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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30년대 재즈 (글 이진섭)
    대중음악아카이브/음악지식 2014. 9. 3. 16:16

    원문: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40&contents_id=46937&leafId=925

     

     

     

    사진: 재즈의 발명가 ‘루이 암스트롱’과 만능 엔터테이너 ‘빙 크로스비’

     

    미국(美國)의 성장 - 부의 축적, 문화의 향유

     

    1900년대 초 미국식 자본주의는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하는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와 결합하여 미국 사회를 움직였다. 백열전구를 포함하여 1,000여 개 이상 특허를 보유한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철강으로 미국의 기반 산업에 일조한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그리고, [T 모델]로 미국인들에게 자동차 시대를 열어준 헨리 포드(Henry Ford) 같은 사업가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의 원동력이 된다. 이 시기, 상당수 미국인들은 살림이 풍족해져, 나름의 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흑인 차별과 여성의 참정권 문제 등 아직 사회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흑인들의 애환을 담은 음악 - 흑인 영가, 블루스

     

    사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더 블루스]

    유럽인들은 미국의 넓은 대륙을 개척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오랜 시간 동안 흑인들은 고통과 핍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863년 1월 1일,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우여곡절 끝에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노예 해방은 몇 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또, 흑인들이 백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기까지는 오랜 투쟁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프리카 계 미국 흑인들은 오랜 억압과 노역을 견디면서 음악을 자신들의 안식처로 삼는다. 이들은 고달픈 삶을 노동가(Work Song)로 달랬고, 백인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되면서 접한 교회 음악에 자신들의 운율을 섞어 흑인 영가(Negro Spiritual/Gospel song)로 발전시켰다. 또, 암울한 처지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승해 나갔다. 이것들은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블루스(Blues) 음악으로 발전된다. 대게, 블루스는 화성적으로 3음(E)와 7음(B)를 반음 낮춘 음계를 사용하여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를 블루 노트(Blue Note)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루스 연주자들 가운데서도 종종 5음(G)을 낮추거나 4음(F)을 높여 변조를 주는 경우도 생겨나, 현재의 블루 노트는 5음의 형태도 수용하고 있다.


     

    메이저 스케일에서 본 블루 노트

     

     


    평소, 블루스의 열혈 팬으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는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필름 [The Blues]에서 "블루스는 미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음악이다. 블루스의 스토리텔링은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음악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실제, 흑인들의 삶의 애환이 반영된 블루스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재즈,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로 발전해 나가면서 팝 음악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뉴 올리언스, '재즈 시대'의 포문을 열다

    재즈 비평가 남무성은 초기 재즈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재즈 = 아프리카 계 미국 흑인들의 노동요(Work Song) + 블루스(Blues) + 렉타임(Regtime) + 흑인 브라스 밴드의 행진곡(또는 뉴 올리언스의 전통적인 장례행진 음악) + 유럽 고전 음악(Classical Music)

    (만화로 보는 재즈역사 100년 18p)

     

     

    태생부터 융합적인 성격과 자유분방함을 지닌 재즈 음악은 미국의 경제 성장기인 20세기 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초창기 재즈는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New Orleans)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원래 무역항이었던 뉴올리언스는 다양한 인종이 혼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 항구로 지정됨에 따라 군악대와 브라스 밴드들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재즈 음악이 활성화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나가고 있었다. 초기 재즈에서 악기 편성이 군악대를 표방해 관악기가 주를 이루고 불규칙적인 리듬, 자유분방한 악센트 그리고, 즉흥연주가 두드러졌던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 피아니스트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과 코넷 연주자 킹 올리버(King Oliver)는 뉴올리언스에서 활동하면서, 1920년대 재즈 시대를 열었다.

     

    루이 암스트롱, 창의와 혁신을 연주하다


    사진: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1 - 1971)


    1920년대 찬란한 재즈 시대(Jazz Age)가 열린 것과 별개로,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하였고, 인종 차별은 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시기 뉴올리언스에서 재즈계 슈퍼스타가 출현했다. 루이 암스트롱이다.

    루이 암스트롱 하면, 우리는 익살맞은 눈동자와 표정(하얗게 드러낸 치아), 코넷과 트럼펫, 독창적인 스캣, 묵직하면서도 걸쭉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루이 암스트롱의 별명인 ‘Pops’에서도 얼핏 감지할 수 있듯이, 그는 재즈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예술가다.

    루이 암스트롱 특유의 경쾌함이 녹아있는 음악들은 당시 핫 스타일(Hot Style)이라 불리며, 1920년대 재즈계를 장악하였다. 그는 또한 빅밴드가 유행하던 시절 ‘루이 암스트롱과 핫 5(Louis Armstrong & Hot 5), 핫 세븐(Hot 7) 같은 소규모 밴드를 결성하여, 솔로 연주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이는 향후 모던 재즈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즉흥적인 스캣을 통해 재즈 악기들과 멋진 앙상블을 만들어낸 점과 트럼펫의 연주 영역을 고음역대로 확장시킨 점은 루이 암스트롱의 업적을 언급할 때 꼭 등장한다. 그는 1920~30년대 수많은 레코드를 남겼고, 후에도 [What a wonderful world], [Hello Dolly], [St Louis Blues], [Let’s Fall in Love] 등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통해 훗날 재즈 음악가들뿐 아니라, 팝 아티스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후세 몇몇 흑인 재즈 뮤지션들은 루이 암스트롱에 대해 “1920년대 많은 흑인들이 암흑기를 보낼 때, ‘백인에게 웃음을 판 엔터테이너.”라고 비아냥대기도 하였다. 하지만,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 재즈의 길을 개척했던 것은 현재에도 높게 평가받는 점이다.


