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P-Type 연재 칼럼 (출처 리드머)
    힙합 아카이브/힙합 2011. 1. 17. 00:01

    얼마 전 자신의 첫 번째 결과물 [Heavy Bass]를 내어 놓고 활동 중인 피-타입 (P-TYPE)이 리드머에서 연재하는 첫 번째 컬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는 하지만, 요즘 의식있는 뮤지션의 부재는 물론이고, 씬(Scene)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제대로 된 리스너들도 부족한 것이 현실인 듯 싶습니다.

    본 컬럼은 그동안 정보 부족에 시달리는 국내 리스너를 위한 정보 제공의 입장에서, 혹은 국내 시장에 관한 우회적인 논의를 중심으로 해왔던 여타 리드머 기사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의 접근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본 게시물은 지속적으로 연재됩니다.

    P-Type 연재 칼럼 : 방법론적 개념잡기 (1) - 랩(rap)
    글 | P-TYPE (contributor) / 04-07-09


    (1) 아는 자의 사명

    시작에 앞서 우선은 간단한 ‘못 박음’부터 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나는,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이 오리지널리티라는 미명 하에 나만의 사견으로 머물러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나에게, “누가 너에게 선생질을 허락했느냐” 나무라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고 rhythmer.net의 웹진을 통해 발표하는 이유는, 선생질로 폼 좀 잡고 잘난 척이나 해보자는 욕심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개념 없는 자들의 언행으로 인해 이 땅의 문화가 정체의 정체를 더해가는 꼴을 더 이상은 묵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 이제부터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꽤나 한참 전에 대한민국 땅에 상륙해, 과도기를 지나 이미 정립 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힙합’이라는 문화. 그 가운데에서도 ‘랩(rap)'이라는 것의 한국식 방법론에 대해 좀 지껄여보는 것을 시작으로, 방법론적 개념잡기의 첫걸음을 내디뎌볼까 한다.


    (2)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언젠가 이런 이론을 주장하던 자들이 있었다. “영어 랩의 방법론은 한국어 랩의 방법론이 될 수 없다. 한국어 랩은 한국어의 언어적 특성에 맞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머지않아 이 자리를 통해, 내가 이 말에만 집중하여 꽤 노골적인 시비를 걸 수 있는 시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된다. 딱 잘라 결론만 짚고 넘어가자. 언젠가 당신을 매료시켰던 그것은 영어식 방법론을 지닌 그 힙합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즐기기를 넘어 행하기로 한 힙합이 영어식의 그 힙합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식으로 재해석되어 새로운 방법론을 지니게 된 다른 어떤 무엇인지 스스로 심각하게 의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방법론은 그 형식을 결정짓는다. 다양한 형식들 가운데 동일한 형식을 가진 것들이 모여 일련의 카테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음악이 다른 문화 예술 영역과 구분되고, 음악 안에서 장르가 형성되고 구분되는 모든 현상들이 바로 이 원리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방법론은 그 소속을 결정짓는다.” 이제 앞서 언급했던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 이렇게 생각하며 무시하기로 하자. “이 방식이 싫으면 그냥 다른 거 하지?”

    흑인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화성의 조화를 그 목적으로 하는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라기보다는, 그루브의 완성을 그 목적으로 하는 리듬 중심의 음악이라는 점일 것이다. 청색에서 남색이 난다고 했다. 재즈, 펑크, 소울 같은 선대의 흑인음악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 감동을 좇고 받아들여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힙합음악에선, 저런 흑인음악의 특징이 더 많이 묻어나면 묻어났지 결코 덜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랩은 타악화 된 보컬의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난, 랩의 기원을 스켓에서 찾았던 누군가의 어떤 이론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골수 리듬분자 힙합 안에서 타악기 보컬이 탄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해 랩은 또 다른 드럼(drum)인 셈이다. 랩을 운율(rhyme)이라는 기본단위로 이루어진 또 다른 타악기로 이해한다면, 운율이라는 그 기본단위는 언어의 음운들이 덩어리 덩어리로 뭉쳐져 만들어내는 한 번의 타악소리 울림과도 같다. 따라서 잘 짜여진 랩이란, 운율이라는 단위로 이뤄지는 리듬의 진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루브의 완성에 도달하는 그런 랩일 것이다. 그리고 잘 쓴 랩 가사란, 음악적으로는 그루브를 이끌어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훌륭한 문장을 이루어내는 그런 랩 가사일 것이다. 그리고 잘 하는 랩퍼란, 랩을 잘 만들며 가사를 잘 쓰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랩을 한 명의 보컬 세션으로서 훌륭히 노래해내는 그런 랩퍼일 것이다. 세상에 많고 많은 소리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흔한 소리일지도 모를 "말". 그 "말"로 만들어내는 리듬악기. 그게 랩이다.


