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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힙합 (글 탁선호)
    힙합 아카이브/힙합 2014. 7. 28. 15:02


    <인물과 사상 2009년 8월호>

    뉴욕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힙합 ㅣ 탁선호

     

     혁명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다


     겨울바람이 매섭던 2009년 2월 말 어느 날 밤,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의 남쪽 끝에 위치한 S.O.B라는 작은 바에는 10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길 스캇-헤론(Gil Scott Heron)' 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시간 10분 전에 도착해 통로 한쪽에 자리를 잡은 나는 어렵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공연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연주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작은 무대에서는 미리 설치된 조명과 악기들만이 애가 타는 관객들의 시선을 무심히 받아내고 있었다. 동양인이 혼자 서 있는 게 안쓰러웠는지 한 20대 흑인 여성이 내게 말을 붙여왔다. 직장을 마치자마자 택시를 타고 급하게 달려왔다는 그녀는 한국에서 온 내가 길 스캇-헤론을 안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프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스캇-헤론이 졸업한 링컨대학(Lincoln University)을 다녔으며, 그의 노래와 책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는 스캇-헤론의 책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젊은이들의 삶과 경험을 가장 정확하게 그려낸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모교 어느 빌딩의 한 벽은 그의 사진과 글들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고도 했다. 그날 밤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혁명을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다(Revolution Will Not Televised)>라는 노래의 가사가 그곳에 쓰여 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집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형제여/ 코드를 연결하고 텔레비전을 켠 채, 그렇게 책임을 회피할 순 없어/ 헤로인 따위에 너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돼/ 혁명은 닉슨의 사진을 보여주지는 않아/ 혁명은 네 입을 위해 섹스어필하지는 않아/ NBC가 8시 32분에 당선자를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코카콜라가 혁명을 더 낫게 만들지는 않아/ 혁명은 너를 운전석에 앉게 할 거야/ 혁명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아/ 혁명은 재방송되지도 않아/ 혁명은 라이브가 될 거야

     

    길 스캇-헤론은 ‘랩은 대부(the Godfather of rap)' 혹은 ’힙합의 대부‘라고 불리는 흑인 가수이자 시인이며 작가다. 뮤지션의 명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는 보통의 대중음악 서적과 잡지들이 작성하는 참고목록에 오를 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캇-헤론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발표된 그의 노래가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더욱‘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노래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미국 사회를, 그리고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난 힙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1970년대 힙합이 뉴욕의 가장 가난한 동네인 남부 브롱스(South Bronx)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상황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미국 사회의 낯부끄러운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의 한 단면을 보기 위한 우회로이기도 하다.

     

    절망과 분노의 목소리, 길 스캇-헤론


    길 스캇-헤론의 첫 번째 앨범⟪125번가와 레녹스에서의 한담(Small Talk at 125th and Lenox), 1970⟫에 실렸던 <혁명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다>는 두 번째 앨범 ⟪한 남자의 편린들(Pieces of A Man), 1971⟫에 다시 실리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상업화된 대중문화와 미디어를 날카롭게 공격한 이 곡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 내외부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당시 가장 논쟁적인 노래 중 하나가 된다.


