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국내에 힙합이 처음 소개된 후 힙합은 하나의 독립된 문화로 인정받기 보다는 청소년층이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치기 어린 투정내지는 한 때의 유행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힙합 문화의 범주 안에서도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힙합 음악의 유입 과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이라는 이유와 미국 본토 힙합음악이 내포하고 있는 공격성 때문에 제대로 된 힙합음반을 접할 수 없었던 국내의 대중들은 일부 대중가수들이 그때그때 입맛에 맞춰서 변형시킨 음악을 진짜 힙합으로 알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힙합이 품고 있는 여러 성질의 일부인 자유와 반항의 이미지를 마치 힙합의 전부인 양 부각시키며 힙합음악이 상업적 용도로 쓰이는 것을 부추긴 대중매체들은 힙합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자리 잡는 데 크게 한 몫 했다. 원류가 되는 미국 힙합 문화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무시한 채 성급히 행해진 힙합의 한국화는 주체적 수용이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어설픈 흉내 내기밖에는 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힙합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의 시간을 상당히 늦추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힙합음악의 발자취에 대해 시기 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1) 한국 힙합 음악 수용의 방식

우선 항상 논란이 되어온 한국 최초의 랩에 대한 것부터 명확히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은 과연 ‘랩’이라는 것을 어느 범위에서 인정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라임-흔히 각운과 두운 등을 이용한-을 랩의 필수 요소로 전제하고 글을 전개해 나감을 밝힌다. 한국 최초의 랩이 무엇이냐를 논할 때면, 대부분 두 곡을 기점으로 의견이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홍서범의 ‘김삿갓’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그것이다. 지금까지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왔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한국 최초의 랩이라 평하는 것을 많은 이가 당연시 여겨왔지만, 점점 힙합음악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불어나면서 서태지 이전에 국내에서 랩을 시도했던 이들이 거론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바로 홍서범이 서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신해철, 이현우, 015B, 김건모 등이 존재하지만, 신해철의 ‘안녕’과 이현우의 ‘꿈’은 영어로 된 랩이었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고 015B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라임의 부재와 플로우라고 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보컬의 전개 등 랩보다는 나래이션에 가깝다. 또한,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역시 라임의 부재 때문에 엄밀히 따져서 제대로 된 랩이라 부르기에는 모호한 상황이다. 그러나 분명, 홍서범의 존재는 다시 평가를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가 1989년에 발표했던 1집 수록곡 ‘김삿갓’은 비록 매 구절마다는 아니지만, 각운과 음수율을 이용하여 라임과 플로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가끔씩 보이는 라임이 오늘날 시점에서 보자면 너무 단순하기는 하지만, 미국 최초의 랩이라 일컬어지는 슈거힐 갱의 "Rapper's Delight"도 지금에 와서 보면 꽤 단순한 라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당시 가요계가 아직 랩이라는 장르의 존재조차 생소했던 시기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홍서범의 시도는 가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이 곡의 비트는 힙합과 다소 거리가 멀었던 서태지의 곡에 비하면 훨씬 미국 본토의 올드스쿨 힙합에 가깝게 다가서 있다. 더구나 후렴구 역시 반복되는 단어의 매칭을 통해 운율을 형성하며 랩의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어 한국 랩의 효시라 부르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옛날 TV 쇼 프로그램에서 그가 종종 반 우수개소리로 외치던 “제가 랩의 원조에요.”라는 말을 이제는 코미디가 아닌 정극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이쯤 되면 항상 제기되는 의문점이 있다. 그렇다면, 고 서영춘 선생의 “서울구경”과 서수남, 하청일의 “팔도유람”은? 혹자들은 가끔씩 고 서영춘 선생의 곡을 한국 최초의 랩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 두 곡은 ‘최초의 랩’ 논란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라임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단지 기존 보컬 형식에서만 벗어나 있을 뿐 애초에 랩과는 거리가 먼 곡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2년 발표된 서수남, 하청일의 “팔도유람”은 컨트리 가수였던 행크 스노우(Hank Snow)가 미국 유람기를 소재로 만든 곡 “I've Been Everywhere"에서 보컬과 가사 컨셉을 99% 그대로 빌려온 리메이크였기 때문에 논의에서는 제외시키는 것이 옳다. 하지만, 고 서영춘 선생이 1960년대 발표했던 ”서울구경“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 랩의 모태가 되는 음악으로써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모태’라는 표현을 ‘최초’라는 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미국 힙합의 역사를 논할 때면 항상 랩의 모태로 거론되는 캡 칼로웨이의 ”Minnie The Moocher" 처럼 말이다. 