    (3) 분명한 기준선의 확립을 위하여

    오늘은 커다란 개념만을 짚어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번에 너무 깊숙이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모두가 이미 어렴풋이는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 혼자만 열심히 떠들어 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대한민국 힙합씬에선 아직 아무도 이런 기본적인 개념잡기에 나섰던 사람이 없다. 몰라서 혹은 게을러서 아니면 부끄럽고 어색해서...... 그렇게 모두가 방관한 힙합씬은 오늘 날 결국 기준선의 모호함과 리더의 부재를 낳았다.

    힙합에서 진짜(real)냐 가짜(fake)냐에 대한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제3자인 관객들이 심판하는 이 가치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고, 나아가 힙합이라는 문화 전반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힙합씬에서 기준선이 모호하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호한 기준선은 판단능력 없는 대중을 만들고, 결국 질 낮은 작품들과 그 주인들이 진짜인양 득세하는 세상을 조장했다.

    난 힙합의 모든 영역 깊은 구석 까지 그 개념을 잡아줄 수 있을 만큼 박식한 사람이 되진 못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떠드는 것만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이 문화를 사랑하는 방법이며, 해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싶다.

    글 |  Rhythmer.net  P-TYPE (contributor)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P-Type 연재 칼럼 : 방법론적 개념잡기 (2) - 힙합
    글 | P-TYPE (contributor) / 04-08-02 03:48  


    (1) 힙합은 자유다(?)

    지난번 글에선 랩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방법론적 관점에서 풀어보았다. 그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자니, 한국식으로 변형되어 또 다른 방법론을 지니게 된 것들을 “힙합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분류한 내 극단적인 입장에 거부감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이는 몇몇 독자들도 눈에 띈다. 구차한 변명 따위를 늘어놓는 일이 그다지 체질에 맞진 않지만, 내 생각이 진정으로 옳다 믿는다면 반론에 맞서 논쟁을 피하지 않는 것 또한 ‘뱉은 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라 생각되기에, 오늘 글에선 지난 번 내비쳤던 본인의 극단적이고도 단호한 ‘형식론’에 대한 옹호를 펼쳐볼까 한다.

    이 땅에 힙합이 처음 발을 내딛을 즈음에 자주 들리던 물음이 있다. “도대체 힙합이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언젠가부터 아주 간단한 한마디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힙합은 자유다!” 도대체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이제는 추적도 불가능한 이 근거 불확실한 한마디는, 일탈의 구실을 찾아 헤매는 목마른 10대들에게 한줄기 빗방울과도 같았다. 개념 없는 불모지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저 한마디는 결국 ‘힙합’을 무엇이든 허락되는 개념 없는 문화로 만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 생각엔, "힙합은 자유"라는 말은 아마도 보수적인 유교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에서 힙합을 탈선한 청소년들이나 향유하는 저급한 흑인문화 쯤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 데서 그 기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자들이 갖다 붙인 하기 좋은 말이거나.