    스캇-헤론은 첫 앨범에서 대담한 화법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역사와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첫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멜로디 없이 콩가(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래된 쿠바의 춤, 혹은 춤의 밤주에 쓰이는 북)와 여러 타악기의 비트에 맞추어 시를 읽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달 위의 흰둥이(Whitey On the Moon)>라는 곡에서 나사의 달 탐사계획과 가난한 게토 지역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대조시키며 달에 사람이 가는 시대에 게토의 삶은 왜 여전히 비참할 수밖에 없는지 묻는다. 그는 도심의 빈콘층을 고려하지 않는 백인우월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마약과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토 지역 흑인들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스캇-헤론은 <진화(evolution)>라는 곡셍서 “1600년대에 나는 다키(darkie)였고 1865년까지는 노예(slave)였으며 1900년대에는 니거(nigger)였다”며 백인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온 흑인의 역사를 읊는다. 이어 “1960년대에 니그로(negro)가 되었고, 이제는 흑인(Black)이라고 불리지만 백인들의 사랑을 원하는 이등 시민일 뿐”이라며 흑인들에게 주체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그는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의 죽음 이후 스스로 배우고 고민하고 행동하던 시절이 지나가버렸음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시대를 보는 길 스캇-헤론의 눈은 날카로웠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언제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음악적으로는 블루스와 재즈, 펑크적 요소를 시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스포큰 워드(spoken word)’와 결합시키려 했고, 정치적으로는 민권운동 이후 미국 사회의 보수화와 흑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확산되어가던 허무주의와 싸우고자 했다. 스캇-헤론은 <미국의 겨울(Winter in America), 1974>이라는 곡에서 미국의 위선을 아름다운 언어와 목소리로 드러낸다. 그는 이 곡에서 1960년대 민권운동 이후 사람들은 좌표를 잃었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전진하지 못하고 비틀댄다고 노래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떤 것과 싸워야 할지 모른다. 길 스캇-헤론에게 당시의 미국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메마르고 적마한 겨울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그네들을 환영했던 인디언과/ 한때 평원을 지배했던 버팔로처럼/ 검은 구름 밑을 돌고 있는 독수리처럼 비를 기다리면서/ 비를 기다리면서

    해변에서 휘청대는 도시들처럼/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나라에서/ 고속도로 밑에 묻힌 숲들처럼, 자라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어/ 자라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지금은 겨울. 미국은 겨울이야/ 그래, 모든 치유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쫓겨났어/ 하지만 사람들은 알아, 지금이 겨울이라는 걸/ 미국은 겨울이야/ 아무도 싸우고 있지 않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너의 영혼을 구해내. 신은 알지/ 미국이 겨울이라는 걸

     

    길 스캇-헤론은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목격자이면서 기록하는 이였고 가수이면서 정치적 활동가였다. 그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결코 감추지 않는다. 스캇-헤론은 게토 지역 사람들의 마약중독에 관해(병 The Bottle, 앤젤 더스트 Angel Dust),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해(요하네스버그 Johannesburg),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우리는 거의 디트로이트를 잃어버렸다 We Almost Lost Detroit), 워터게이트에 대해(에이치투오 게이트 블루스 H20 Gate Blues), 그리고 레이건 시대의 반동성에 대해(B급영화 B-Movie) 비판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B급 영화>에서 스캇-헤론은 “글세, 내가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위임 이래, 제기랄(mandate, my ass)’”이라는 말로 레이건의 압도적인 승리 저변에 깔린 미국 사회의 반동적 변화를 비판한다. 