    사진: 많은 뮤지컬 공연과 광고 안내를 볼 수 있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대중에게 다가선 재즈 음악(1920년대 ~ 30년대)

    현재, 뉴욕은 전 세계적으로 쇼/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중심지다. NBC, CBS, ABC 등 미국 굴지의 매체사가 오랜 기간 동안 맨해튼에 본사를 두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 흐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0년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뉴욕은 뮤지컬과 보드빌(Vaudeville: 노래와 춤을 섞은 희극) 같은 쇼/엔터테인먼트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쇼/엔터테인먼트가 뉴욕을 중심으로 확산됨에 따라 브로드웨이와 할렘 부근에는 많은 클럽들이 생겨났는데, 현재 뉴욕 할렘의 남서쪽 끝에 해당하는 125가에 자리 잡고 있는 코튼 클럽(Cotton Club)은 당시 할렘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대개, 이런 클럽들은 흑인 출입이 제한된, 백인을 대상으로 한 사교/관광 클럽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쇼 출연자들은 대부분 흑인들이었다.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던 뉴욕의 사업가들과 지식인들은 클럽에서 흑인들이 연주하는 재즈/블루스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재즈 아티스트 ‘듀크 엘링턴’도 오랜 시간 동안 ‘코튼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재즈/블루스 음악을 백인들에게 퍼뜨리는데 일조했다.


    사진: 듀크 엘링턴(Duke Elington, 1889 – 1974), 1910년

     

    한편, 1920년대 뉴욕의 쇼/엔터테인먼트 계는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수익을 창출할 스타 양성에 박차를 가한다. 1920년 초반에 인기 가수 알 존스(Al Jones)가 엔터테이너로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보여주지만, 그 인기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등장한 빙 크로스비(Bing Crosby)는 라디오, 영화, TV, 음반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활동하면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그의 등장은 향후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같은 만능 엔터테이너들의 등장에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할렘의 중심지였던 ‘코튼 클럽’. 1920~40년경 사진


    듀크 엘링턴의 본명은 에드워드 엘링턴(Edward Ellington)이다. 그는 백악관 집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세련된 옷차림과 품격 있는 행동으로 듀크(duke)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다양한 재즈 스타일을 결합하여 걸작들을 쏟아내었고, 생전에 1,500여 곡을 만듦과 동시에 150여장의 앨범을 발매했을 정도로 왕성한 창의력을 자랑하는 재즈 아티스트였다. 코튼 클럽 공연 당시 특유의 정글 리듬과 우아한 연주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Piano Reflection], [Satin Doll], [Moon Indigo]를 포함하여 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내었다.

     

    만능 엔터테이너, ‘빙 크로스비’의 등장

     

    마돈나, 비욘세, 저스틴 팀버레이크 등은 음악, 영화, 라디오, 패션, 광고를 넘나드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이런 만능 엔터테이너의 조상 혹은 시조를 꼽는다면, 1930년대 이후 훤칠한 외모와 시원하게 뒤로 빗은 머리, 중후한 목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한 빙 크로스비일 것이다. 당시, 빙 크로스비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는 그의 노래가 라디오 방송을 장악했던 것은 물론, 악보와 앨범 판매가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 전까지 항상 1위를 달렸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흘러나오는 곡 [White Christmas], [Anything Goes]를 비롯하여, 그가 부른 많은 곡들은 아메리칸 스탠더드 팝의 풍요롭고, 우아한 이미지를 만들어주는데 일조하였다. 그는 또 [Going Hollywood](1933년), [Here is My Heart](1934년), [Rhythm On The Range](1936년)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진: 빙 크로스비(Bing Crosby, 1903 – 1977)

     

    1929년 대공황, 긴 터널의 시작

     

    1929년 10월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식 가격이 폭락하였다. 투자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고용은 점차 줄어들었고, 유럽의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세계 대공황의 긴 터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음악을 포함한 쇼/엔터테인먼트 계도 대공황의 풍파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클럽들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대규모 빅밴드들은 해체의 길을 걸으면서, 1920년대 할렘의 황금기도 함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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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진섭 | 팝 칼럼니스트
    ‘엠넷(Mnet)’, ‘엘로퀀스(ELOQUENCE)’,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등 다양한 매체에서 팝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였으며, 현재, 브랜드 매니저로 활동 중이다. 2013년 독일 이니셔티브 뮤직의 오피셜 포토그래퍼와 바르셀로나 럭셔리 라운지 [BOCA GRANDE]의 게스트 DJ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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