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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럽데이 중단을 통해 홍대앞과 클럽을 얘기하다 (출처 스트리트 H)
    대중음악아카이브/분석과 비평 2016. 11. 9. 21:14
    원문: http://street-h.com/magazine/44979
    스트리트 H 
    2011년 02월호_Vol.021

    클럽데이 중단을 통해 홍대앞과 클럽을 얘기하다


    매회 모이는 인파만 1만 명에 달했던 클럽데이. 클럽데이가 지난 1월 116회를 마지막으로 중단을 선언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10년 넘게 홍대를 대표하던 문화적 아이콘이었던 클럽데이의 중단은 놀라운 일이다. 홍대앞의 클럽신은 국내의 다른 지역이나 서구와도 다른 양상을 띈다. 보통 클럽이라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댄스클럽만을 생각하기 쉽다. 디제잉을 중심으로 한 메타장르로서 테크노를 앞세운 서구에서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홍대앞은 록음악 공연을 중심으로 한 라이브클럽과 테크노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댄스클럽이 공존하고 있다. 미 8군 무대에서 시작되었지만 군부정권 아래 가요규제조치와 방송금지조치, 대마초 사건 등 일련의 제재 속에서 사라져간 한국의 록음악을 되살려낸 홍대앞의 라이브클럽들. 1990년대 중반 드럭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하나 둘 생겨난 라이브클럽들은 당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얼터너티브록을 무기 삼아 청년문화와 결집하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프리버드(1995년 10월 오픈), 재머스(1996년 1월 오픈), 롤링스톤즈(1996년 6월 오픈) 등 라이브클럽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1997년에는 개클연(개방적인 클럽연대)으로 뭉쳐 ‘클럽합법화 투쟁’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클럽은 3인 이상의 밴드 공연을 못하게 했던 식품위생법 적용으로 인해 툭하면 영업중단, 폐업 등의 조치를 받아야 했고, 이에 반발한 클럽대표와 밴드들의 맹렬한 ‘클럽합법화 투쟁’의 결과 1999년 5월 드디어 합법적으로 인정받게 이른다. 한편, 댄스클럽도 다른 곳과는 다른 태동 양상을 보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역적 배경에 홍익대 미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적 취향이 독특한 미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작업실’ 문화는 이후 홍대앞 클럽들의 모태가 된다. 1992년 생겨난 ‘발전소’는 그 원형이라 할 만했다. 원시적인 건강성과 손수 꾸민 인테리어가 보여주는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분위기, 그리고 미술과 음악 등 타 분야 및 장르가 융합되는 이종교배의 현장 속에서 즉흥 퍼포먼스, 해외 음악 중심의 소개가 이뤄졌다. 이러면서 발전소, 명월관, 황금투구와 같은 홍대 클럽은 공유된 취향과 비슷비슷한 미디어 소비방식을 가진 이들의 해방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1990년대 초 신촌과 홍대를 중심으로 록음악을 전문적으로 틀어주던 스카로 대변되는 록카페 문화가 결합하는 형식으로 클럽신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신촌 홍대 쪽으로 대거 유입되던 주한 외국인과 유학생들이 결합하면서 본격적 댄스클럽들도 성황을 이루게 됐고,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는 ‘레이브 파티(Rave Party)’나 ‘101레이버스’ 같은 테크노 동호회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댄스클럽 역시 식품위생법의 저촉으로 불법이라 간주되면서, 또 일부 클럽에서 벌어졌던 환각제 문제를 선정적으로 다룬 언론의 호들갑 속에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클럽데이는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최초의 클럽데이는 2001년 3월 마지막 주 금요일, ‘클러버들 하나되는 날 Clubber’s Harmony’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며 4개의 클럽(MI, nb, Underground, SSAB)이 뭉침으로서 시작했다. 클럽데이는 이후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둔다. 한편 홍대앞 라이브클럽들은 2004년부터 사운드데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음악을 한 장의 티켓으로 들을 수 있는 행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2007년 12월 사운드데이에 참여했던 9개 라이브클럽이 80회 클럽데이를 기점으로 기존 클럽데이와 통합하기에 이른다. ‘한지붕 두가족’의 형태로 화학적 결합을 기대했던 이 실험은 그러나, 클럽데이의 잠정 중단을 지켜볼 때 어느 정도 실패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클럽데이는 그후 마지막 주 금요일이면 그야말로 홍대앞을 들썩이게 만드는, 장르를 초월한 음악과 춤이 있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116회 동안 달려오면서 클럽데이가 유일하게 중단되었던 때는 2009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있던 당시가 유일했다. 그러나 여러 문제 또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중화, 상업화라는 양적인 성장은 가져왔지만 홍대앞만이 가질 수 있는 창조적인 재생산구조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첫 번째일 것이다. 오히려 지나친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의 전환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분분하다. 특히 ‘부비부비’로 대변되는 선정성 논란은 이전 클럽이 가졌던 커뮤니티적 성격이 유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한다. 그러나 클럽데이를 운영하는 클럽문화협회는 “클럽신은 클럽과 상업이 함께 가야만 하며, 충분히 그렇게 하면서도 지역문화에 기반한 건강함과 내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0년 클럽데이를 지켜봐온 많은 클러버들 역시 클럽 문화가 단순한 유흥이라는데 반대하고,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가 기획·실험·창출·소통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대형 클럽의 지나친 호객행위나 영업위주의 활동이 주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클럽이라는 성격과 역할을 재조명하고 동시에 홍대앞의 다른 문화예술주체들과 끊임없이 소통, 교감하는 네트워크가 살아나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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