스캇-헤론은 레이건이 전체 미국인의 26%가 아니라 오직 등록된 유권자(the registered voters) 중 26%의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한 것처럼 생각하고 레이건 또한 모든 권력을 위임받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한다. 스캇-헤론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 안에서 “인종차별은 더 심해지고 인권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평화는 흔들리고 전쟁 아이템의 인기는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낸다. 그에게 레이건의 승리는 미국 역사상 현실을 읽어내는 분별력이 가장 희미해진 것을 의미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재미있는 영화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제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이 ‘B급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길 스캇-헤론이 ‘랩의 대부’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들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재즈와 블루스를 힙합이라는 새로운 장르와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민권운동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펑크와 디스코가 대중적 인기를 얻던 시절, 재즈와 블루스 리듬이나 단순한 타악기 비트에 맞춰 정치적인 ‘스포큰 워드’를 만들어냈다. 나중에 이는 힙합뮤지션들의 랩으로 이어졌다. 스캇-헤론은 자신을 블루스(Blues)와 정치가(Politician)를 결합한 말인 ‘블루시션(Bluesician)'으로 불렀고, 사람들은 그의 노래로부터 말콤 엑스(Malcom X)와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모습을 마주치게 된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함께 미국 남부의 테네시(Tennessee)주에 살 때 스캇-헤론은 블루스를 듣고,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흑인 작가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문학작품을 읽으며 자랐다. 뉴욕의 브롱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장 오래된 흑인 대학교 가운데 하나인 링컨대학에서 학부를 마칙,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1920년대와 1930년대 할렘르네상스 시기 작가들의 작품을 섭렵했다. 스캇-헤론은 또한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많이 살던 뉴욕의 첼시 지역에 정착해 살면서 라틴 음악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길 스캇-헤론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이나 문학을 통해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권운동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미국 사회가 보수화되어가고 있을 때 재즈나 블루스, 그리고 아프로-아메리칸 문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정치적인 요소들을 살려내려고 했다. 하버드대학 철학과 교수 시절 힙합 앨범을 낸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힙합을 예언자적(Prophetic) 힙합과 콘스탄틴적(Constantinian) 힙합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예언자적 힙합은 살상, 살인, 전쟁 반대와 같은 평화주의적 성격을 띠었던 초기 기독교처럼 폭력, 경찰의 학대, 빈곤 등 주로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반면에 콘스탄틴적 힙합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서 군림했던 것처럼 미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이며 물질만능 주의적 요소를 보이는 많은 상업적 힙합 음악이 여기에 속한다. 힙합에 대한 웨스트의 분류를 기준으로 삼자면, 스캇-헤론의 음악은 가장 정치적이고 의식적이면서도 음악적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언자적 힙합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 스캇-헤론은 랩의 황금시대로 불리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권력과 싸워라(Fight the Power)>를 불렀던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나 LA 경찰의 학대를 고발하는 <어떻게 남중부에서 살아남을 것인가(How to survive South Central)>를 불렀던 아이스큐브(Ice Cube)와 같은 힙합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탈산업화와 교외화 -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