    “힙합은 자유다.” 이 한마디가 낳은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힙합다운 형식미를 갖추기 위한 방법론적 연구는 그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됐고, 이론적 정립이 채 이뤄지지 못 한 상태에서 급속도로 확산된 이 땅의 힙합은 국내 땅에 뿌리를 내린지 10년이 넘도록 아직 과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힙합은 “장난”이다

    힙합은 놀이에서 태어난 문화다. 아버지 턴테이블로 장난치다가 스크래치가, 낙서에서 그래피티가, 말장난에서 랩이 태어났다. 모든 놀이에는 규칙(rule)이 있다. 힙합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바로 이 규칙의 존재가 힙합을 ‘자유’라고 생각 할 수 없게 만드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애초부터 제 안에 ‘규칙’이라는 기준선을 세우고 그 기준선 안으로 들어온 것만을 인정하는 문화가 어찌 자유로운 문화가 될 수 있겠는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통해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을 극복하고, 나아가 놀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문화. 그것이 바로 힙합이다.

    힙합은 결코 자유로운 문화가 아니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 칼날처럼 예리한 기준선을 그어놓고 그 기준선 안에 있는 것은 진짜(real), 벗어나면 가짜(fake)라 규정짓고 매장해버리는 단호한 문화다. 규칙을 어기면 아웃이다. 힙합은 게임이다.

    행여 이쯤에서 “그건 미국 얘기고, 그래도 우리나라에선...” 하는 사람만큼은 제발 없길 바란다. 나와 당신들이 하려는 힙합도 어쨌거나 힙합이다. 적어도 나는 날 미치게 만든 바로 그 힙합이 좋아서 그 힙합을 하려고 이 바닥에 뛰어든 것이다. 난 새로운 어떤 형태의 고유 한국문화를 정립하고자 이 바닥에 뛰어들진 않았다.


    (3) 빛 좋은 개살구

    철 지난 SOURCE나 VIBE 잡지를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기웃거리고, RUN DMC의 중고 테이프를 구하기 위해 미군부대 근처를 이 잡듯 뒤지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힙합천국이나 다름이 없다. DR.DRE와 JAY-Z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홍대 클럽에선 최신의 힙합 빗트에 맞춰 늘씬한 여자들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춘다. 대학 마다 힙합 동아리 하나 쯤 없는 학교가 없고, 외국 유명 힙합 가수와 디제이들이 심심찮게 내한공연을 한다. 난 오늘날의 이 모든 즐거운 결과들을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빛 좋은 개살구.”

    이런 상황에선 누군가 나서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나선 사람이 단호한 입장을 펴면 펼수록 더 좋다. 그리고 국내의 과도기 상황을 굳이 운운하지 않아도, 단호한 자세로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힙합이라는 범주 안에는 있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진짜 힙합이냐. 이 질문에 대한 누군가의 대답이 오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오답은 원리를 깨달은 후에라도 정답으로 수정하면 되니까. 정작 위험한 생각은 따로 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짧게 생각하면 자유분방하고 경직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연한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아니 한술 더 떠 구분의 필요성 까지 부정해버리는 저런 발상이야 말로, 과도기 속에서 대중을 혼란 속에 빠뜨리는 무책임하고 나태한 생각인 것이다.


    글 |  Rhythmer.net  P-TYPE (contributor)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방법론적 개념잡기(3) : 언더그라운드
    글 | P-Type (contributor) / 05-04-03 21:10  

    What's The Underground?!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와 관련한 몇 가지 개념적 정의들 - 상대적 개념들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차례 -
    1. Definition Of The Art
    2. Where Is The Underground
    3. It's Not Minor, Just Not Major
    4. Independent Money
    5. All For The Auteur

    이 보고서는
    1. '언더그라운드'라는 개념과 혼동하기 쉬운 여타의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해 알아보고,
    2. '언더그라운드'와 그것들과의 구체적인 차이점을 이해하여,
    3. '언더그라운드'의 개념을 보다 확실히 이해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1. Definition Of The Art