1) 도입기(1992~1995) : 댄스음악을 통한 절반의 수용

① 힙합 음악의 변형된 형태, 랩 댄스의 등장

미국 흑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힙합 음악은 90년대 초반 댄스 음악에 랩이 가미되는 이른바 랩 댄스라는 변형된 형태로 국내 가요계에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신해철과 이현우 같은 가수들이 각각 ‘안녕’과 ‘꿈’이라는 곡을 통해 영어 랩을 선보이긴 했지만, 랩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본격적으로 힙합 음악을 대중에게 알린 것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과 현진영, 그리고 듀스(Deux)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곡의 8할 정도를 랩으로 채운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기존의 가요에만 길들여져 있던 음악계와 수많은 대중을 당황케 했다. 이 곡의 등장이 국내 가요계에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겼는지는 1992년 이들이 출연했던 MBC TV의 [특종 TV 연예]라는 프로그램에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코너에 출연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심사위원들의 혹평 속에 역대 출연자들 중 최하위의 점수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같은 해 미국에서는 두 명의 꼬마 래퍼들로 이루어진 크리스 크로스(Kris Kross)의 ‘Jump'라는 힙합 음악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점과 비교해본다면 당시 국내 음악계에서 랩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생소한 음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선한 면이 있으니 성장할 가능성은 있는” 정도로만 치부됐던 이들의 음악은 10대들의 전폭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며 자신들의 존재 가치와 더불어 랩이라는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순식간에 반전시켜버렸고, 데뷔곡이었던 '난 알아요'는 제대로 된 랩의 시초로 국내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② 랩 댄스와 힙합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한편,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듀오 듀스는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더 미국 힙합음악에 가까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타이틀곡이었던 '나를 돌아봐'를 비롯하여 랩에 큰 비중을 둔 '알고 있었어'와 '매일 항상 언제나' 같은 트랙은 비록 완벽하진 못 했지만 보다 힙합음악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곡들이었고 해당 곡들이 담겨있던 데뷔작을 통해 이들은 대중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발표했던 두 번째 앨범 [Deuxism]에서 이들은 더욱 진보한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스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이처럼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듀스로 이어지는 성공은 발라드와 록 음악만이 전부였던 국내 대중들의 입에서 힙합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흘러나오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동시에 랩과 힙합을 앞세운 가수들이 가요계에 등장하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데뷔시기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보다 빨랐지만 뒤늦게 주목을 받았던 현진영 역시 국내 대중음악 씬에 힙합음악을 전파하고자 한 1세대로서 92년 앨범이었던 [New Dance]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성공의 단맛을 보게 되는데, 이보다 앞서 90년도에 발표했던 ‘슬픈 마네킹’은 그 구성면에서 힙합음악 작법에 충실한 최초의 음악으로 평가할 만하다. 또한, 다른 곡이었던 ‘현진영 Go, 진영 Go’에서는 단순하긴 하지만 라임을 갖춘 후렴구를 선보이며 보다 더 미국 본토의 힙합 음악에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당시 우리가 힙합이라 부르던 음악들은 엄밀히 따져서 완전한 힙합음악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 듀스를 비롯한 그때의 몇몇 가수들의 음악은 힙합음악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힙합이라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이야기다. 아무래도 멜로디에 민감한 국내 대중의 입맛을 끌기 위해 보컬라인의 삽입과 적당히 멜로디가 있는 유럽의 하우스 음악이나 테크노 음악의 부분적인 차용이 부득이했는데, 현재까지도 국내 힙합음악의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의 경우만 하더라도 힙합, 메탈, 테크노 음악 스타일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음악이지 멜로디와 보컬의 비중을 극히 배제하고 베이스와 비트를 강조하던 당시의 원래 힙합음악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서태지의 음악은 유럽의 랩댄스 음악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듀스나 현진영의 음악 또한 랩이 갖는 본연의 매력보다는 멜로디와 보컬의 영향력이 더 컸다는 점에서 테디 라일리(Teddy Riley)나 키스 스웻(Keith Sweat) 등이 추구했던 뉴 잭 스윙(New Jack Swing)f에 가까운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③ 미국 힙합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던 갱스터 랩 해프닝