    뛰어난 예술작품이 창작자들의 창조적 능력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의 산물이듯이, 힙합 특유의 비트와 언어도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산업화와 교외화라는 미국 사회의 변화 한가운데 있었던 도시 내부 젊은이들의 창조성의 산물이다. 시작은 1970년대 미국의 가장 가난한 지역이던 뉴욕 브롱스 지역이었다. 일자리가 없던 젊은이들은 음악과 춤을 통해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을 궁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랩을 통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삶의 조건들에 대해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솔직한 언어에는 그들이 가진 폭럭, 성,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 곧 경제적 빈곤과 실업, 주류사회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직시가 되었다. 마샬 버만(Marshall Berman)은 1970녀대와 1980년대 뉴욕의 래퍼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창조해낸 소리와 말, 거리의 풍경들을 “집단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구술언어이자 시각언어”라고 말해따. 힙합과 그래피티가 단순히 노래의 한 장르나 거리의 낙서가 아니라 빈곤과 절망르로부터 버텨내려는 몸부림이자 삶의 한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게토 지역 젊은이들의 절망은 더욱 깊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푸에르토리코인들과 남부의 흑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뉴욕과 같은 대도시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 시기 뉴욕의 제조업 일자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1954년 23만 5000여 명에 달했던 제조업 고용은 1976년에는 11만 2000여 명으로 감소했으며 브루클린에 있던 대부분의 큰 공장들은 뉴욕을 떠났고 뉴욕시의 항구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탈산업화로 인해 전통적인 육체노동자들의 일자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한 계층과 전통적인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교육수준이 낮은 아프리칸이나 라티노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백인 이민자들이 이룩한 아메리칸 드림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흑인과 라티노들이 붙잡기엔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탈산업화라는 경제적 구조의 변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 초중반 뉴욕의 브롱스(Bronx)에서 힙합의 초기 모습들이 서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때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의 거주지였던 브롱스는 1950년대 브롱스 남부를 가로지르는 ‘크로스 브롱스 익스프레스웨이(Cross Bronx Express, CBE)’가 건설되면서 슬럼화가 진행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연방정부는 교외와 도심을 연결하고 각 도시와 주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 많은 백인 중산층, 노동계급들이 도시를 떠나 교외에 정착했고, 자동차는 미국적 삶의 일부가 되었다. CBE가 지나간 브롱스 남부는 그러한 교외화로 인한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비록 6차선이었고 수마일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서이 한 커뮤니티 내외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많은 주민들이 고속도로의 건설을 반대했짐나, 뉴욕의 오스망(나폴레옹 3세 때 파리를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라고 불리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고속도로 건설을 밀어 붙인다. 많은 개발이 그렇듯 CBE의 건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그들 삶의 QN리를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현대성의 경험: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의 저자인 마샬 버만은 자신의 고향인 남부 브롱스에 주민들의 삶의 질서를 파괴할 고속도로를 지으려는 계획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자신이 받은 절망감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처음에 우리는 그 계획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세상의 일 같았다. 무엇보다 우리 중에 차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삶의 흐름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동네와 다운타운을 연결하는 지하철이었다. ······ 설령 그(로버트 모제스)가 그것(크로스 브롱스 익스프레스웨이)을 계획 중이라도 여기 미국에서는 그런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여전히 뉴딜의 여운에 취해 있었다. 정부는 우리의 정부였고, 결국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크로스 브롱스 익스프레스웨이 건설을 위해 강제 철거된 가구는 공식적으로는 3866가구에 불과했지만, 공사로 인한 소음과 먼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커뮤니티 내 상업 활동의 위축으로 인해 브롱스를 떠나야 했던 가구는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남부 브롱스에서만 6만여 명의 사람들이 떠났다. 차들은 폐허 위를 달렸다. 1963년 고속도로가 완성된 이후 커뮤니티의 절망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67~1977년 사이 브롱스의 인구는 3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이는 같은 기간 뉴욕시 전체 인구 감소의 30%를 차지했다. 폐허는 사람들을 깊은 좌절로 몰아넣었다. 떠날 수 있는 자들은 떠났고, 어쩔 수 없이 남아야 하는 자들만 남았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이었다. 버만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고속도로가 완성되었을 때 브롱스는 완전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 터질듯이 많은 화물을 실은 트럭들이 내는 굉음은 낮밤을 가리지 dskg고 거리를 흔들어댔다. 쉴 새 없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트럭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뿌연 연기, 고막을 찢는 듯한 소음은 브롱스를 가로지르던 수마일의 길들을 그리고 그곳에 터전 잡아 살고 있던 사람들을 질식시켜갔다. ······ 고속도로의 건설은 브롱스 상업블록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렸다. 브롱스의 상권이 남북으로 나뉘고 각각의 상권이 고립되면서 만은 상점들이 파산했다. 남은 상점들은 여전히 도시를 탈출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범죄 대상이 되었다. 도로가 나면서 늘어난 것은 솟아오르는 연기와 매연뿐이었다. 인구는 감소했고 경제는 황폐해졌으며 좌절의 정서는 고스란히 깊은 내상으로 남았다. 황폐한 도시를 감싸는 공포의 소용돌이가 브롱스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크로스 브롱스 익프레스웨이 건설은 한 커뮤니티의 외형을 붕괴시키는 것을 넘어 커뮤니티 내부를 파멸의 늪으로 몰고 갔다. 희망을 버리기 시작한 공간에서는 마약과 범죄가 들끓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마약과 범죄는 피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다단계가 한 동네를 집어삼키듯 조금씩 커뮤니티 내부는 황폐해졌다. 마약과 범죄는 버림받은 존재인 자신에 대한 파괴였으며 동시에 희망을 앗아가는 사회에 대한 복수였다.