    시작에 우선하여, 이 문서가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의 오용을 막기 위한 이야기로 쓰여짐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언더그라운드는 일개 예술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특정 예술가들의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는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언더그라운드'는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 용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답답하더라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자. 우리는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를 이해하고 그 무분별한 사용을 피하기 위해서, 먼저 '언더그라운드'라는 개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개념의 카테고리, 즉 '예술'이라는 추상적 범주의 개념에 대해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술'이라 함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누군가 내게 불시에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예정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자(공급자)와 이해하고자 하는 자(수용자)들을 비롯하여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하여 구상되어지고 생산되어지는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술이며 또한 예술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현하는 자는 곧 예술가요, 이해하는 자는 바로 관객이며 청중이겠습니다.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이 곧 예술행위이고, 이 행위 과정에서 도구로 사용되어지거나 그 자체로 목적시 되어져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이 곧 예술작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술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모든 게 그 자체로 예술이라 할 만 합니다. 본질과 그 기능을 이야기하자면 '기예(技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현상에 관해서만 대답하자면 그것은 의사소통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언더그라운드'를 얘기하기에 앞서 '예술'에 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이제부터 몇 가지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전제해야만 하는 굵직한 한마디가 저 대답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의사소통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본격적인 '언더그라운드' 용어 개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Q-a: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Q-b: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트(소위 인디)'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Q-c: '언더그라운드'와 '반주류(anti)'는 어떻게 다른가?

    당신은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 서론에서 언급한 정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2. "Where Is The Underground"

    Q-a: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언더그라운드'는 일개 문화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특정 아티스트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 또한 결코 될 수 없다. 국내에서는, 특정 지역에서 성행하는 Rock 음악 내지는 Hiphop 음악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결과로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때문인지, '언더그라운드'를 특정한 음악 장르로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는 예가 많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는 딱히 음악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고, 따라서 '언더그라운드'를 특정 음악 장르 혹은 그 장르에 속하는 음악인 집단 쯤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더그라운드'가 지칭하는 정확한 대상을 알기 위해 'Scene(씬)'이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씬이란 개별적 문화 장르의 공급자와 수용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 그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경제적 개념의)시장 전반을 통틀어 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씬이란, 아티스트와 관객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계 전반을 일컫는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언더그라운드'는, "각각의 예술분야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성격의 씬"이라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듯 싶다. 따라서 당신이 '언더그라운드'를 신촌이나 홍대 일대에서 연주되어지고 있는 특정한 성격의 Rock이나 Hiphop 음악쯤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교양 있고 생각할 줄 아는 문화인 반열에 끼기 위해서라도 한시 바삐 그 생각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3. Independent Money

    Q-b: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트'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매체에서건 젊은이들의 잡담에서건 '인디'라는 말은 요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인디펜던트'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인디펜던트'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용어를 사용하는 예는 극히 드물며, 심지어는 '언더그라운드'와도 구분 없이 사용되어지고 있는 예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디펜던트'의 개념은 예술계를 경제적 개념의 시장형태로 인지하고, 그 관점에서 예술 시장을 바라보았을 때 그 안에서 유통되는 자본들에 대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편이 올바르다. 스폰서와 대중에 관계하며 대량판매에 의존하는 형태의 대자본이 아닌, 독립된 형태의 소자본을 생산자원으로 지향하는 씬을 일컬어 '인디펜던트'라 부른다. 즉 '인디펜던트'는 해당 예술계의 예술적 성격이나 지향점 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경제적 관념인 것이고, 따라서 '언더그라운드'와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또 하나의 분류기준에 따르는 관념이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씬이 '인디펜던트' 적인 자본형태를 지향하는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언더그라운드'라는 예술계가 지향하는 '작가주의'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예술품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스폰서들이 지원해주나, 그 대가로 스폰서들의 의사가 어느 정도 자신들의 예술품에 투영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대량판매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대중의 바람을 자신들의 예술품에 투영시키지도 않는다. 따라서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것만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자본을 추구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언더그라운드'가 '인디펜던트' 적인 양상을 띄게 되는 경우가 많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저러한 형태의 '언더그라운드'들은 어디까지나 '언더그라운드'의 성격을 띄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인디펜던트'의 성격을 띄는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언더그라운드' = '인디펜던트'>라는 공식은 각각의 개념들이 관장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It's Not Minor, Just Not Major

    Q-c: '언더그라운드'와 '반주류(anti)'는 어떻게 다른가?