한국 힙합 도입기의 막바지라고 할 수 있는 95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으로 인해 갱스터 랩(Gangsta Rap) 열풍이라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발생했다. 최초 미국의 실제 갱단 출신의 래퍼들이 랩을 했다는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인 갱스터 랩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의 가사를 앞세워 그네들의 문화를 표현해 내던 음악이었다. 그런데 이를 많은 이가 ‘어둡고 거친 분위기의 비트가 담긴 음악이 곧 갱스터랩’이라고 잘못 받아들인 까닭에 당시 랩을 한다는 가수들이 너도나도 갱스터랩을 표방하며 나오기 시작했다. 갱스터랩이라는 장르를 구분 짓는 것은 그 랩의 주체가 누구인가와 가사적 컨셉이고 비트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도구였음에도 이를 알지 못한 당시 국내의 많은 뮤지션과 매체는 단지 음악적인 부분, 그것도 아주 일부분만을 갱스터랩의 모든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가요계에서 발라드 음악으로 제일 유명했던 모 작곡가의 경우는 공중파 방송 연예프로그램에서 갱스터랩을 추구하는 그룹을 키우고 있다는 무지한 발언까지 했을 정도였다. 결국, 문화적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그 의미에서부터 국내에서는 탄생자체가 불가능했음에도 해당 장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몇몇 뮤지션들에 의해 국내의 대중음악계는 또 한 차례 잘못된 힙합 문화의 열병을 앓아야만 했던 것이다.  

4부에서 계속

※참고

a 미국의 문화 평론가 마이클 에릭다이슨은 앨런 아이버슨을 ‘점프슛을 하는 투팍’으로 지칭했다. 아이버슨은 백인관중 위주의 NBA를 힙합으로 장악한 장본인이며 그 어떤 래퍼들보다도 현대의 힙합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b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가 솔소닉 포스(Soulsonic Force)와 함께 발표했던 [Planet Rock:The Album]에서 소개한 E-Funk(Electro Funk)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로서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으로 만들어진 매우 빠른 비트의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다.

c 영국에서 시작된 일렉트로니카(Electronica)의 하위 장르로서 오로지 빠른 드럼머신과 깊은 베이스만으로 곡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브레이크 비트(Break Beat), 레게(reggae), 덥(dub) 그리고 R&B 등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재즈(Jazz)와의 접목도 두드러진다. 정글(Jungle)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져 있으며 마이애미 베이스와 마찬가지로 역동적이면서 춤추기에 좋은 음악이다.

d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팀발랜드(Timbaland)가 창조한 비트로 현 메인스트림 힙합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음악스타일이다. 세밀하게 쪼개진 드럼과 전자음을 결합시킨 이 독특한 스타일은 기존의 힙합 음악의 체계를 뒤흔들며 '음악'이라기보다 일종의 디지털 '과학'으로까지 평가하는 무리가 생겨날 정도로 존경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  De La Soul, ATCQ, Brand Nubian, Bush Babees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거리에 대한 거친 삶을 읊어대거나 파티를 위한 찬가를 불러대던 힙합의 전형적인 모델을 벗어나 흑인의 뿌리와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사회, 문화, 정치까지 아우르는 의식 있고 진중한 가사를 특성으로 하는 집단이다. 현재는 Common, Talib Kweli, Mos Def 등이 2세대 네이티브 텅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f  뉴 잭 스윙은 기존의 리듬앤블루스에 힙합을 도입하여 느린 템포의 노래에서도 흥겨움을 주는 음악이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의 리듬앤블루스 음악인들은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반면, 힙합을 즐기는 주위의 환경에서 자라났다. 따라서 뉴 잭 스윙이 유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키스 스웨트(Keith Sweat)와 테디 라일리(Teddy Riley)가 뉴 잭 스윙을 크게 융성하게 한 장본인들이다.
 
업데이트. 2007-06-06

기사작성 / RHYTHMER.NET 강일권, 김봉현, 염정봉, 예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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