    자기파괴의 가장 극단적인 혀태는 방화였다. 1970년대 뉴욕시에서는 매년 2000여 채의 빌딩에 화재가 발생했다. 대부분은 남부 브롱스와 같은 게토지역에서 발생했고, 화재보험금을 노린 방화(arson)가 많았다. 슬럼화로 인해 도시 내부가 황폐화되고 건물들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건물주들이나 세입자들은 불이라도 질러 보험금을 타거나 아니면 차라리 그냥 버려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초 주요 보험회사들은 임대인 화재의 보험 청구에 대해 지불하기를 거절했다. 여론은 보험회사들의 편이었다. 사회는 왜 그들이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이해할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보험을 지급하는 것을 거절한 해 브롱스에서는 단지 12개의 빌딩만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전해 1300개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에 비하면 엄청난 감소였다.

     

    폐허를 먹고 자란 창조적 열정


    힙합은 이런 빈곤과 실업, 사회적 고립과 소외 그리고 절망으로부터 터져나온 흥겨운 절규였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폐허가 된 도시와 사회를 향한 분노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 아무것도 없음이 그들의 몸속에 있는 어떤 감각들을 자극시켰다. 그들은 재즈, 펑크, 레게의 즉흥성과 리듬을 혼합시켰고 랩배틀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다. 번듯한 음악기기 없이 ‘붐 박스(boom box)’와 ‘턴테이블(turntable)’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즐기고, 기존의 음반을 스크래칭함으로써 손쉽게 자신들만의 비트와 리듬을 만들어냈다. 공연장은 없었지만 자신들의 뒷마당과 폐허가 된 도시의 길거리와 공원, 주차장에서 춤과 노래를 생산해냈다. 랩 특유의 변화무쌍하고 경쾌한 리듬이 그들의 기질과도 같은 것이었다면 랩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내는 언어들은 자신들을 세상 끝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분노였다.


    힙합은 그래피티(graggiti)를 통해 도심의 게토 지역을 넘어 전체 도시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래피티는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었다. 1930~1970년대까지 도시 인프라를 위한 예산이 자동차 사용자들을 위한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는 데 쓰이는 동안 뉴욕의 지하철은 방치되어 있었다. 지하철의 전동차들은 낡았고, 의자들은 부서져 있었으며 수명이 다한 전구들은 교체되지 않은 채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의 그림을 전동차에 그리기 시작해싿.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래피티가 지하철을 넘어 도시의 빌딩 벽들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힙합은 온 도시를 뒤덮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지하철과 같은 공공재산을 넘어 개인들의 사유재산인 건물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황폐한 삶의 환경을 둘러싼 소유관계를 건드리는 행위였다. 주류사회는 그래피티를 통제되지 않는 도시의 상징, 그리고 10대들의 무책임한 파괴적 행위라고 규정지었다. 그래피티와 같이 재산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나 사소한 거리의 범죄는 ‘라이프스타일 범죄’로 범주화되었다. 주류사회는 이러한 범죄가 사회 전체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1970년대 주류사회 내 반그래피티(anti-graffiti)분위기는 이내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게 될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부추겼다. 일례로 뉴욕의 대표적인 보수 연구기관인 맨해튼연구소(Manhattan Institute)는 그래피티를 청소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후에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 이론의 개발로 현실화 된다.미국의 주류사회가 범죄행동의 원인을 빈곤이나 실업같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무지나 게으름, 무질서와 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뉴욕시 전체를 배경 삼아 자신들의 절망과 분노를 표현하녀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형식을 테스트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자본축적의 위기에 직면한 금융가와 기업 엘리트들이 재정위기에 처한 뉴욕시를 대상으로 새로운 자본축적 전략을 테스트했다.