    '언더그라운드'는 제도권에 대한 단순한 'anti' 집단의 개념이 아니다. '언더그라운드'는 주류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소수를 지칭하는 것일 뿐이지, 제도권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반동 부류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언더그라운드 예술이 비상업적인 노선을 취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산물들이 잘 팔리지 않아야 할 의무도 법칙도 없다. 그렇다고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산물들은 항상 삐딱한가? 반듯하지 않아야 할 의무라도 있는가? 그것 역시도 아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대체 왜 '언더그라운드'를 반동적 성향의 집단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언더그라운드'가 그 자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씬일 수는 없다. '언더그라운드'는 어디까지나 '오버그라운드'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씬이다. 하지만 그 대자적 존재상황을 이유로 '언더그라운드'를 무조건적인 주류에 대한 반동집단으로 여겨서는 위험하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비주류(not trend)'와 '반주류(anti)'의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언더그라운드'는, 작가들 각자가 하고픈 예술을 외부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씬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따라서 '언더그라운드'라는 씬은 주류권을 거부하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작가들이 모여 반동의지를 함께 다지는 씬이 결코 아니다. '비주류'라는 말을 '반주류'와 구분해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 건 생겨나서 정착되고 발전하고 정형화되다가 결국엔 쇠퇴한다. 즉, <발생-정착-발전-정형화-쇠퇴>라는 5단계의 진행모델을 따르게 되는 셈이다. '비주류'는 바로 저 다섯 단계 가운데, 정형화의 시점에서 생겨나게 된다. '비주류'가 생겨나는 시점을 상기할 때 '비주류'는 '주류'에 대한 대안(alternative)을 잉태한 체 발생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결코 '비주류'들이 잉태하는 대안은 그 대안이 목적시 되어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련의 목적의식 아래서 '주류권'에 대한 반발로 태동하는 '반주류(anti)'들과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 성격이 갈린다고 본다. 내가 보기엔 '비주류'들의 예술적 제작의도는 보다 더 자유롭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방식을 사심 없이 수용자들 앞에 제시할 뿐이다. 그것이 받아들여지건 안받아들여지건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그렇게 내는 것이다. 혁명적 의지를 가진 소위 '안티'들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정리하자면, '언더그라운드'는 그 산발적인 창작의 자유로움을 통해 정형화 되가는 주류권 문화의 단점을 자연스레 보완하는 씬,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시도의 모색을 지향하는 씬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5. All For The Auteur

    Answer: 언더그라운드란 무엇인가

    앞서 하나씩 따져가며 작은 개념들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긴 했어도, 그 개념들 사이의 유기적 엮임은 막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또 그 유기적 연관성이 보다 밀접하게 서로를 옭아매어 그것이 필연성으로 이어지니, 그 용어의 개념들이 쉬이 헷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난 이런 '선긋기' 작업은 계속되어져야 하고, 나보다 더 뛰어난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통해 보다 더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 그럼 이제 결론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뎌 보자. 당신이 앞선 질문들의 대답들을 잘 이해했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러 있을 것이다. '언더그라운드'는 아티스트들 각자가 자유롭게 그리고 산발적으로 자신들의 방식을 주장하는 씬이고, 그 과정에서 정형화된 주류권 예술들에 대한 대안적 시도들이 행해지는 씬이다. 따라서 그 결과물들의 가운데에는 언제나 작가 자신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작품에 투영시킬 뿐이다.

    그럼 이 시점에서 본 보고서의 서론에서 본인이 내뱉고 넘어갔던 정의를 떠올려보자.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그렇다. 예술을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했을 때 '언더그라운드'의 화자들은, 청자들이 듣고 싶어하고 듣기 좋아하는 것을 얘기하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자기 목소리 내기는 자칫 예술적 자위행위에 그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수반한다. 하지만 그 위험을 동반하고서라도, 그 자유로운 외침들은 중단되어선 안 된다. 비록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 외면 받는 음지에서라도, 그 독백들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읊어져야 한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구구절절 떠들어대지 않더라도, 중학교 시절 뉴튼의 작용-반작용 법칙 정도만 이해한 사람이라면 내 생각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끊임없는 대안의 제시를 위한 자유로운 발언이 어느 문화계 어느 예술계에나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 생각에 분명 동의할 수 있으리라. 작용을 위해 반작용이, 그리고 그 작용 다음엔 다시 반작용이. 엑션 다음엔 리엑션이, 행위 다음엔 반응이 반드시 따라붙게 되어있다.

    어떤 작가가 '언더그라운드'를 지향하는 것은, 짧게 생각하면 돈키호테가 되기를 자처한 그가 그저 자기세계 안에만 갇혀서 겨우 자기하늘만 바라보는 것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키호테의 무모한 돌진은 세상 사람들 눈에 가시밭길 위로 미련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미련한 행보들에 대한 보상은 영원히 받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을 그 음지 속에 헌납한 이유는, 그런 복잡한 속세의 가치들 속에서는 애초 부터 찾을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은 보다 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어두운 지하의 발언대 앞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부르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그저 자기존재의 독창성과 개성을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부르짖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발상의 다양함과 시도의 신선함으로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그것이 씬 전체의 풍요로움을 야기할 수 있기를 원했다면, 그들은 아마도 훨씬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최근 헤르만 헤세의 소설 가운데 "황야의 이리"라는 책을 읽었다. 헤세가 사용한 '황야의 이리'라는 말의 의미는, 시대와 시대, 문화와 문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인 자들, 그래서 철저하게 고독한 자들을 의미한다. 세상과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하며, 그 고독감과 함께 자기 내면 속으로 침잠하여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헤세는 소설 속에서 철학자 니체를 예로 든다. 당대에는 니체를 정신병자라 손가락질 받게 만들었던 그의 사상이 이제는 그의 서럽던 지난 날들을 빛내준다. 언젠가 '황야의 이리'였던 니체가, 이제는 시간에 종속되지 않았던 현자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속세의 물질 보다는 궁금함을 탐했던 순수한 사람들, 시대를 앞질러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사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당나귀를 탄 돈키호테, 오늘의 정신병자들, 내일의 선구자들.

    우리는 지금 까지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쳤다. 진정한 의미의 '언더그라운드', 그 씬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야 말로 헤세가 말하던 '황야의 이리'가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길을 택할 수 없는 시대의 돌연변이로 태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조용히 어두운 곳에서 그 업을 따라 나름의 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운명의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겠지만, 결과가 나쁘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글 |  Rhythmer.net  P-Type (contributor)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P-Type 연재 칼럼 : '박자'의 '물리적 의미'에 관한 고찰
    글 | P-TYPE (contributor) / 05-03-20 21:49

    01. ‘멜로디’와 ‘리듬’

    단도직입적으로 그 성질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멜로디’는 정신적인 것이고 ‘리듬’은 육체적인 것입니다. ‘인식 방법’의 측면에서만 보면, ‘박자’는 ‘육체적 인식’에 의하여 체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말로 ‘육체적 인식’은 ‘직관’이 아닌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정신적 인식’에 근거하는 ‘화성학적 질서’에 대하여 상대적인 것입니다. '화성학적 질서'라는 것은 완전자가 내포한 ‘이데아적 질서’에 기인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 '신'에 대한 모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율’이라고 부릅니다.