    그래피티가 절정에 달해 있을 때인 1975년~1977년은 뉴딜 시기를 지나오면서 구축된 뉴욕의 폭넓은 사회복지제도가 해체되기 시작한 때이다. 한때 공립병원은 뉴욕시 내에서만 22개에 달했고, 노동자들은 시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주택에서 월세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으며, 노동자계급의 하버드대학이라고 불리던 뉴욕시립대(CUNY)는 무상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했다. 1960년대 연방정부 차원에서 도입된 메디케이드(Medicaid, 저소득층 의료지원)와 메디케어(Medicare, 65세 이상 노인에 대한 의료지원), 빈곤과의 전쟁(The War on Poverty)등과 같은 정책들은 뉴욕시의 복지수준을 한층 더 높엿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뉴욕의 기업엘리트 집단들은 노동자들과 서민들을 위한 사회적 지출이 기업의 부담을 높이고, 세계경제 내에서 뉴욕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5년 뉴욕시가 재정위기에 처하자, 뉴욕의 기업엘리트 집단들은 뉴욕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바꾸고 계급권력을 회복해나갈 것을 선언한다. 이들에게 1970년대의 뉴욕은 사회적 질서를 통제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관철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장소였다. 금융기관들은 재정위기에 빠진 뉴욕시의 채무상환 연장 요구를 묵살했고, 연방정부는 뉴욕시의 구제금융 요청을 거부했다. 뉴욕시를 도우려는 의회의 어떠한 노력도 막을 것이라는 포드(Gerald Ford)대통령의 연설은 한 일간진에 의해 ‘포드 뉴욕에게 답하다: 나가 죽어라(Ford to City: Drop Dead)’ 라는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대중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뉴욕시민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뉴욕의 강력한 노동운동의 전통, 동성애와 히피 문화등을 악을 뿌리라고 여겨왔던 미국의 보수헤력은 뉴욕의 파멸을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뉴욕의 기업과 금융 엘리트들은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성된 ‘긴급금융조절위원회(Emergency Financial Control Board)’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통해 뉴욕시의 수입과 지출, 고용정책에 개입했다. 뉴욕시 공공서비스 분야의 인력이 감축되었으며 공무원 노조는 무력화되었고, 무상이던 뉴욕시립대(CUNY)는 수업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하비는 뉴욕에서 금융기관과 엘리트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방정부의 정책방향을 바꾼 것은 칠레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만큼이나 효과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뉴욕의 재정위기 국면에서 일어난 일들은 “새로운 전쟁 초기의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다른 곳에서 일어날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위한 일종의 리허설이자 워밍업 장소였다.


    이러한 국면에서 보수세력들은 뉴욕시민들을 생산적 시민과 아니면 그렇지 않은 비생산적인 시민으로 구분하면서 흑인과 히스패닉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생산적인 시민들을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벙을 모색하게 된다. 사회적 차별과 소외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마약과 범죄에 찌든 사람들, 천연색 스프레이로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사람들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그들’이었고, 바로 뉴욕의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1976년 뉴욕시의 주택 국장인 로저 스타(Roger Starr)는 ‘계획된 축소(Planned Shrinkage)’룰 통해 도시의 위기를 해결할 것을 주장한다. 교외화로 인한 슬럼화, 탈산업화로 인한 전통적 직업의 감소 등으로 도시의 위기가 불가피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범죄와 빈곤이 만연하는 지역의 학교와 병원을 폐쇄하고 순찰과 소방 서비스, 전기와 수도 공급, 쓰레기 수거 등의 공공서비스를 중단함으로써 비생산적 시민들을 도시로부터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한 도시가 가진 제한된 사회경제적 자원을 조세수입의 기반을 침식시키는 가난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스타의 ‘’계획된 축소‘는 뉴욕시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뉴욕과유사한 많은 도시들의 정책과 개발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뉴욕의 정책집행자들은 남부 브롱스나 할렘과 같은 게토 지역의 범죄나 화재 사건을 외면했고 이들 지역의 주민들의 빈곤과 질병은 방치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게토 지역의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에이즈와 살인사건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율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처럼 민권운동 이후 계급과 인종에 따른 차별은 다른 방식으로 미국 사회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미국 사회는 사회경제적 마이너리티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소외된 자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애썼다. 게토 지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외와 존재론적 절망까지 자신들의 창조적 에너지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힙합을 단순히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니라 문화적 운동이며 실천으로 규정한다. 당시 힙합을 만들어냈던 이들은 20~30년 후 자신들의 손과 입, 몸을 통해서 태어난 것들이 전 세계 젊은이들의 음악과 춤, 패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힙합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실험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뉴욕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생겨난 힙합은 글로벌리즘과 상업화 덕택에 대중음악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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