    경험에 우선하는 이 완전한 질서는, 경험에 의해서는 체득될 수 없는 것이고, 정신적 사유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다분히 경험적인 물리적 현상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이 질서는 선택받은 자들이 행하는 교육을 통해서만 다른 인간들에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제사장을 통해서만 종교가 설파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며, 그것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개인 신념의 문제로 치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리듬’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심장박동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음악’이라 부르는 것은 언제나 모두 이 두 가지로 구성되며, 상기한 바처럼 이 두 가지는 각각 신과 인간을 모방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종교음악이 왜 화성적 틀을 중시해 왔고, 그 위주로 발전하였는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박자’를 가시적으로 도식화할 것입니다. 도구로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고, 방법적으로는 물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되 축약적인 기호들의 사용은 배제할 예정입니다. ‘현상’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처음’과 ‘끝’, 즉 ‘시간’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시간'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며, 다음으로는 ‘소리’라는 '현상'이 ‘시간’ 위에 안착하여 우리 앞에 발현하는 과정을 보게 될 것입니다.


    02. ‘시간’과 ‘반복’

    '시간'을 -그것이 직선이건 곡선이건 간에-물리적 의미의 '선'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이 '시간선'은 그것을 이루는 각 분절단위인 '시간점'의 '연장'이다. '시간점'은 '공간'이요 '물체'이므로, '외부 자연'으로 부터 가해진 '최초의 힘'-'빅뱅'이 되었건 '창세기'가 되었건-에 의하여 '운동'한다. '외부 자연'이 지구의 세계에 가하는 그 힘을 멈출 때, 시간점은 '정지'하며 시간선은 끝난다.

    어떤 시간점이 가졌던 물리적 공간과 그 이후의 시간점이 갖는 물리적 공간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無'가 아니고, 그 여백은 그대로 '있는' 공간이다. 그 여백은 분명 시간점이 지나온, 즉 '있었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격'이 갖는 '거리'는 공간의 의미로 존재할 수 있다. '거리'는 가변적인 것으로서, 이 가운데 '동일한 거리'를 가정한 시간점의 '연장'이 특정 시간선을 형성한다. 이 시간선을 편의상 '시차를 갖는 시간점의 집단'이라 할 때, 그 '집단' 내부에는 '동일성;동일한 거리'이라는 '규칙'이 생겨나게 된다. 이 '규칙'을 지닌 시간점의 연속으로 인해 형성된 시간선을 '반복'이라 한다. '규칙'은 집단 내의 '질서'를 형성하고, '질서'는 다시 '규칙'에 근거하여 집단의 구성원을 규정한다.


    03. ‘현상’은 ‘시간’에 종속된다

    '반복'으로 무리지은 시차를 갖는 각 시간점 위에서 '소리'라는 '현상'이 있을 때, 이 소리를 '박자'라 한다. ‘소리’는, ‘물체’들의 충돌 과정에서 발현되는 공기의 ‘파동’이다. ‘파동’이라 함은 ‘진동’의 공간적인 개념으로서, ‘진동’ 그 자체는 “공기와 공기의 충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특정한 '진동'을 우리는 ‘소리’라고 부른다.

    시간점 위에서 일어나는 ‘소리’라는 ‘현상’은 이렇게 우리 앞에 발현한다. ‘현상’은 ‘시간’에 종속된다. 따라서 시간점은, 자신이 따르는 규칙을 자신 위에 얹혀있는 ‘현상’에게 투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반복' 내에서의 '소리'는, '반복'이라는 '집단'의 '물리적인 제약; 규칙'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그것이 '박자'다.


    04. 덧붙이는 글

    제가 대중들에겐 다소 어려운 이야기가 될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화성악'에 비해 ‘리듬’의 학적 탐구 성과가 너무 미약하다는 것에서 부터 생겨났습니다. 위의 글을 정독하신 분이라면 누구나 느끼시겠지만, 제 생각에 재즈가 생겨나고 발달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흑인음악의 흐름은, 단언하건대 ‘르네상스’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악의 초점이 신의 완전함을 찬양하는 것에서 인간의 불안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옮겨진 것이니 말입니다. 시대의 초점이 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이러한 학적 논의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진행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통탄할만 한 것이 분명합니다. 미약하고 짧은 제 글을 계기로, 저보다 현명한 지식인들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글 |  Rhythmer.net  P-TYPE (contributor)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Designed by Tistory.